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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189/263)

190화

뢰제너 후작가는 그리프 백작보다 훨씬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뢰제너는 에른스트의 방계로서 지배 가문과 통혼할 수 있는 혈통이었으니, 비록 클라우제너의 피가 모계로 이어졌다 할지라도 싸워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기다려. 아직 가주의 시신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섣부른 짓을 했다가는 반감을 살 뿐이니.”

에리히의 고종사촌인 헬무트 뢰제너는 법무팀을 준비시키면서도 겉으로는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클라우제너 같은 거대한 가문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가신의 지지가 절대적이다. 특히, 지금 공작가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공작 부인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헬무트는 이미 에리히가 클레어에게 준 다이아몬드 광산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핵심적인 사업을 나눌 작정도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공작 부인을 몹시 미워하십니다. 노하실지도 모릅니다.”

“황후 폐하를 위해서 상속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야. 게다가 지금까지는 공작 부인이 마음에 들어서 그냥 두셨다던가? 클라우제너를 건드리지 못했을 뿐이지.”

그러니 황후로부터 안전을 꾀하기 위해서라도, 상속자와 공작 부인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의 법무팀이 움직일 기회는 없었다. 그리프 백작이 다녀간 날, 괴르델러 백작은 곧바로 공작 부인의 배 속에 있는 후계자와 유언장 개봉일에 관한 내용을 편지로 적어 방계 혈족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뢰제너 후작은 편지를 읽고 얼굴을 구겼다.

“임신이라고? 이게 사실인가?”

“결혼한 지 몇 달 되었으니 이상할 건 없다고 봅니다. 임신 초기에 친족에게까지 굳이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시점에서! 게다가 이 말에 따르면, 둘이 별거하기 직전에 임신했다는 게 되지 않느냐?”

“진위를 증명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의 주치의인 브란트가 확인했다고 하니까요.”

법률 고문이 냉정하게 말했다. 헬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이든 아니든, 지금으로서는 건드릴 수 없었다.

“기다려 보죠. 지금 당장을 넘기기 위해서 위장을 한 거라면, 유산 핑계를 대든 어쩌든 결국 상속까지 이어 가지는 못할 겁니다.”

“확인은 해야 해. 시간을 벌어 놓고 공작 부인이 가문의 알맹이를 전부 빼돌릴지도 모르지 않느냐.”

“제가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대화할 여지가 있겠지요.”

헬무트의 말에 뢰제너 후작이 탄식했다.

“네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아마 에리히가 유언으로 미리 견제를 해 놨을 겁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헬무트는 그런 대화를 한 다음 날, 바로 클라우제너 공작저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공작저의 대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공작저를 빙 둘러 거의 1미터 간격으로 경비원이 서 있었다. 보울러 백작이 아예 대문 앞에 천막을 쳐 놓고, 거기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업무를 보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헬무트 님,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도 저택 안에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공작 부인의 뜻인가?”

“예. 절대 안정이라는 의사 지시가 있었습니다. 부인께서도 충격을 많이 받으셨고요. 중요한 일이 있으시면, 괴르델러 백작과 빌헬름 경이 맡아 처리하고 있으니 그쪽으로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

보울러 백작은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나, 끝에 이 한마디를 덧붙이고 말았다.

“상속에 관한 이야기는, 적어도 각하의 생사가 확실해진 후에나 이야기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당연하지. 이해하네.”

헬무트는 그렇게만 말하고 물러났다.

아렌 귀족의 다수가 자칫하면 반역죄에 엮일 수 있는 상황임에도 계엄령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것은 황후를 지지하는 귀족이나 그렇지 않은 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가문의 상속 다툼이 벌어지게 생겼다. 수많은 귀족들이 끄트머리나마 클라우제너와 혈연이 통하거나, 혹은 통해 있는 가문과 인연이 있었다.

작위는 혈연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해도, 가문에 귀속되지 않는 막대한 재산 일부가 제게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가 팽배했다.

수도에 있는 클라우제너의 사업장이 모두 휴업했다. 끌어올 수 있는 자금과 경호팀 전부가 공작저에 집중되었다.

클라우제너는 새끼를 품은 짐승처럼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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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이 황후에게 불려 간 것은 클레어가 석탄 공급을 줄이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열흘 후의 일이었다. 괴르델러 백작이 동행했다.

