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차가운 이슬비가 바다에 떨어지며 자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두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선 헤르만 루덴도르프는 감상에 휩싸여 있었다.
“재밌긴 하네.”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 곁에 서 있던 요한 크로지크가 중얼거렸다.
요한이 클라우제너 공작의 편지를 가지고 루덴도르프로 온 것은 한 주 전의 일이다.
수도에 있던 요한에게 편지를 배달한 전령은 그 내용을 몰랐을 터이나, 그 안에는 만일 전령이 믿을 만하지 않다고 판단된다면 알아서 처분해도 좋다는 허락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명만 적힌 백지가 함께 있었으니, 한 번은 클라우제너의 식솔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전권을 사실상 허락받은 셈이다.
다행히 정보는 유출되지 않았다. 전령은 요한에게 전달된 편지의 내용을 몰랐으며, 그 봉투 안에 루덴도르프로 보내지는 편지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요한은 공작의 지시대로, 전령을 돌려보낸 다음 편지를 직접 들고 왔다.
재밌다면 재밌는 일이다. 클라우제너에서 정보가 유출되었기 때문에 공작은 자신의 힘을 손에서 놓고 아내의 힘에 의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역으로 클라우제너 공작가는 회임한 부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으니, 지금 상황은 공작과 부인이 서로 자리를 바꿔 앉은 듯이 보였다.
정략결혼을 한 부부의 정치적 입장이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귀족의 결혼은 종종 가문 간의 동맹이며, 반대로 말하면 동맹이 깨져 적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사실 클라우제너 정도의 가문이라면, 친모와 아들이 정적이 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와 에리히는 정치적 입장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가 묶였다. 섬겨야 할 숙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남편도 지켜야 한다는 지금 상황에 헤르만으로서는 미묘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나나 요한이나 각하의 명을 거부할 입장도 아니지만……. 이걸 공사 구분이 확실하신 거라고 해야 할지.’
헤르만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공작은 대놓고 그렇게 노려봐 놓고 정작 자신과 요한에게 명령하고 지시를 내리는 일에는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게 치정을 소재로 삼은 연극이었다면 좀 더 진흙탕이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요한이 문득 그를 돌아보고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십니까?”
“아니, 경은 이중 첩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부인의 신뢰를 많이 받게 되었구나 싶어서.”
그 말에 요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헤르만이 트집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트집이 맞긴 했다. 물론 헤르만은 진심으로 의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크로지크 백작가의 명운은 클레어의 손에 달린 데다가, 요한은 어차피 수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 헤르만은 여전히 많은 사람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덕분에 황후가 계엄령을 내린 그 순간부터 배신자를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만일 요한이 수도에 남아 있었다면 그 역시 정리되었을 것이다. 공작이 편지를 보내 요한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는 그 이유도 있었으리라.
이번에는 요한이 헤르만을 트집 잡았다.
“그런데, 여기는 엘리엇 경을 숨기기에는 너무 에른스트의 코앞이 아닙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고, 체면치레밖에 모르는 에른스트 공작 부부를 생각하면 사교계의 거부감을 무시하면서까지 여기로 밀고 들어오진 못하지 않겠나?”
헤르만은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클라우제너 측의 사람이 루덴도르프로 숨어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클레어가 루덴도르프의 인장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뿐이다. 크로지크도 마찬가지다. 노백작이 클레어를 만나 보다 깊은 약속을 맺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드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궁 밖으로 걸음 하신 게 거의 7, 8년 만일 텐데, 알트마이어에 이어 두 번째로 방문하는 영지가 된 셈이로군요.”
“가문의 부흥을 고모님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성공시킨 셈이지. 이거 기분이 묘한데.”
물론 헤르만은 황실에 대한 충심 따위는 거의 갖고 있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감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루덴도르프는 쇠락의 길을 걷던 가문이고, 거기서조차 쫓겨났던 자신이 이제는 클라우제너 공작의 부탁을 받아 황제를 보호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근데 이 부두에 배를 무사히 댈 수는 있는 겁니까?”
“부두 전체가 다 못 쓰게 된 것은 아니니까. 마침 비가 와서 수리공들도 나오지 않았으니, 보안을 유지하기에는 더 낫기도 하고.”
“그건 그렇군요.”
