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8/263)

189화

그리프 백작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게 사실이긴 하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자신감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 깨닫지 못했으나, 이제 막시밀리안과 침실을 지키는 이들의 기백이 무서웠다.

“이제 그만 물러가세요.”

공작 부인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리프 백작은 어금니를 악물었으나, 괴르델러 백작이 문을 열고, 막시밀리안이 에스코트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의 팔꿈치를 잡고 손짓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프 백작은 침실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막시밀리안이 문을 닫았다. 거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신들이 하나같이 얼음으로 된 창날처럼 싸늘한 태도로 기다리고 있었다.

괴르델러 백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 각하께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신 게 확실하다 하더라도, 유언장은 아기님이 탄생하신 후에 개봉될 겁니다.”

그리프 백작은 길게 신음하고, 괴르델러 백작과 가신들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성큼성큼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거실에는 잠시 침묵이 돌았다.

괴르델러 백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께서 회임 사실을 숨기지 않기로 하신 것 같으니, 저는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 두겠습니다. 뢰제너 후작 영식까지 와서 난장을 피우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빅토리아 대공 전하와 맨프레드 대공 전하께서는 무어라 전한 말씀 없으십니까?”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는 멀리 계시고, 맨프레드 대공 전하께서는…….”

보울러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계엄령 때문에 맨프레드 대공저는 봉쇄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다.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둘 리가 없었다.

“이 기회에 모두 반역죄로 몰아 제거할 작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고 하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가신들은 당황했다.

“아, 여기서 이야기할 게 아니었군. 자리를 비키겠네.”

“아니요. 마님께서 잠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뭐? 우리 모두?”

“네.”

가신들은 당황하고 놀랐다. 이 이상 공작 부인에게 힘든 일을 더 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클레어가 에리히와 동격이라는 사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으며, 에리히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명령을 거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공작 부인의 피로를 가중시키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갔다.

클레어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허공을 향한 눈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 방침에 납득하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으로 알아요.”

“뜻하시는 바가 있어서 결정하신 일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딱히 충성심을 확인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클레어가 말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돈되지 않은 감정이 솟구친 탓이다.

알트마이어에서 일어난 폭동이 진짜 폭동이었을 리가 없다.

알트마이어는 로멜에서도 비교적 발전이 더디고 안정된 지역이었다. 아렌인의 유입도 적을 테고, 조직화된 길드가 있을 확률도 낮았다.

폭발적인 저항이 거기에서 시작될 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호텔을 무너뜨릴 정도의 폭약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광공업이 발달한 지역이 아니고, 대형 토목 공사가 벌어지고 있지도 않다. 외부에서 반입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황후의 이 민첩한 대응을 보라. 그쪽에서 준비해서 일으킨 게 틀림없었다.

후회가 신물처럼 목 안쪽에서 스며 나왔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올바른 방법 따위는 생각하지 말 걸 그랬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권력을 이용하는 게 옳았다.

에리히의 말이 옳다. 전부 탁상공론이었다.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아이를 지키겠다고 만든 힘이었으면서 정작 아이는 손 닿지도 않는 곳에 보내 놓고 남의 일이나 챙기고 있었다.

자신이 뭐라고 인간의 도리가 어쩌고 하면서 선지자인 체했단 말인가. 다른 세상에서 살아 봤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자신이 그 세상을 만든 것도 아니고, 그저 거기서 살았을 뿐인 소시민 주제에.

그냥 세상에 적응하여, 자연스러운 이치대로 사는 게 옳았다.

황후 말이 옳다.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세상이다.

아마 에리히에게 맡겨 놓는 게 좋았으리라. 그가 그의 방식대로 황후와 협상하여 엘리엇의 안전을 보장받고, 클라우제너와 델포드를 지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아기를 낳고, 에리히가 아기 손에 머리를 쥐어뜯기는 것을 보고, 엘리엇이 형 노릇을 한다고 으쓱대는 것에 웃으면서, 여름에는 바다에서 놀고 겨울에는 온천에서 뒹굴면서, 넉넉하고 부유하게 그냥 살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후회는 전부 늦어 버린 일이다.

