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그리프 백작은 클라우제너 공작저의 정문 앞에서 감개 깊은 얼굴을 했다.
그는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얼마 안 되는 친척 중의 하나였고, 이 저택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손님으로 올 때와 오늘은 완전히 기분이 달랐다.
그는 자신이 클라우제너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물론 건강하고 결격 사항이 없는 완벽한 클라우제너 공작이 있는 이상 그 상속권이 유의미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에리히에게 무언가 잘못된 일이 생기기를 바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손이 적은 가문이니 혹시 또 모를 일 아닌가. 자신의 손자나 혹은 증손자 대에 이르러 좋은 일이 있을지도.
이렇게 자신이 직접 주인으로서 입성하게 될 줄은 몰랐다.
클라우제너에서 떨어져 나와 한번 하강했던 자신의 핏줄이 다시 지배 가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조카뻘밖에 안 되는 공작이 젊은 나이에 비명에 갔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은 비애에 가득 찼으나, 그런 만큼 자신이 혼란에 빠졌을 클라우제너를 잘 다독여 다스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리프 백작님. 공작 부인께서는 지금 몸이 편치 않으신지라 손님을 맞이하지 않으십니다.”
“이해하네. 공작 부인의 참담한 심경을 왜 모르겠는가? 손님으로 온 것은 아니고, 가문에 남자 손이 필요할 것 같아 온 것이지.”
“그리프 백작님.”
“공작 부인께서도 가신들보다는 친척이 낫다는 것을 알고 계실걸세. 나중을 생각해도 그렇고.”
그리프 백작이 말하는 ‘나중’의 의미를 알아들은 집사가 살짝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으나, 그 이상의 불쾌감을 표하지는 않았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건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프 백작은 로비에 놓인 장식용 벤치에 걸터앉았다.
“여기서 기다리지.”
손님 대접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서재를 당장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가신들도, 고용인들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중하게 행동하십시오. 공작 부인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이리 오기 전에 에른스트 소공작이 경계의 말을 전했다.
[클라우제너 공작이 부인에게 인장 반지로 청혼한 게 그냥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지금 실제로도 공작 부인은 거의 전권을 쥐고 있습니다. 막시밀리안 자작이 단순히 공작 부인의 호위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까지 듣고 있다고 합니다. 재정 관리인도 그렇고요.]
그 정도면, 공작 자신이 부재하더라도 완벽하게 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셈이다.
‘확실히 평범한 경우는 아니지.’
그리프 백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어떤 가문이든 상속은 핏줄을 따라가는 법이다. 그리고 공작 부인에게는 아직 자식이 생기기 전이다. 아무리 여장부라 할지언정 상속권 자체가 없는데 어찌할 것인가.
설령 에리히가 혼전에 얻었다는 그 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속을 다퉈 볼 만했다.
[그 아들은 공작 부인 소생이 아닙니다. 에리히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공작 부인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증명이 가능하지요. 그렇다면, 단순한 양자입니다.]
지금은 그 아이도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가 싸워야 할 상대는 뢰제너 후작 영식일 것이다.
[확실하게 하십시오, 그리프 백작님. 공작 부인이 비탄 때문에 모든 일에서 손을 뗀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문의 힘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이건 황후 폐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리프 백작은 그렇게 대답하고 나왔다.
사실 공작 부인이 남편과 자식까지 잃고 나서도 계속 황후와 대립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살피고자 했던 아렌의 천한 것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신들이 로비로 나왔다.
파벨이 적대적인 태도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프 백작은 관대한 마음으로 그를 용서했다. 그가 얼마나 에리히에게 마음으로부터 충심을 다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연장자인 보울러 백작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리프 백작님. 먼저 연락을 주셨더라면, 손님을 받고 있지 않다는 말씀을 전해 드렸을 텐데요.”
“손님으로 온 게 아니오.”
그리프 백작이 부드럽게 말했다.
