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47. 역할 교체
클레어는 중간에 슈나이더 백작가에 들러 리나의 마차로 갈아탔다.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행적이 노출되면 에리히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너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높이 뜰 시간이었다. 날은 오히려 좀 흐려졌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서, 클레어는 조금 염려스럽게 밖을 바라보았다.
에리히가 기차를 탈 때까지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눈앞에 있다면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고 웃어 줄 테지만, 정작 지금 고생스럽다고 생각하니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마차가 저택 후문 앞에서 멈춰 섰다. 클레어는 의아하여 창에 달린 커튼을 살짝 걷었다.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별일이 아니라뇨. 집 앞에서 멈춰 섰는데.”
클레어는 막시밀리안의 어깨 너머를 내다보려고 애썼다. 앞을 가로막았던 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리누스였다.
클레어는 조금 당황했다. 리누스가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일까?
막시밀리안이 문을 닫으라는 듯이 살짝 창을 두드렸다. 클레어는 다시 커튼을 내렸다.
“어쩐 일이십니까, 황자 전하?”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슈나이더 백작 영애입니다.”
나갈 때 계획한 대로 막시밀리안이 그렇게 대답했다. 리누스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를 경이 직접 에스코트하고 있다고?”
“요즘 세태가 흉흉하니까요. 부인께서 영애를 많이 아끼십니다.”
“그렇군.”
리누스는 무표정한 채 대꾸했으나, 불만을 전부 다 숨기지는 못했다. 막시밀리안은 침착하게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물러나려고 했다.
리누스가 그를 다시 불렀다.
“클레어에게 내가 보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 좀 전해 줬으면 좋겠군. 보울러 백작은 그러겠다고 대답만 하고 전달을 안 하는 것 같아서.”
“의사에게 의논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부인의 마음의 안정이 가장 중요한 때라서요.”
“잠깐 얼굴을 보고 위로의 말을 하고 싶다는 것뿐이야.”
“전하의 말씀은 감사합니다.”
막시밀리안의 대답은 거의 철벽이었다. 리누스는 욱했으나 그렇다고 막시밀리안의 멱살을 잡을 수도 없었으므로 얌전히 물러났다.
그가 비키자, 후문이 열리고 마차가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커튼 틈새로 슬쩍 밖을 살폈다. 리누스는 파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바다에서 건져 냈을 때 같은 죽은 얼굴이었다.
클레어는 뒷맛이 씁쓸해진 채 커튼을 완전히 내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까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황후를 생각하면 좋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실로 돌아오자 주치의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인,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그렇게 움직이시면, 아기님에게 좋지 않습니다. 아, 부인, 얼굴이…….”
눈만이 아니라 뺨과 입술까지 빨갛게 부은 것을 보고 의사가 당황했다.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좀 울어서 그래요.”
“부인…….”
“미안해요. 걱정 끼칠 생각은 아니었어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왔는데, 이제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도 심하게 쉬어 갈라져 있었다. 주치의는 더더욱 조심스러운 기분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클라우제너의 유일한 직계가 되실 아기님이 아무리 귀한 몸이라 해도, 차마 이런 상태의 부인에게 몸을 조심하셔야 한다든가 하는 잔소리는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가장 아기를 귀하게 여기고 있을 터였다.
“한 시간 후에 진료 좀 부탁드릴게요. 딱히 배에 통증이 있거나 하진 않은데, 피곤하긴 해서…….”
“예.”
주치의의 대답을 듣고 나서 클레어는 욕실로 가서 따가운 얼굴과 먼지 묻은 몸을 가볍게 씻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요안나가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막시밀리안과 그레이 이외의 사람에게는 전혀 이 소식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도 클레어가 어딜 다녀왔는지 몰랐다. 침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클레어 님, 진짜로 괜찮으세요?”
“응. 좀 울긴 했는데, 괜찮아. 오히려 기분은 훨씬 나아.”
요안나는 주의 깊게 그녀를 살폈다. 목은 쉬었지만 확실히 어조는 어제보다 훨씬 가벼웠고, 감정을 눌러 담는 느낌도 없었다.
돌아보는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요안나는 안도했으나, 갑작스러운 변화는 또 그것대로 염려스러웠다.
“이 앞에 리누스가 와 있던데, 자주 찾아와?”
“네. 사실 사고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오세요.”