이미 수도에 있는 상단에는 공급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가 전해졌고, 철도 회사에도 단계적 공급 축소가 통보된 시점이다.

황후가 차가운 눈으로 빌헬름과 괴르델러 백작의 앞에 철도 회사와 각 상단의 청원 서류를 내던졌다.

“이게 무슨 사정인지 알고 싶군.”

“황공합니다, 황후 폐하. 이게 황실에 설명이 필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빌헬름 경, 지금 나를 능멸하려는가?”

황후가 싸늘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시해되시고, 반역자를 찾고 있는 지금, 아직 철없는 황자를 대신하여 내가 임시로 정무를 보는 것이 그토록 불만인가?”

“황공합니다. 의회 일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빌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가주께서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시고, 전권을 맡고 계신 부인도 회임으로 인해 도저히 가내의 업무를 맡아 보실 수 없는 상황이라, 모든 사업을 축소하거나 정지하기로 결정했을 따름입니다. 나랏일에 관계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석탄 공급을 재개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괴르델러 백작이 침착한 목소리로 첨언했다.

“상속 문제에 잡음이 날 수 있기 때문에, 유언장을 개봉할 때까지는 사업을 중지하는 게 좋겠다고 제가 법률 고문으로서 권했습니다. 가산이 줄어도, 늘어도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폭도의 손에 폭약이 넘어가기라도 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폭약 생산도 중지하고, 광산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폭약도 모두 봉인해서 보관만 해 둘 작정입니다.”

황후는 노한 눈으로 둘을 쳐다보았으나, 이보다 완벽한 핑계는 없었다.

유언장과 상속 문제는 귀족 가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가주가 사망한 후 유언장이 개봉되어 상속분이 확정될 때까지 모든 사업을 중지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다만, 아무리 길어도 통상적으로 열흘에서 보름이면 끝났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유언장을 개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복자가 있다. 아기가 태어나려면 8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 사업이 8개월간 중지된다는 의미다.

이것도 보통의 귀족 가문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이다. 8개월 사이에 상속분이 대규모로 변할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팽창 중인 사업을 갖고 있는 가문도 거의 없지만, 일을 중단한다고 해도 결국 제 가문과 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자들이 영향받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사업이 산업 기반을 떠받치고 있는 경우는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클라우제너뿐이었다.

황후는 침착성을 되찾기 위해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런 식으로 반격한단 말이지?’

물렁하고 어리석게 굴기에 이런 짓은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결국 옳은 말을 해도, 그도 똑같은 인간인 거지.’

황후는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만족감과 별개로 이 상황이 불러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아직은 괜찮지만, 이 상태로 겨울이 돌아오면 폭동이 전국으로 퍼질 것이다.

그럼 지금처럼 아렌 일부 지역에만 반역죄를 씌워 처리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리라.

“알았다. 물러가라.”

빌헬름과 괴르델러 백작은 두려워하지도 않고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혼자 남자 황후는 집무실을 몇 바퀴 뱅글뱅글 돌았다.

결국 클라우제너를 깨뜨려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떠올릴 수 없었다.

‘에리히만 제거하면 될 줄 알았는데.’

임신이라니.

대단한 순발력이다. 임신한 것이 진짜든 아니든, 남편과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사흘 만에 그걸 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군으로? 아니면, 식량? 아니야. 남작이라면 이미 그것도 고려했겠지. 그녀는 남부 아렌 출신이니.’

철도를 끊을 수는 없다. 역시 답은 군이다.

문제는 로멜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렌으로 내려가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은 듣겠으나, 클라우제너를 장악하라는 명령은 듣지 않을 것이다. 지휘관의 대다수는 귀족 가문 출신이다.

‘즉위식을 서둘러야겠어.’

시원하게 성공하는 일이 한 가지도 없다.

본래대로라면 디트마어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하원 의원들에게 공포감을 심은 다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자들로 재소집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지자였던 로멜 시민 다수가 계엄령에 반발하여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대는 시체를 실어 나르면서도 매일 그 숫자를 부풀리고 있다. 디트마어 람스베르크의 이름을 부르짖는 시민들이 늘어나자, 눈치를 보던 의원들 중에 저쪽에 붙는 자가 하나둘 생겼다.

‘어리석은 작자들. 자유 같은 소리에 눈이 멀어 이익을 포기하다니.’

지금도 의사당 앞에서는 소란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고요한 황궁 안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황후는 혐오감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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