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2/263)

193화

“읍, 으읍! 그만……, 응……!”

숨이 틀어막힌 클레어가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몸부림치든가 말든가 에리히는 원껏 그녀에게 키스하다가 기어이 정강이를 한 대 더 맞고서야 놓아주었다.

“의사가 절대 안정하라고 했다고요!”

흥분한 나머지 그녀를 거의 덮쳐 누르려던 에리히가 움찔해서 동작을 멈췄다.

“소식은 들었을 거 아니에요? 안 믿었어요?”

“나는, 전략적 선택일 수 있을 거라고…….”

에리히가 그로서는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클레어가 다시 주먹을 휙 들었다.

에리히는 반사적으로 뒤로 젖혀지려는 고개를 애써 제자리에 두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중간에 멈췄기 때문에, 한 대 때렸다기보다는 그가 클레어의 주먹 위에 톡 턱을 가져다 대는 셈이 되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클레어는 허허 웃고 말았다. 화가 풀린 건 아닌데, 웃음은 웃음대로 나왔다.

아니다. 사실 기뻤다.

살아 있어서, 싸우고 화내고 언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게. 두 번 다시 이 모습을 못 볼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에리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전략적 선택이라니. 안 믿었다는 소리잖아요. 말 돌리는 솜씨만 늘어 가지고.”

“역시, 주먹 쓰는 걸 배웠나? 교사는 막시밀리안인가?”

“이미지 트레이닝만 몇 주를 했는데요. 역시 턱을 날려 버렸어야 했어. 당신 때문에 내가 속상한 걸 생각하면 진짜.”

에리히는 그녀를 마주 두 팔로 껴안았다가 다시 안아 들어 조심스럽게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클레어가 그를 끌어당겨 곁에 앉혔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클라우제너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클라우제너를 뭐 하러 지켜요? 당신도 없는 마당에.”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클레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소리에 에리히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너는 네 품에 들어온 건 절대 못 놓지.”

자신이 없어서 그 부귀를 손에서 놓아 버렸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쁜 일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클레어는 얄밉게 그의 뺨을 다시 꼬집어 당겼다. 에리히는 전혀 굴하지 않고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짐작 못 했었으니까 봐주는 거예요.”

“고마워.”

봐주는 걸 고맙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에리히가 말하면서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소리 내서 뽀뽀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뺨에 입술을 눌렀다.

정열적인 키스보다 이런 입맞춤이 더 드물었기에, 클레어는 괜히 어색해졌다.

“당신이 지금 할 말은 그게 아니라 미안하다는 쪽이죠.”

“미안해.”

“……말 잘 듣네? 어이없어, 진짜. 뭐가 미안한지는 알아요?”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죽은 척한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절대 안정이라는 사람한테 여기까지 나오라고 하고. 그나마도 제대로나 알려 줬으면 몰라, 그 편지 대체 뭐냐고요.”

서재에서, 일요일까지라니. 일요일까지는 그렇다 치고 서재라는 단어만으로 이 장소를 어떻게 떠올린단 말인가.

이 건물은 밀러 교수의 책 창고였다. 집 바닥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부인에게 책과 함께 쫓겨나 따로 서재를 만들기 위해 구한 것이다. 클레어는 대학원생마냥 부려지며 책 정리를 도와주러 오곤 했었다.

영원히 정리가 끝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자신도 도와주러 온다는 핑계로 승마 수업을 빼먹고 여기서 낮잠을 잤다. 어찌나 조용하고 나른한지.

이 소파는 그때도 구멍 나 있었다. 10년 전과 달라진 거라곤 책의 양이 늘어났다는 것뿐이다. 밀러 교수도 이미 은퇴하여 고향으로 갔으므로 이 건물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을 것이다.

에리히가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혹시 중간에 편지를 낚아채는 자가 있더라도 너 외의 사람은 알아볼 수 없는 내용이어야만 했으니까.”

“내가 잊어버렸거나 못 알아들었으면요?”

“잘 찾아왔잖아.”

클레어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사실은 그만이 아니라 자신도, 같은 공간에 있었던 시간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함께했다는 것과는 달랐어도 말이다.

이제 와서이긴 했다. 그녀는 에리히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건 클라우제너에 있는 첩자 때문인가요?”

