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7/263)

198화

“게다가 이제 와서 그 문제에 대한 원한을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애매하게 지나지 않았습니까?”

“공작 부인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구나.”

“제 생각에, 현재 시점에서 충분한 양의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옌스의 말에 웨슬리 경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옌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석탄 공급 계약을 취소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게 매입자에게만 타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클라우제너령은 거의 모든 소비재를 외부에서 사들여야 하는 곳이니, 판매를 금지했으면 그만큼 떨어진 수입을 보충해 주거나 저렴하게 공급해 줘야 합니다.”

물론 많은 귀족이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웨슬리 경은 초조하게 담배를 꺼내 들었다. 아들의 말은 얼핏 듣기에 일리가 있었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하필 우리부터 제안을 넣을 리가 없어. 공작 부인은 이미 우리 상단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테고, 원한도 있는 셈이 아니냐.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짜로 거래 협상이 목적이라면 회임한 공작 부인이 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담당자가 왔겠지.”

웨슬리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려고 했던 옌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가서 만나 보고 오겠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부른 건 나야.”

“공작 부인은 합리적인 성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버지 대신 갔다고 해서 크게 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위빙 상단의 카슨 씨와도 친분이 좀 있으니까요.”

“아.”

웨슬리 경이 생각났다는 듯이 감탄사를 냈다.

“그렇지. 그런 인연이라도 좀 있으니 낫구나.”

“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고, 제게 맡겨 주십시오.”

사실 옌스는 그게 큰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염려도 하나 갖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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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들어와.”

어차피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클레어는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대답했다.

오렌지색과 노란색이 섞인 메리골드 꽃다발을 쥔 손이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신호라도 하듯 꽃다발을 한 번 흔든 뒤에 로저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클레어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까지 보냈던 제 축하의 마음이 먼저 도착했다는 의미입니다.”

“나 참. 고마워.”

로저가 싱긋 웃고 성큼성큼 침대 쪽으로 다가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클레어는 그것을 받고 조금 놀랐다. 전부 메리골드인 게 아니라 사이사이에 똑같은 색의 오렌지와 레몬이 숨어 있었다.

“입덧에는 신 게 좋다고 들어서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좀 더 갖고 있고 싶었지만, 요즘에는 꽃향기에도 구역질이 났기 때문에 클레어는 그것을 하녀에게 넘겼다.

날이 서늘했지만 창문이 전부 열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신들이 보낸 꽃다발도 전부 치우고, 침실에 놓인 것은 이제 과일 바구니뿐이었다.

“진짜로 신경 쓴 건 이게 아닌데요.”

로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하녀들이 트롤리 두 대를 밀고 들어왔다. 그 위에는 작고 예쁜 유리그릇이 열두 개씩 놓여 있었는데, 그릇마다 은으로 된 티스푼 하나와 서로 다른 맛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고, 밑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클레어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말했다.

“……31!”

“네?”

“아니.”

로저의 반문에 클레어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로저가 갸웃거릴 차례였다. 31이라니, 의미 불명의 숫자다.

뭐,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블룸 남작님 말씀을 들어 보니, 요즘 거의 얼린 우유 간 것만 드시고 있다고 해서요. 차갑고 달콤한 게 넘기기 쉬우신 것 같고, 이것도 맛에 따라 드실 만한 게 있고 아닌 게 있을 것 같아서요.”

“일종의 샘플러네. 역시 네가 감각이 좋아.”

“그렇죠?”

로저가 싱글거렸다.

전 같았으면, 자신이야말로 역시 좋은 남편감이 아니겠느냐는 농담을 덧붙였겠지만, 이제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귀족에게 결혼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진짜로 옆자리를 욕심냈던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눈 좀 달라고 아우성친 것뿐이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녀가 선택한 파트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이리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위빙 상단의 우선순위는 밀려났다. 그리고 공작과의 결혼이 단순히 아이를 위한 것도, 심지어는 귀족답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끼어들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그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자신이 아니다.

