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46. E. R. K
클레어는 새벽에 문득 눈을 떴다.
침대에 새로 달아 놓은 캐노피가 반쯤 내려져 있었고, 그 너머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너무 캄캄하면 자꾸만 악몽을 꾸고, 그렇다고 환하면 잠들지 못했기 때문에 집사가 신경 쓰고 있었다.
침대는 아주 넓었고, 지나치게 푹신하고, 허리가 아팠다.
‘새 침대를 만들려고 했는데.’
클레어는 멍하게 그것을 떠올렸다. 주문은 해 뒀는데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아, 지금 이 침대는 로프로 묶은 수백 년 전 침대 그대로였다. 뒹굴다가 허리가 아프다고 했던 그 침대.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 누운 자리가 좀 더 편안했을까?
꽃향기에 후각과 함께 시선이 움직였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오면서 창틀과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꽃다발에서 향기를 이끌고 방 안을 휘돌았다.
방에 꽃이 가득했다. 공작저 외부에 있는 가신들이 보낸 꽃도 있고, 위빙 상단 사람들이나 다이아몬드 회사에서 보내기도 했다.
자택에 연금된 무어 공작도 꽃과 카드를 보내 주었고, 디트마어도 며칠에 한 번씩 카드 꽂힌 작은 꽃다발을 뒷문에 두고 간다고 했다.
고맙긴 했다. 임신 축하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게 축복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쯤 기뻐하고 감사해하고 에리히와 입씨름을 하면서, 먹고 싶은 것을 직접 갖다 바치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것이다.
클레어는 말똥말똥 눈을 뜬 채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가득했으나, 스스로는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뒷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상념이며 추억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타고 구르며 부피를 늘리다가, 마침내 머릿속에 꽉 차는 순간.
또르르.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괜찮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놀랄 만큼 진짜로 괜찮았다. 계속 울며 넋이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좀 피로할 뿐이지 판단력도 멀쩡했다.
아기 문제가 아니었다면 일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불현듯 감정이 치솟았다.
싸우지 말걸.
우습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걸 몰랐던 게 아닌데. 그냥 웃어줄걸. 그냥 인정할걸. 전부 그가 맞는 말을 한 건데. 자신의 말 따위는 탁상공론에 불과하고, 지나친 이상주의였는데.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결국 당신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어리석은 고집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이의 조그만 입에 초콜릿을 물리고, 더 놀게 해 줄걸. 일 같은 건 하지 말걸. 어차피 그깟 상단 일 따위 안 해도 밥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었는데. 그냥 실컷 안아 주고 실컷 어리광 부리게 해 주고, 질리도록 놀아 줄걸.
바다에 가고, 산에 가고, 온종일 함께 놀면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이 욕심이 너무 많아서. 성공하고 싶어서. 돈 벌고 싶어서.
그래서 가족 복이 없는 모양이다. 마치 대가를 치르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전생에도 그랬다. 부모님은 그녀가 제 앞가림을 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번 생에서도, 마치 그녀가 더 어린 나이부터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한 듯이 또 일찍 돌아가셨고, 여동생도 일찍 떠나 버렸다.
아이와 자신만 남았었다.
그리고 또다시 아이와 자신만 남는다.
이런 생각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어이없어, 진짜.’
세상천지에 혼자 잘난 사람처럼 굴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가 버릴 거면서, 책임진다고 말이나 거창하게 하고. 결혼은 뭐 하러 하자고 했는지.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가 ‘자업자득’ 한 줄이라니.
“흑, 흡.”
그걸 떠올린 순간 목구멍이 터지듯이 열렸다. 클레어는 시트를 움켜쥐고 입을 앙다물었다. 큰 소리로 통곡하지 못하고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상 걱정을 끼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염려해 주는 것이 고맙지만 불편했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녀가 무너지면 클라우제너도, 위빙 상단도, 그녀의 계획에 동참한 남부 아렌 귀족들도 무너진다.
에리히는 그녀에게 무거운 의무를 지워 버렸다. 대충 살 거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일은 한 사람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도 분명히 말했는데.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족히 몇십 번은 했을 텐데.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의 몫까지 해내야만 했다.
그때 캐노피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기침하셨습니까?”
“흡.”
클레어는 눈물을 삼켰다. 그레이였다.
그녀는 당황하여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눌렀다가, 그것만으로는 눈물을 다 닦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트를 끌어당겨 그것으로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몇 번이나 목을 울렸다. 하지만 눈물에 잠긴 목소리까지 전부 수습하기는 어려웠다.
그레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
클레어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 주무시는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드릴까요?”
“응, 고마워.”
그레이가 물잔을 들고 캐노피를 걷었다. 클레어는 고맙게 잔을 받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울었던 탓에 목이 탔다.
그녀는 빈 컵을 그레이에게 돌려주었다.
“깨우지.”
“요즘에 잠을 불규칙하게 주무신다고 들어서, 깨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작님의 건강과 안정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레이가 말하는 것이 오로지 클레어 자신의 건강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복잡한 정세와 자신이 죽어서는 안 될 이유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잠시 말없이 테이블 쪽으로 돌아서서 사락사락, 지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앞에서는 울지 않으시는군요. 옛날에도, 지금도.”
“나는 슬픔을 나눈다고 해서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때도 그러셨죠. 선대 남작님과 부인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아예 영지로 오지 말라고 하셨고, 엘리사 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클레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속에서 팽창하는 것이 슬픔인지 답답함인지도 불분명했다.
“말해 봐야 뭐 하겠어. 결국 시간이 지나가는 수밖에 없는걸.”
클레어는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물론 이렇게 말을 하다 보면 눈물이 솟구쳐 올라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비탄의 가장 중요한 부분도, 가장 오랫동안 마음 바닥에 묻혀 있을 부분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감정은 전부 스스로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슬픔은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모든 죽음은 다 개별적이다. 추억도 그랬다. 그녀의 안에 남아 있는 기억은 오로지 혼자의 것이다. 남과 나눌 방법이 없었다.
나누고 매달릴 상대가 이 세상에 없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아니다. 이건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클레어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삶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클레어가 말없이 천장만 노려보고 있자 그레이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각하께서 계셨다면 다르셨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클레어는 마음을 헤집힌 듯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을 또다시 하게 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찾아갔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고, 또 엘리사가 죽었을 때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레이가 또 한 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발신인 불명의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그레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편지 봉투 하나를 클레어에게 내밀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흰색 봉투였다. 편지가 오는 동안 고난이라도 겪었는지 이리저리 더럽혀져 있었다.
클레어는 의아하게 그 편지 봉투를 받았다. 최근에는 편지를 직접 읽은 일도 없었다. 테러를 염려한 집사와 비서가 항상 먼저 뜯은 뒤 가져와 읽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봉투를 뒤집는 순간 클레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낯익은 서명이 적혀 있었다.
『E. R. K.』
봉투의 소인은 사흘 전 날짜였다.
그레이가 말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서 가져왔습니다. 아마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셨던 거겠죠.”
클레어는 황급히 봉투를 찢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타이프라이터로 친, 한 줄짜리 편지였다.
『서재에서. 일요일까지.』
“이 인간이 미쳤나, 진짜!!”
클레어는 편지를 움켜쥐고 반 울음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분노와 안도감으로 그 자리에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