요한이 맞장구쳤다가 잠시 후에 다시 말했다.
“그런데 우산을 큰 걸 쓰고 나오셨군요.”
그러는 요한은 빈손이었다.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이슬비라 해도 제법 오래 맞고 있으니 결국 머리부터 어깨까지 상당히 젖었다.
헤르만은 빙긋 웃었다. 우산을 쓰는 게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로멜 남자들이 적지 않았으니, 요한은 지금 빈정거린 셈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는 법이다.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요한, 공작 부인께서는 합리적인 사람을 좋아해.”
“내가 언제 공작 부인 이야기를 물었습니까?”
요한이 발끈했다.
그때 마침 증기선 한 척이 천천히 항구 안으로 들어섰다. 헤르만과 요한은 배가 부두에 접안하기를 기다렸다.
항구는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접안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원들이 능숙하게 배 사다리를 내리는 동안 위에서 아이가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만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차 문을 연 다음 커다란 우산을 기울여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빗방울을 맞지 않게 신경 썼다.
“고맙군.”
빅토리아 대공이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시녀가 허둥지둥 우산을 폈다.
배 사다리를 점검하는 선원에 뒤이어 내려온 것은 아이였다. 정확히는, 뛰어내리려는 엘리엇을 낚아채 안은 윌리엄이었다.
“엘리엇, 제발 좀…….”
초췌한 그의 목소리가 하소연하듯 가늘었다. 엘리엇이 손발을 바동거리며 외쳤다.
“이모할머니한테 갈 거야!”
빅토리아 대공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윌리엄은 굴하지 않고 엘리엇을 단단히 붙들어 안은 채 하선하여 땅바닥에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모할머니!”
빅토리아 대공은 기꺼이 두 팔을 벌렸다. 엘리엇은 짤따란 다리로 전력으로 빅토리아 대공의 품에 달려들었다.
“억……!”
본디 애정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편이 아닌 그녀는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크게 표현하려다가 그만 연약한 관절과 다리뼈에 타격을 입고 말았다.
여기까지 예측하고 있던 헤르만이 넘어지려는 그녀를 부축했다. 빅토리아 대공은 간신히 아이고 소리를 내뱉지 않고 체면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사이에 또 컸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어 빅토리아 대공은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엇이 설움 폭발한 얼굴로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이모할머니, 이모할머니!”
“무슨 서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게로구나.”
빅토리아 대공은 웃으면서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 때문에 습기 먹은 금발이 병아리 솜털처럼 빅토리아 대공의 손가락에 감겼다.
“흐윽.”
엘리엇은 세상 서럽게 울먹였다.
지난 며칠 동안 엘리엇은 살면서 가장 많은 참을성을 강요당했다. 엄마도 없는데, 아빠까지 몇 밤 자고 온다는 손가락 약속도 없이 어리광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말만 하고 떠나 버렸다.
마사도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처럼 한숨만 내쉬고, 안아 주긴 하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같았다. 제임스 할아버지는 안아 주기는커녕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남처럼 고개를 숙였다.
찰스 외삼촌은 아예 겁먹은 사람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어리광을 받아 주는 건 황제 할아버지뿐이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대장님이 버티고 서서 만나게 해 주지 않았다.
후크 선장님이나 윌 아저씨는 여전히 좋아했지만, 바쁘다며 잘 놀아 주지 않았다.
새로 만난 엘레나 부인은 친절했지만 엄격해서, 자꾸 윌 아저씨를 혼냈다. 그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서 엘리엇은 괜히 서러웠다.
엘리엇은 엘리엇 경이라고 불리는 게 싫어졌다. 역시 아빠가 없어져서 그런 것 같았다.
“이모할머니, 나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엘리엇은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빅토리아 대공에게 하소연했다. 이모할머니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원? 무슨 소원?”
“아빠 좀 혼내 주세요.”
빅토리아 대공은 입을 조금 벌린 채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은 위대한 존재라도 올려다보듯이 당연히 가능하리라고 믿고 소원을 빌었다.
“이모할머니는 아빠의 이모니까 할 수 있잖아요. 눈물 쏙 빠지게 울 때까지 혼내 주세요.”
엘리엇은 한번 화낼 때 무섭게 화내서 울려야 한다는 에리히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의 이모가 없는 게 너무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