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새벽 내내 소란했던 호루라기 소리가 마침내 멎었다.
근위대원 제프는 살짝 커튼을 들치고 밖을 살폈다. 이곳은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낡은 건물이다. 창고와 장서관의 중간쯤에 있는, 이제는 쓰지 않는 책 창고였다.
흩어져 달아난 시위자 중 몇 명이 계엄군에게 쫓겨 이 주택가까지 들어온 것 같았는데 마침내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무사히 달아난 쪽이면 좋겠다.
제프는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쪽으로 왔어도 숨겨주지는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아니, 진짜 시위자이긴 할까? 모호한 일이다. 반역이라는 단어는 전가의 보도였고, 계엄군은 시위대뿐 아니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잡아들이고 있다.
알트마이어에서 일어난 폭동 참가자와 동향인이라거나 같은 구역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가기도 했다.
다수가 아렌 출신이었고, 일부는 평소에 황후를 비방하던 자들이다. 기자들은 대부분 끌려갔고, 신문은 어용 기사 일부만이 발행되었다.
그 메시지가 전하는 바는 명백했다.
몇몇 거리는 아예 시위대가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았다고 들었으나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기차도 곧 끊긴다. 이미 민간인 탑승은 지극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다.
뇌물로 매수하여 표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이 되면 수도에 추가 병력이 당도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도 전체가 포위되어 마차로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못 해 온 일이 없는 공작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 솜이 비어져 나온 소파에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제프는 염려스럽게 말했다.
“각하, 3시간 후에 출발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네.”
공작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서두를 것 없어. 지금 당장 기차역으로 간다고 해서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곳의 안가가 더 안전합니다.”
계엄군이 움직임을 멈춘 직후인 지금, 새벽을 도와 이동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누렇게 뜬 낡은 셔츠와 닳아빠진 외투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런 것으로 가려지는 외모가 아니었다.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려도 마찬가지였다. 훤칠한 키와 미끈하게 다듬어진 육체도 문제였으나, 자연스럽게 기품이 밴 몸짓과 차림새 사이의 위화감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
가는 길에 무조건 흔적을 남길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보면 고심이 있는 것 같은데, 제프로서는 감히 물을 입장이 되지 못했다.
공작 부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초조했다. 아직까지 오지 못했다면, 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편지가 전해지지 않았든, 다른 이유로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기다.
그때 신경이 곤두선 그의 귀에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제프는 권총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신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이 일어서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긴장한 제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에리히……!”
문밖에 서 있는 것은 머리까지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였다.
“클레어.”
2주 만에 처음으로 공작이 차가운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팔을 벌려 아내를 맞이하려는 순간.
“죽일 거야……!”
빠각.
원한에 찬 목소리와 함께 턱주가리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고요한 책 창고에 울려 퍼졌다.
“그사이에 복싱을 배웠나? 이렇게 주먹이 강한 줄 몰랐는데.”
에리히는 농담을 던지면서 시뻘게진 턱을 쓰다듬었다.
“농담하지 말아요. 내가, 얼마나……, 얼마나…….”
울분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 클레어의 어깨가 들먹거렸다. 태연자약한 얼굴로 나타난 걸 보니 분하고 서러웠다.
머릿속이 새카맸다. 클레어는 목부터 가슴까지 불타는 듯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슬픔도, 절망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게 감정인지 무엇인지조차 알아챌 새 없이, 지금까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코와 목구멍으로 새어 나왔다.
클레어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내가 걱정하는 줄 알고 있었을 거면서.
하지만 그 말은 울음에 틀어 막혀 제대로 목구멍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지금까지 삼켜 냈던 흐느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흑, 흐읍, 흐윽!”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주저앉으려 했다. 벌어진 입에서 쏟아지는 것이 울음인지 하소연인지도 불분명했다. 에리히가 깜짝 놀라 허물어지는 몸을 다급히 받아 안았다.
“클레어!”
“죽여 버릴 거야, 흑,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어떻게 살아 있으면서 연락 한 줄 안 할 수가 있어!”
클레어는 온몸으로 발버둥 쳤다. 손으로 어깨를 때리고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에리히는 강철 기둥처럼 미동도 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흑, 흐읍.”