“클라우제너가 큰일에 휩싸였는데 친척으로서 당연히 여러 일을 도와야 할 거라고 생각해서 방문했소. 공작 부인께서도 어떠신지 궁금하고.”
공작 부인 얘기가 나오자마자 가신들의 태도가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그리프 백작은 속으로 놀랐다.
그는 가신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리히가 부인에게 전권을 주었다지만, 결혼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가신들이 적극적으로 신분도 낮은 공작 부인 편에 뭉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부인께서는 사건 소식을 듣고 쓰러지셔서 안정 중이십니다. 위로의 말씀은 제가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일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가문의 일이 적지 않을 텐데.”
“백작님께서 마음 쓰실 일은 없습니다.”
“왜 내가 마음 쓸 일이 없다는 건가? 합당한 상속권자로서, 가문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겠네.”
그리프 백작은 기분이 상하여 그렇게 말하면서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평소 점잖고 수동적인 편인 괴르델러 백작이 손을 뻗어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의례적인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유언장이 개봉되기 전까지 클라우제너의 가주 대행은 공작 부인이십니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지 않소, 괴르델러 백작. 미리 준비를 해 두자는 것이지.”
“그럴 일은 없습니다.”
“내 그대들의 마음을 이해하오. 에리히 님이 건강하게 돌아오실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전에 누군가는 가문을 통솔해야 하지 않겠소?”
상속권자인 자신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그 말을 하려는데, 로비의 계단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안나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리프 백작님. 공작 부인의 시녀로 있는 요안나 블룸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이디 블룸.”
“공작 부인께서 백작님을 만나 보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에 괴르델러 백작을 포함하여 모든 가신들이 물러섰다. 막시밀리안만이 염려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클레어가 만나겠다고 했다면 자신들이 말을 얹을 부분은 없었다.
그리프 백작은 그것에도 조금 놀라며 요안나에게 물었다.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잠시 대화를 나눌 정도의 기력은 있다고 하십니다.”
요안나가 애매하게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클레어는 지금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야기가 귀에 들어갔다. 클레어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클라우제너를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였으니, 그 일에서 돌아서서 눈감고 있지 못할 것이다.
요안나가 앞장서서 그리프 백작을 안내했다. 그 뒤를 가신들이 모두 함께 따랐다.
안주인의 침실 문 앞에서 요안나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괴르델러 백작님과 막시밀리안 경만 같이 들어가시죠.”
요한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프 백작은 몸가짐을 다듬었다.
에른스트의 뜻이 어떻든, 공작 부인과 직접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클라우제너를 온전히 상속하는 것뿐이니 말이다.
‘상당한 미인이기도 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에리히의 여자다. 당연히 보통 여자가 아닐 터이다. 성격도, 능력도, 그리고 여자로서도.
특별히 음흉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슬퍼서 울고 있다면 위로해 주는 것도 좋으리라. 여러 의미에서 말이다.
요안나가 문을 열었다.
클레어는 침대에 푹신한 쿠션을 가득 놓아 등을 받치고 앉아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눈과 코에만 붉은 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절망이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음처럼 정제된 표정은 누구든지 아주 로멜 귀족답다고 말할 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프 백작은 잠깐 당황했다. 그가 생각한 그 어떤 상황에도 이런 태도의 공작 부인은 없었다. 슬픔에 몸부림치고 있거나,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줄 알았다. 혹은 가문 단속을 위해 아예 권력자답게 행동하거나.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목이 쉬어 있었다.
“제가 임신 중이라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고 이렇게 침실까지 오시게 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리프 백작님.”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리프 백작은 눈만 끔벅거렸다.
“임신, 중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6주가 조금 못 되었다고 해요.”
클레어가 말했다. 그리프 백작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의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그리프 백작이 무심코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렇게 갑자기……!”
“백작님이 남편의 가까운 친척이시니, 이 기쁜 소식을 여러 사람에게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의사에게서 절대 안정을 권유받은 터라, 지금은 움직이기 어렵네요.”
클레어는 그가 무어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