소설리스트

187화 (186/263)

187화

클레어가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었다.

널찍한 침실에는 촛불 몇 개만 밝혀져 있었고, 창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개하고 몇 번 깜박거리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클레어 님!”

요안나와 막시밀리안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클레어는 멍한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잠을 많이 잤나 봐.”

“사흘간 쓰러져 계셨습니다.”

막시밀리안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는 목이 마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 빠른 하녀장이 물을 가지고 달려왔다.

클레어는 그것을 받아 마시려고 몸을 일으켰다가, 침실 안에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슨 일…… 있었어?”

“기억 안 나세요?”

요안나가 염려스럽게 물었다. 클레어는 잠시 멍하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도로 감아 버렸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났으면 좋을 거 같은데, 멀쩡하게 기억이 났다.

“소식은……?”

대답이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 지났다며……. 소식은?”

“죄송합니다.”

막시밀리안이 침중하게 말했다.

“전령을 보냈지만, 아직 저쪽에 도착했을 시간은 아닙니다.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은 도착했습니다만…….”

클레어는 그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장 빠른 전신으로 오갈 수 있는 문장은 겨우 몇 줄뿐이다.

그녀는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야겠어. 내가 가야.”

사흘이나 혼절해 있던 몸은 제대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는 데만 며칠 걸릴 거라거나, 저쪽에서 소식이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미 골든 타임을 넘겼을 거라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이와 남편이 잔해에 묻혀 있다. 어쩌면 다친 채로, 아마도 빛 하나 물 한 모금 없는 곳에서.

요안나가 그녀를 끌어안듯이 붙들었다.

“안 돼요, 클레어 님!”

“가야 해. 내가 가는 게 제일 빨라.”

“움직이시면 안 돼요! 하혈량이 엄청나셨다고요!”

“다른 사람은 못 믿어! 내가 가야 한다고!”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발광하는 그녀를 요안나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그녀를 막시밀리안이 달려들어 어깨를 안아 눌렀다.

의사가 소리쳤다.

“절대 안정하지 않으시면 아기님이 위험합니다!”

그 말에 클레어의 몸이 얼어붙은 듯이 뚝 멈췄다.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막시밀리안은 팔 안에서 굳어 있던 클레어의 몸에 마치 이해가 도는 것처럼 차근차근 떨림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한참이나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되물었다.

“아기?”

“그렇대요, 클레어 님. 5주에서 6주 사이래요.”

“그럴 리가……. 나, 생리했는데?”

“그때도 하혈이었거나, 착상혈을 착각하셨을 겁니다. 초기에는 그렇게 드물지 않은 일입니다.”

클레어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말을 들었다.

주기가 딱 한 달만 어긋나고, 제날짜로 돌아왔다. 끝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또 시작했다고 짜증 냈는데, 양이 퍽 적었던 건 기억하고 있었다. 간격이 짧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 의미를 받아들인 것을 깨달은 의사가 동아줄을 잡은 사람처럼 다급히 말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유산기가 있으십니다. 가능하면 움직이지 마시고, 마음을, 편히…….”

차마 끝까지 잇지 못하고 의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클레어의 몸에서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임신이라니…….”

“클레어 님…….”

“기다릴 때는 안 오더니, 제 아빠랑 자리를 바꾼 것처럼 왔네…….”

막시밀리안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그녀를 도로 침대에 눕혔다. 클레어의 뺨이 젖어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물이 소리 없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자기가 우는 건지도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작은 흐느낌 소리가 난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막시밀리안은 그녀에게 자극이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리고 시트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었다. 귀족은 기쁨에 경박해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탄도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시트가 들썩이며 흔들렸다. 울음소리가 커져 이내 꺽꺽거리고 고통에 찬 통곡이 되었다.

하지만 눈물을 닦고 어깨를 안아 주어야 할 사람은 여기 없으며,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45. 클라우제너의 후계자

요안나만 남기고 막시밀리안이 침실 밖으로 나오자, 거실에서 빌헬름과 파벨을 비롯하여 핵심 가신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일단 진정하셨습니다. 울고 계시긴 합니다만……. 회임 중이신 건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파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는 괜찮다고 합니까?”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요. 괜찮으실 겁니다. 회임 중이시라는 말을 듣고 이성이 돌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하아…….”

괴르델러 백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부인의 주위를 소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막시밀리안의 말에 좌중이 모두 일어서서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대회의실로 향하면서 막시밀리안이 물었다.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노이만 의장님이 의회를 소집하신다고 들었는데.”

“근위대가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까요.”

클레어에게는 전해진 소식이 별로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알트마이어에서 일어난 폭동은 아렌의 이름을 구호로 내세우고 있었다. 수십 수레의 폭약을 이용해 알트마이어 저택의 담장을 부수고 동관을 습격하여, 근위대원들이 무수히 사상했다.

동시에 클라우제너 공작 부자가 머무르고 있던 호텔에도 테러가 저질러졌다.

황실은 이를 반역으로 규정짓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다음 반역자를 색출한다며 군대를 풀었다.

이에 하원이 반발한 것이다. 황실에는 황태자가 없으므로, 이 시점에서 황권을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귀족원도 소집 불가일 겁니다. 반역이니까요.”

“쯧!”

누군가가 혀를 찼다.

황제가 시해되었다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불분명했다. 시신을 발견했다는데, 워낙 오랫동안 얼굴을 비치지 않았던 터라 알트마이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신이 수도로 운구되어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디트마어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한쪽 다리를 끌고 거리로 나섰고, 이제 그를 따르는 무리는 연설회의 청중이 아니라 시위대였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클라우제너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비켜나 있기도 했다.

가주인 공작과 어린 아들이 행방불명되었다. 호위와 수행원 중 죽고 다친 자의 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누가 봐도 피해자였다. 계엄군도 시위대도, 공작저를 둘러싸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공작 부인께서 무사하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기님께서도.”

비통한 분위기를 뚫고 괴르델러 백작이 말했다.

클레어는 그냥 안주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도 에리히의 인장 반지를 갖고 있었으며, 완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대리인이다.

파벨이 눈물을 머금은 채 벌컥 화를 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입니까?”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제 배 속의 아기님이 클라우제너의 유일무이한 직계이십니다. 공작 각하께서 결혼 후에 유언장을 고치시기는 했지만, 가문에 귀속된 것은 결국 혈통을 따라 상속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돌아가셨다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아니, 파벨 경. 이건 생각해 볼 만한 문제입니다.”

빌헬름이 파벨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하고는 괴르델러 백작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상속권자는 확실히 그리프 백작이었지요?”

“맞습니다. 선선선대 공작님의 남동생이 처가 쪽 작위를 상속받아 그리프 백작이 되었고, 그쪽의 직계입니다. 뢰제너 후작가의 영식도 상속권을 주장할 겁니다. 이쪽은 공작 각하의 고종사촌이니, 혈통은 훨씬 가깝습니다. 모계 쪽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양쪽 모두 클라우제너보다는 에른스트 공작가와 훨씬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리프 백작가는 에른스트와 영지가 붙어 있고, 뢰제너 후작은 아예 에른스트의 방계였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위험합니다.”

괴르델러 백작이 말했을 때였다.

집사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황급히 대회의실로 들어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거절하지요. 지금 손님을 맞이할 때가 아닌 줄 뻔한데.”

“그리프 백작님입니다. 공작 각하께서 행방불명되셨으니, 가문을 단속하러 오셨다고…….”

좌중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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