표정과 감정을 위장하고 농담을 건넬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을 넘어갈 수는 없었다. 살짝 밟고 서 있는 것도 이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재미없는 배려를 덧붙였다.

“녹기 전에 맛을 보십시오. 드실 만한 게 있으면 저택 주방에 가져다 둘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냉장고를 새로 들였더라고요.”

“주방까지 갔다 왔어? 고마워. 아, 이거 괜찮네.”

입 안에 들어오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결과적으로 우유와 과일이니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내내 빙수만 먹고 있던 터라서 식감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었다.

로저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자신이 가져온 것을 그녀가 만족스러워할 때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입에 뭐가 들어가는 게 기쁘다는 것은 또 새로운 기분이었다.

클레어는 몇 개에는 구역질했지만, 대부분은 꽤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살 것 같았다.

“그동안엔 좀 어땠어? 계엄령 때문에 위빙 상단에도 타격이 상당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사치품 시장이니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동안 벌어 놓은 게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투자자들 중에 잡혀가는 사람이 좀 있어서 갚을 시간이 좀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요.”

“농담할 일이 아닌데.”

“농담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생각보다 꽤 있습니다. 이번에 노예계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선거권자 중에서도 항의 서한을 보내거나 하원 의원을 만난 사람이 꽤 많습니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로저가 진지하게 말했다.

황후가 한 일은 로멜에만 이득인 것이 아니다. 자산가 계급 전반에게 이익이었으므로, 로멜 우월주의로 인한 사회적 손해를 메꾸고도 남을 만큼 금전적 이득을 본 자가 많이 있었을 터이다.

선거권이 재산세를 기준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황후는 의회를 장악하기 위해서 올바른 전략을 취했던 셈이다.

클레어가 약간 웃었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니까.”

물론 천박함을 자랑처럼 휘두르는 자가 간혹 있기는 하나, 대부분은 그랬다. 합리와 이성을 자랑으로 삼는 자산가 계급의 시민들이라면 더욱 그러하고, 그가 로멜 출신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로멜 우월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적 압력이 오히려 딜레마를 제공하는 셈이다.

『황실과 귀족이 또다시 시민을 노예로 삼으려 한다.』

이 문장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시키는 자들에게조차 호소력이 있었다. 선거권을 획득해 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것은 제국 시민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아편의 해악에 대해서 알려질수록, 노예 계약이 자유의사로 이루어진 거라는 개소리는 못 하게 되겠지. 연단에서 논리로 이길 자신이 없는 자는 모두 입을 닥칠 수밖에.”

클레어는 잠시 울리히를 염려하긴 했다. 그가 또다시 흥분해서 허튼소리에 휘말리면 곤란할 것 같기도 했다.

편지라도 한 장 써 둬야겠다. 그런 생각과 함께 클레어는 그 일을 미뤄 두었다. 그 문제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

그때 집사가 들어왔다.

“마님.”

“무슨 일 있어요?”

“방문객이 있습니다.”

그가 명함을 한 장 클레어에게 건네주었다.

“옌스 웨슬리……. 웨슬리 경의 아들인가?”

“예.”

집사가 대답했다. 로저가 의아하게 물었다.

“사우스랜드 곡물상을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그래.”

“일을 하시려고요?”

“일이라고까지 할 만한 건 아니고…….”

클레어는 헛기침을 했다.

[설마 내가 군을 몰고 와서 계엄군과 시위대를 전부 쓸어버릴 때까지 가만히 있을 건 아니겠지?]

에리히가 그렇게까지 말하고 갔는데, 진짜로 가만있을 수 있을 리가.

그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맨날 얄밉다, 제멋대로다, 자기만 잘난 줄 안다고 욕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질 수는 없지.’

클레어는 오랜만에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보나 마나 지는 쪽은 죽는 날까지 굴욕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로저에게 직접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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