물론 가문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첩자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디트마어가 납치되었을 때 확인했듯이 호위팀에도 있었으니까. 전부 통제하기에는 관계자 수가 너무 많다.

하지만 에리히가 이 정도까지 보안을 유지하기로 했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내용을 주의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자리에 첩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내 보좌진에까지 들어와 있었어. 황제 폐하의 행적도 그쪽을 통해서 밝혀진 것 같고.”

에리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는 처음에는 황제의 행선지를 몰랐던 것 같다. 황제가 황궁을 빠져나간 직후부터 계속해서 찾고 있었으니까.

알트마이어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을 가능성은 아주 적었다. 백작 부부를 제외한 사람은 모두 저택 동관에 머무는 사람이 아렌 공왕뿐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후가 암살 시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자신이 알트마이어를 방문한 다음 날이다. 에리히도 황후궁과 에른스트에 정보 라인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쪽을 통해서 확인도 이미 마쳤다.

그렇다는 건 그를 뒤따르던 보좌진이나 호위팀의 누군가가 정보를 유출했다는 뜻이 된다. 그날 알트마이어에 황제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를 따라 후원까지 들어온 소수뿐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도 아렌 공왕 전하와 함께 있을 거라는 추론 정도는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추론만으로 저질러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큰일이잖나. 내 쪽 스파이를 통해서 확신을 얻고 나서 시작한 거야.”

알트마이어 저택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호텔 최상층에 불을 지르고 2차 폭발을 유도한 다음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위대장 로건에게 황제의 종적을 숨기라고 지시하고, 엘리엇과 보호해야 할 다른 사람들도 모두 클라우제너의 눈에 띄지 않는 루트로 피신시켰다.

“그놈은 잡았어요?”

“붕괴된 건물에 묻혀 있지.”

에리히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마음속은 어지러웠지만, 그녀는 이제 남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에리히와 엘리엇이 거기 묻혔을 뻔했다는 걸 상상하면, 그것의 열 배 넘는 인간을 파묻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시 생각하면서 그녀는 에리히의 손을 끌어다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잘했어요.”

“칭찬받을 줄 몰랐는데.”

“당신이 무사한 게 훨씬 중요하죠. 그러면 황제 폐하의 시신이라는 것도 가짜겠군요.”

“그건 이쪽에서 조작할 필요도 없었어. 황후가 만든 것 같더군.”

“어쩌면 아랫사람이 만들었을 수도 있겠어요. 이렇게 중요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면, 처벌이 두려울 테니까.”

황제의 최근 모습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고, 화재에 휩쓸려 죽었다면 얼굴을 뭉개기도 쉽다. 조작은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폭동을 일으킨다면 남부 아렌에서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안이한 판단이었던 셈이지.”

“황제가 황궁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돌발적인 행동에 나선 걸까요? 지금까지 황후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잖아요.”

클레어는 결국 그녀가 의회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리라고 생각했었다.

정적만 제거해 둔다면, 단기적으로 황후에게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로멜 우월주의와 예산, 경제적 이득을 통해서 선거권자의 지지를 획득해 왔다.

황제와 직접 부딪치는 것보다 황제를 어딘가에 밀어 치워 두고 물밑에서 지배하는 쪽이 낫다. 황후의 권위는 비공식적인 것이며 황제를 기반으로 하기에 그에게 맞설 수 없으나, 의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에서 갈등을 지우고 지금까지처럼 의제를 선점하며 묵살하는 쪽이 훨씬 오래 권력을 잡을 수 있다. 디트마어와 자신을 처리할 작정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 그랬다. 그러면 하원에서 황후에게 저항할 사람은 몇 명 남지 않았을 테니까.

에리히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는 지금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워. 엘리엇을 만나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황후의 선택도 틀리진 않았지. 황권은 멀쩡히 살아 있어.”

“그렇군요. 하긴, 명분을 생각해 봐도 그렇네요. 반역죄보다 강력한 명분은 없으니까.”

“군 통수권의 문제도 있지. 수도의 군대는 포섭한 것 같지만, 다른 곳에 주둔한 군대는 황명 없이 움직이지 않아. 그러니 리누스가 즉위해야 비로소 다른 곳에 주둔한 군대도 장악할 수 있지.”

그러고 나면,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황후의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잘 실행되기만 했다면 말이다.

“내가 거기 있는데, 감히.”

에리히가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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