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3/263)

194화

클레어는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며 물었다.

“뭘 할 생각이에요?”

살아 있는 황권을 휘두를 작정이라면 황제의 사망을 가장할 필요가 있을까?

“황후를 폐위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라서 증거가 필요해. 제러드가 죽었을 때도 정황이 분명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이번 일에도 아마 증거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황후가 한 일은 황제가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엄령을 내린 것뿐이다.

그러니 명분을 잡기 위해서는 황후를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몰아넣는 수밖에 없다. 황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황후는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까지.

클레어는 황권이 살아 있으니 황제가 황후를 치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말에 납득하면서도 조금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황제 폐하가 그걸 해낼 수 있는 상황이긴 한가요? 아편 중독인 건 둘째 치고, 칩거한 지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지금 당장 나서실 수 있는 상태는 아니야. 노력하고 계시지만, 시간이 좀 필요해.”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인데요?”

“이제부터 전권 대리인 자격으로 북방군에 갈 거야.”

에리히가 말했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하는 짓을 생각해 보면, 북방 주둔군을 아렌으로 보내 인종 청소를 하거나 학살을 일으켜도 놀랍지 않다. 그러니 일단 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클라우제너를 가지고 황후와 맞설 게 아니라면, 아예 정보를 숨기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저쪽에서 대응책을 내지 못하고 불완전한 정보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남방군은 어떻게 되나요? 알트마이어와 인접한 지역부터 남쪽으로 소요 사태가 계속 번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황후가 그걸 이유로 명령을 내렸으면 거부하기 힘들 텐데요.”

“그쪽으로는 아렌 공왕께서 가셨어. 황명이 전달될 때까지, 모든 일을 소강상태로 접어 두실 거야.”

“그러면 괜찮겠네요.”

아렌 왕가가 황실에 통치권을 양도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렌의 연로한 사람들이 왕가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는 클레어가 더 잘 알았다.

아니, 노인만이 아니다. 그녀의 부모님만 해도, 공왕을 마주하면 무릎을 꿇고 감격할 사람들이었다.

‘젊어도 사실 많이들 그렇지. 아렌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은 더 그렇고.’

땅에 뿌리내리는 법을 잊어버린 클레어 자신이 예외적인 거지,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러니 공왕이 갔다면 염려 없다. 남방군은 대부분 아렌인이고, 행정관도 마찬가지였다. 황명이 내려간 것도, 내각에서 전쟁 결의를 한 것도 아니니, 공왕의 뜻을 존중하여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건 대개 영지에 머물러 있는 아렌 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 대부분은 아직도 자기 영지의 행정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었고, 지역 유지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미 무어 공작이 한 차례 아렌 귀족들을 묶어 놓았으니, 남방군의 발목을 잡는 일은 더욱 수월하리라. 문제는 사우스랜드뿐이었다.

“공왕께서 사우스랜드와 수도를 갈라놓으실 거야.”

“알았어요.”

클레어는 생각에 잠긴 채 대답했다. 에리히가 그녀를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러니 넌 이제 그만해도 돼.”

“…….”

클레어는 멈칫했다. 에리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한 듯 에리히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네가 짊어질 일이 아니야.”

“내가…….”

클레어는 갈라진 목을 틔워 말을 하려다가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가 이미 자신이 내린 명령을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클라우제너가 그의 행적을 몰랐던 것이, 그가 클라우제너의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었다.

클레어는 눈을 내리깐 채 겨우 말했다.

“당신 말처럼, 이제야 겨우 현실적으로 하고 있는데, 왜요. 내가 가진 힘 좀 휘두르는 게 어때서.”

진짜로 묻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투는 고집부리듯 딱딱했다. 에리히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고, 머리와 등을 어루만졌다.

“미안해.”

그것만으로도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클레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 후회 안 해요.”

“네가 복수할 일은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았어.”

“나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하려던 일은 탁상공론이고, 이상주의고.”

클레어는 에리히의 옷깃을 잡고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은 그럴 생각 없는데, 또 눈물이 솟아올라 입술을 적셨다.

에리히의 입술이 가볍게 그 눈물을 빨아 마시듯 입술 위에 닿았다. 클레어는 그가 제 고개를 젖히려는 걸 거절하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눈물 때문에 목이 막혀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 게는…….”

“미안해.”

문장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에리히가 다시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 사과의 이유도 클레어에게는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에리히가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잡아 고정시켜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네가 나누어 주어야 할 만큼 괴로운 짐도 아니고, 내가 있는데 네가 그런 일을 할 필요도 없어.”

“에리히…….”

“나는 네가 이상론을 말하는 게 좋았던 거야.”

“그걸로.”

계속 사람 트집 잡아 놓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문장은 끝까지 성립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에리히가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엷은 웃음을 입술 위로 쏟아 냈다.

“내가 반한 여자는 이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닌데.”

“에리히.”

“현실에 굴복해서 무조건 공작님이 옳다고 말하는 시시한 사람이었으면, 나는 네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을 거야.”

그가 클레어의 뒷머리를 눌러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아직도 떨림이 멎지 않은 몸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야유하듯 빈정대는 태도로 말했다.

“설마 내가 군을 몰고 와서 계엄군과 시위대를 전부 쓸어버릴 때까지 가만히 있을 건 아니지?”

“누구 때문이야, 진짜.”

클레어가 간신히 목소리를 내고 나자, 에리히가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더듬어 다시 입 맞추고, 품에 끌어안은 채 가만히 가늘어진 어깨와 등만 어루만졌다.

그 뒤로는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아침 햇살이 살짝 열린 커튼 너머로 들어와 창고 안에 너울거리며 빛으로 선을 그렸다. 모든 곳에 먼지가 쌓여 세상이 흐렸다.

시간이 멈출 듯한 침묵이 고였다. 클레어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린아이처럼 쌔액쌔액 숨만 깊게 들이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함께 있을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아침이 다가와 있었다.

콩콩.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피해 주었던 제프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각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아.”

클레어의 얼굴이 흐려졌다.

에리히의 표정에서 물이 빠지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부분이 사라졌다. 굳어진 눈가와 입매가 얼음 조각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클레어를 안은 채 일어섰다가, 그녀를 소파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제 가야겠군.”

클레어는 그의 손을 잡았지만, 가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자, 에리히가 괴로운 듯한 신음을 냈다.

“곧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몸조리 잘하고 있어.”

“알았어요.”

“무엇보다도, 당신과 아기의 안전이 제일 중요해. 막시밀리안과 빌헬름이 잘해 줄 거라고 믿지만, 무리하지 말고.”

“나는 뭐, 집에 있을 건데. 첩자가 있다고 해도, 저택이 위험한 건 아니잖아요. 당신이나 몸조심해요. 다치지 말고.”

클레어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애써서 말했다.

“소식 없으면 무사한 줄로 알고 있을게요. 죽으면 연락해요.”

“꼭 그러도록 하지.”

에리히가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리고 클레어의 빨갛게 변한 눈과 코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그 입술에 짧게 입 맞추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올게.”

“응.”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가 돌아섰다.

낡은 경첩이 끼이익 소리를 냄과 동시에 햇살이 스며들었다가 다시 스러졌다.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잠깐 들려왔다. 에리히가 막시밀리안과 인사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 엘리엇도 안전하다니 걱정은 없다. 그녀는 에리히가 별일 없이 잘 해낼 것이라는 걸 믿었고, 또 자신도 별문제 없이 지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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