요안나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실은 억지로 클레어를 만나려 드는 방계 친척과 마주쳐 크게 싸운 일도 있었다.
“만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서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래.”
“클레어 님…….”
요안나가 또다시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레어가 멍한 얼굴을 하는 대신에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는 것이 얼마 만의 일인지 모른다.
“괜찮아. 내가 걱정을 많이 끼쳤지.”
“아뇨.”
“우선 뭘 좀 먹어야겠어.”
클레어가 반짝이는 눈을 들고 말했다. 그러자 요안나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네! 뭐, 특별히 원하시는 게 있으실까요? 제가 바로 전할게요. 그러고 보니 주방에서 딸기를 들여왔어요.”
“딸기 철이 되려면 아직 몇 달 더 있어야 하지 않나?”
“남쪽 끝에서는 이제 수확이 시작되나 봐요. 그러고 보니 무화과 절임도 있어요. 그것도 이번에 같이 가져왔다는데, 과육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게 아주 질이 좋더라고요.”
클레어는 주방에 고맙고 미안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특별히 무화과를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래도 고향의 맛이리라고 생각해서 신경 써서 가져왔으리라.
한창 입덧이 심할 시기였다. 다만 그동안 속이 울렁거리고 뒤집히는 것이 입덧 탓인지, 스트레스 탓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먹어야 한다는 마음도 그리 들지 않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이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귀하지 않아서 그동안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까지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이 들자 제일 먼저 몸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건강해야 아기를 무사히 낳고, 또 가족을 뒷받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레몬차를 좀 마시고 싶어.”
“레몬차요?”
바로 어제도 거부했던 것이라 요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레몬이 먹고 싶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새콤달콤한 게 조금 나을 것 같았다.
“꿀도 좀.”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당분을 보충하고 싶었다. 그리고 푹 자고, 얼굴을 상쾌하게 하고, 그다음 새로 모든 일을 시작할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집사가 트롤리를 가져왔다. 접시 위에는 티 푸드 대신 귀여운 꽃 모양의 설탕 과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얀 꽃잎이 벚꽃처럼 보였다.
“주방에서 일부러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게끔 주의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 고맙다고 전해 줘.”
클레어는 조그만 꽃을 입 안에 넣었다. 적어도 눈이 즐거운 건 확실했다.
단맛에 구역질이 조금 올라왔지만, 구토하기 전에 꽃이 녹아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클레어는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사실 진짜 먹고 싶은 건 귤이었다. 그리고 매콤한 거.
클레어는 막국수를 떠올렸다. 그거라면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처럼 내내 굶다시피 했던 상황에서 그걸 위에 넣으면, 위장이 곧바로 죽음을 호소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고춧가루…….’
그녀는 간절히 생각했다. 에리히가 있으면 그거라도 구해 오라고 발가락으로 명령할 텐데. 대단하신 분이니 세상에 없는 것도 만들어 오시겠지.
그런 생각을 했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단것이 드시기 편하시다면, 부드러운 케이크나 이런 것도…….”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아, 그러고 보니 딸기 빙수는 좀 먹을 만할 거 같기도 하고.”
“빙수요? 셔벗이 아니고요?”
“우유를 얼릴 수 있지?”
공업용 냉장고가 이미 존재하는 시대였다. 셔벗이 있으면 빙수도 가능하다.
일반인은 쓰기 어렵겠지만,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께서 우유를 얼리고 싶으시다는데 불가능할 리가 없었다.
집사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거 얼려서 대패로 갈아다 줘.”
“대패요?”
이번에도 생각지도 못한 레시피에 요안나가 눈을 굴렸다. 클레어는 레몬차에 뒤이어 또다시 설탕을 입에 머금고 웅얼거렸다.
“딸기랑 섞어 먹을 거야.”
“알겠습니다.”
맛이 짐작되는 주장이었으므로, 집사는 공손히 대답했다.
클레어는 차를 모두 마시고, 쿠션 사이에 파묻힌 채 말했다.
“요안나, 웨슬리 경에게 편지를 한 통 썼으면 좋겠어.”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웨슬리 경을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그래. 내가 내일 좀 보잔다고 해. 몸은 괜찮아. 어차피 이 거실에서 만날 거야.”
“네.”
요안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클레어 님에게는 무기력한 모습보다 이런 모습이 훨씬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