클레어의 온 얼굴에 뜨거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온몸을 부둥켜안긴 채 그녀는 에리히의 품 안에서 무력하게 허우적거렸다.
눈가에 흐른 눈물을 빨아 마신 혀가 울음으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에리히가 깊게 입술을 겹쳤다.
“으읍, 흐응…….”
울음소리가 키스 속으로 스며 사라졌다.
에리히의 손이 클레어의 뒷덜미를 주무르듯 애무하고 긴장을 풀라며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훌쩍 안아 올렸다.
“그만 울어.”
“누구 때문인데, 흑.”
“미안해.”
에리히가 낮게 속삭였다. 검문을 피해서 신중하게 움직이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말 같은 건 지금은 의미 없었다. 눈물에 젖은 아내의 얼굴만큼 그의 가슴을 뒤흔드는 것은 없었다.
클레어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고 에리히는 다시 한번 온 얼굴에 입술을 떨어뜨렸다. 말을 막으려고 그러는 건지, 키스가 목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그의 입술이 클레어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에리히의 머리를 쥐어뜯다가 다시 머리칼 사이에 손을 묻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 키스에 응했다.
부은 입술을 입술로 깨문 채 두툼한 외투를 벗기자 안에서 실크로 된 실내복을 입은 몸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에리히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문질러 주었다.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니까 몸이 떨리지.”
“개소리 말아요. 옷 갈아입을 시간이 어딨어? 일요일까지라며. 이미 월요일 새벽인데.”
클레어가 울먹이며 대꾸했다. 이럴 때도 지지 않는다며 에리히가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꼬집었다.
“엘리엇은요?”
“털끝 하나 안 다쳤어. 지금쯤 윌리엄의 배로 루덴도르프에 닿았을 거야. 빅토리아 이모님이 계시고, 황제 폐하도 그쪽으로 가셨으니 걱정 없어.”
에리히는 낮게 속삭였다. 손가락이 쉬지 않고 클레어의 귓바퀴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달랬다.
“제임스 경과 찰스 경도 같이 보냈어.”
“무사하다고 연락할 수 있었잖아요!”
“어쩔 수 없었어. 신원을 위조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위빙 상단의 지점으로 보낸다고 해서 네게 전달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클라우제너 쪽에 나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해서 보내면, 내 생존이 황후한테까지 알려졌을 테지.”
“그래도……, 그래도!”
클레어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리고 그의 등을 쓸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다시 울먹거렸다.
“아니야. 무사하니 됐어. 무사하니까 됐어.”
“날 안 믿었군. 고작해야 위장된 폭동 같은 걸로 죽었을까 봐.”
“호텔이 붕괴됐다면서요. 불이 났다고 들었어요. 행정관이 아직도 구조 작업을 시작도 못 하게 막고 있다고도요.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도…….”
클레어가 두서없이 말하다 말고 흐려진 눈으로 에리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훌쩍이며 말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됐어요?”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얼굴밖에 볼 것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험해졌어. 진짜……. 누구 맘대로.”
멈춘 것 같았던 눈물이 도로 방울져서 뚝뚝 떨어졌다. 클레어가 엄지로 에리히의 눈가와 볼을 어루만졌다. 에리히가 그 손가락을 제 입술로 깨물었다.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에리히가 그녀를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히고 안주머니를 뒤졌으나 깨끗한 손수건이 없었다. 그는 별수 없이 손등으로 클레어의 뺨을 훔쳤다.
“그러는 너야말로, 얼굴이 반쪽인데. 나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면, 좋아할 거죠? 어이없어, 진짜. 아니거든요.”
클레어가 비로소 헛웃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머금었다. 그제야 에리히도 따라 웃듯 비로소 미소를 머금었다가, 클레어의 말에 도로 미간을 구겼다.
“아니, 어찌 보면 맞긴 하네. 당신, 오늘부터 머리 길러요.”
“무슨 소리야?”
“아이 낳을 때 당신 머리채 잡을 거니까.”
클레어가 웃음과 울음을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 에리히가 멈칫했다. 그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셈하는 것을 깨닫고 클레어는 말해 주었다.
“안 믿었어요? 이제 2개월이래요.”
“진짜였군?”
에리히가 되묻고는, 다음 순간 미친 사람처럼 클레어의 두 뺨을 붙잡고 키스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