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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196/263)

197화

빅토리아 대공은 몹시 곤란해졌다. 엘리엇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녀가 당연히 에리히를 혼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듯했다.

어째야 하나. 혼낼 입장도, 능력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서러워하는 아이에게 더 참으라고 말하기도 미안했다.

어차피 금방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며 빅토리아 대공은 다정하게 말했다. 부모가 아닌 것의 장점이 무엇인가. 그냥 예뻐만 해도 된다는 거였다.

“우리 엘리엇이 무척 화가 났구나. 어떻게 혼내 줄까?”

“엉덩이를 때려 주세요.”

빅토리아 대공이 놀라며 되물었다.

“아빠가 네 엉덩이를 때린 적 있니?”

엘리엇이 움찔했다. 사실 자기도 그렇게 혼나 본 적은 없었다.

제임스 할아버지가 때때로 엉덩이를 때려 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화를 내서, 오히려 제임스 할아버지가 엉덩이를 맞은 사람처럼 도망가곤 했지만 말이다.

엘리엇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나중에 꼭 할머니가 엄마, 아빠에게 네가 많이 슬퍼하더라고 전해 주마.”

그러자 엘리엇이 갑자기 툭 눈물을 떨궜다. 빅토리아 대공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보듬어 안았다.

“엄마랑 아빠랑 둘 다 거짓말쟁이야. 세상에서 날 제일 사랑한다고 해 놓고.”

자기들끼리만 놀더니, 자기들끼리만 어디 가고.

공왕 할아버지도, 로저 아저씨도 보고 싶었다. 그 둘이라면 분명히 같이 화내 줬을 것이다.

뒤따라온 마사가 무릎을 꿇고 엘리엇을 빅토리아 대공에게서 떼어 내 안아 올렸다. 그리고 송구스러운 듯 빅토리아 대공에게 사죄하고 엘리엇의 등을 쓰다듬었다.

“지금은 두 분 다 바쁘시니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 엘리엇 경이 슬퍼하시는 걸 알면 부인께서도 불안하고 슬프실 겁니다.”

헤르만도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엘리엇은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헤르만은 엄마의 친구다. 지금은 엄마 편드는 사람은 다 보기 싫었다.

“슬퍼하라구 해요. 나는 나쁜 아이가 될 거니까.”

뾰로통하게 부풀린 볼이 귀여워서 빅토리아 대공은 웃고 말았다.

“아주 단단히 토라졌네.”

“이모할머니도 미워!”

이 마음을 풀어 주려면 아마 두 부부는 꽤나 마음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웃는 빅토리아 대공을 보고 엘리엇이 더욱 울상이 되었다.

그때 창백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느릿한 걸음으로 배 사다리를 밟아 내려왔다.

빅토리아 대공과 엘리엇을 제외한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남자들은 바지가 젖는 것을 개의치 않고 한쪽 무릎을 꿇었고, 여자들은 치맛자락을 펼치며 다리를 구부려 절을 올렸다.

엘리엇을 안고 있던 마사가 얼른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에리히의 엄중한 지시가 있었기에 황제는 엘레나 부인과 의사가 모두 동석한 자리에서만 엘리엇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발작할 우려가 있으니 반드시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지시가 있었다.

“조지.”

이미 소식을 들었음에도 빅토리아 대공은 조금 흔들리는 목소리로 황제의 이름을 불렀다.

아마 그녀는 황제에게 가장 크게 실망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연을 끊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네 명의 형제들 중 그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태어났다. 나머지 형제들은 일평생 그에게 양보하는 법과 그의 것을 탐내지 않는 법을 가장 우선으로 배웠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채 사적인 감정에 파묻혀 시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 왔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고, 또 그가 아편에 중독된 과정에서 음모가 개입되었으리라 짐작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포기한 것은 그 자신이다.

빅토리아 대공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했던 대화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견뎌서 이겨 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싶습니다.]

[의미가 없다니. 너는 제국의 황제다.]

[정무는 내각이 돌볼 겁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많으니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내각이 강해지면, 내가 죽은 뒤에도 그 여자가 마음대로 하지 못할 테니.]

[조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누님께서 왕관을 가져가시겠습니까? 그랬다가 에리히나 베티나에게 물려주셔도 괜찮을 겁니다. 아니…….]