클레어는 복수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 세상에 어울리는 방식대로 살아 주는 게 옳았다.

그녀는 공허한 눈을 떴다. 가신들은 도열한 채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석탄 공급을 중지하세요.”

“예?”

빌헬름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기존 계약은 모두 파기해요. 위약금은 얼마를 물어도 상관없어요.”

“석탄값이 폭등할 겁니다.”

빌헬름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클레어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라고 하는 거예요. 공장이 전부 멈추고 철로가 쓸모없어질 때까지. 오로지 클라우제너 안에서만 쓰도록 해요.”

클라우제너는 제국 제일의 석탄 산지다. 여기서 나가는 석탄이 없으면, 제국 전체의 공업을 돌릴 동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만다.

“다른 곳에서 에른스트로 가는 판매로도 막으세요. 그것도 할 수 있겠죠?”

“절반 이상은 막을 수 있긴 합니다만……. 상상도 할 수 없는 피해가 생길 겁니다. 북부는 아직 춥습니다.”

그렇게 말했다가 빌헬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석탄 판매를 중지하면 클라우제너 안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지역이 많습니다.”

“밀과 포목을 저렴하게 풀도록 하죠. 남부 아렌에는 내 말이 통하는 지역이 많으니까. 적어도 클라우제너 안에서 밀과 포목을 쓰는 데는 어려운 일 없을 거예요.”

“공작 부인…….”

그녀는 남방 아렌 귀족이었고, 위빙 상단을 통해 수많은 농장주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녀와 클라우제너의 결합은 식량과 연료, 원자재의 결합이었다.

황후는 절대로 이 치킨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지시를 받은 빌헬름이 물러갔다. 요안나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클레어 님, 서둘러 생각하지 마시고…….”

“난 후회 안 해.”

요안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먼저 알아들은 듯 클레어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도로 눈을 감았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이제 열심히 일할 필요는 없겠어.’

셋을 낳아 공평하게 물려주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농담으로 에리히와 한참 실랑이했는데, 진짜 헛소리가 되었다.

또다시 아이와 단둘이 남았다.

이미 한번 겪은 상황 아닌가. 그러니 잘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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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너의 상속권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혈족, 그와 관계된 자들의 머릿속은 바빴다.

에리히는 그 정통성이 비할 바 없이 완벽했다. 5대 동안 실패 없이 이어진 적장자 계승, 친모는 황녀이고 조모를 비롯하여 그 윗대의 모계 중에도 신분에 결함이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

날 때부터 후계자였고, 권위는 온전했다. 젊은 나이에 가문을 상속받고 작위를 계승하게 되었을 때도 저항하는 자는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아렌의 여남작에게 결혼하여 인장 반지를 건네고, 모친이 불분명한 혼외자를 가계도에 입적한다고 할 때조차도 불만을 입에 담는 자가 없었다.

만일에 온전한 아들이 탄생하고 나서 죽었다면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리프 백작이 상속받게 된다면 뢰제너 후작 영식이 소송을 걸 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프 백작 쪽에 소문도 있었으니까요.”

“소문, 이라니요?”

“애당초 사위에게 작위를 계승시킨 것 자체가 딸의 혼전 임신을 덮어 주는 대가였다는 소문이 있었다더군요. 그렇다면, 그 자손인 지금의 그리프 백작은 클라우제너 공작가와는 혈연이라고 할 수 없지요.”

삼대 전의 일이다. 증명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클라우제너를 차지할 가능성이 생기는데.

또 다른 종류의 생각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드님이 태어난다면, 더 따질 게 없겠으나, 따님이 태어난다면.”

“따님을 방계 혈족과 결혼시켜 사위에게 상속할 가능성은 없나? 부인의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유리한데.”

“재산은 또 어떤가. 이제 클라우제너의 재산은 작위에 귀속된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훨씬 많아. 그리고 아무래도 따님의 몫이 가장 클 수밖에 없겠지.”

이제 상속 재산 중에 작위와 그에 귀속되는 토지만이 유의미한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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