황제는 길게 꼬리가 늘어지는 듯한 어조로 말하다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말을 쏟아 냈다.

[아니, 아니, 안 됩니다. 제러드의 권리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어. 누님도, 맨프레드도, 에리히도 안 됩니다.]

그럴 정도라면 차라리 분노에 몸을 맡기고 가서 황후를 쏴 죽여 버리기라도 할 것이지. 그 결과로 내전이 일어난다 해도 원한은 갚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제 감정과 분노에 대한 책임은 지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 자신에 대한 책임조차 내팽개치고 아편 연기 속으로 도피했다. 다정한 헨리에타가 복수를 원치 않았으리라는 말로 핑계 대기에는, 너무 무책임하게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래도 동생은 동생이었다. 제 발로 걸어 나올 작정을 한 것만으로도 됐다. 그녀는 기꺼이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했다.

“빅토리아 누님.”

황제는 조금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똑바로 다가와 오랜만에 해후한 누이를 포옹했다.

“안색이 오히려 나빠졌구나.”

“마음이 어지러워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가 느릿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평생 결심을 세우지 못할 줄 알았다.”

“일어나야죠. 일어나야죠.”

황제가 제 결심을 되풀이하듯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직 끌어안을 수 없는 아이 대신 누이를 꽉 끌어안았다.

“누님, 들으셨습니까? 엘리엇이 제러드의 아들이랍니다.”

그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편지로는 전해 듣지 못한 소식에 깜짝 놀란 빅토리아 대공의 몸이 굳었다.

“뭐?”

“에리히가 확언했습니다. 증인도 있답니다. 제러드가, 죽기 전에 신부를 얻어 아이를 가졌답니다.”

“그럴, 그럴 수가……!”

빅토리아 대공이 목쉰 소리로 내뱉었다. 엘리엇이 제러드를 떠올리게 했던 많은 순간이 어지럽게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황제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일어나야죠. 정신 차리고, 이번에는 지킬 겁니다. 제러드의 자식을 제가 아니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제가…….”

그가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사실 양육도, 보호도, 제가 아니라 에리히에게 맡겨 두는 게 나으리라고 아직 머리 한쪽에 남아 있는 합리가 말했다. 하지만 25년간 그를 잡아 묶었던 강박은 그렇게 순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황후에게 넘기고 싶지 않아 억지로 틀어쥐고 있던 모든 것을 아이에게 줄 것이다. 제가 가진 것은 제러드의 권리이니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제러드의 것은 아이의 권리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리고 제 기능을 해야 한다.

그는 손바닥에 피나도록 주먹을 쥐고 자꾸만 도피하려는 자신을 붙들어 맸다. 의사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이 있어도 오히려 신체 기능은 점점 떨어지고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고열과 발한에 시달리며 쉬지 않고 구토를 했다.

그래도 아이를 안아 보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그 고운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혀 얼러 볼 것을 생각하며 그는 견디고 있었다.

내가 네 할아비라고 말하고, 네 아버지가 얼마나 영리하고 선량한 이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일러 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가 얼마나 용감하고 고운 이였는지 듣고, 또 행복하게 잘 자라 왔는지도 물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왕관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제국 따위도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황권을 쥔 채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그동안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셈이다.

하지만 에리히는 제러드의 유지를 외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프란츠 알트마이어가 손과 얼굴을 버리고, 시종과 호위들이 목숨을 던졌던 그 유지. 사실 자신에게 가장 많이 호소했을 텐데, 네 행복을 생각하라며 외면했던 그것.

그것을 아이에게 가장 좋은 형태로 돌려줄 것이다. 제러드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제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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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게 말이 되나.”

요안나가 보낸 편지를 쥔 채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웨슬리 경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편지를 몇 번이나 보아도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만나고자 하니 방문해 달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체 왜 날?”

그는 진짜로 클라우제너 공작의 암살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율리아라고 하는 시녀의 명령으로 공작 부인을 위협하는 음모에 한몫 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작과는 관계없다. 비슷한 시기에 그런 암살 계획이 있으리라는 걸 그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황후의 금고이지, 칼이 아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아버지. 비탄에 잠겼던 공작 부인이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람스베르크 의원이나 자신의 추문에 대한 복수는 아닐 겁니다.”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아들 옌스 웨슬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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