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클레어는 어색하게 말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 처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방문하는 사람을 잠깐 만나겠다는 것뿐인데. 시작한 일은 끝내야 하니까.”
“남에게 못 맡겨서 결국 스스로 하셔야 하고요?”
“딱히 사업 이야기는 아니야. 너한테 못 맡겨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꼭 지금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
대외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사우스랜드 곡물상이라는 기록을 남길 생각이었다. 그걸 저쪽에서도 눈치 챈 모양이다. 본인을 불렀는데, 아들을 보낸 것을 보면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하시는 건지.”
로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섭섭합니다. 저는 남작님이 오랜만에 절 만나고 싶어서 부르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가 웨슬리 경과 아는 사이니까 입회하라는 의미로 부르신 거군요.”
“그럴 리가. 공개적으로 제일 처음 만나는 외부인이 웨슬리 경이 되니까, 네가 서운해할까 봐 널 먼저 부른 거지.”
“제가 외부인입니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저 정문으로 통과도 못 하고 뒷문으로 하인처럼 몰래 들어왔는데요. 제가 손님이 아닌 줄 알았죠.”
“손님 아닌 것도 맞고.”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로저가 한숨과 웃음을 섞은 채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얼굴을 조금 꾸미시는 게 좋겠습니다.”
“화장하라고?”
“아니요. 얼굴이 밝으셔서, 지금 이대로 만나시면 옌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정보를 주시게 될 겁니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서요.”
클레어는 로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에리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편지를 전달한 그레이와 함께 갔던 막시밀리안만 알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로저는 이미 알아챈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로저는 눈치가 빠른 편이고, 또 자신과도 오래된 사이이니까.
그는 비밀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어 남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 리 없었으므로 클레어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했다.
“그래서 널 부른 거기도 해. 혼자 있었다는 것보다는 너하고 함께 있었다고 하면 조금 나을 것 같아서.”
“이런, 남자의 순정을 너무 막 다루시는 거 아닙니까? 진짜 정부로 삼아 주시지는 않으면서 대외적으로만 그 역할을 해서 나중에 사형당할 포인트만 쌓으라니요.”
“무슨 소리야? 친구를 만나서 기분이 좋아졌다는 게 뭐가 어때서?”
로저가 그 말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또 제가 친구 행세를 안 해 드릴 수는 없겠군요.”
“뭐, 여러모로 신뢰 문제도 있고. 네가 나보다는 웨슬리가와는 친분이 있으니까.”
클레어는 마지막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산딸기 맛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로저가 손을 내밀었다.
옌스는 긴장한 채로 클라우제너 공작저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델포드 남작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웨슬리처럼 상업으로 신흥 부자가 된 계층에게는 그야말로 우러러볼 만한 황금의 손이었다.
위빙 상단 초창기에는 남작이 돈을 댔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카슨 부자가 일으킨 사업이라거나, 귀족이 직접 뛰어들었으니 장벽이 낮아 그렇다고 폄하하는 자도 있었지만, 이제는 감히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개인적으로 그녀를 접견하는 기회는 다시없는 영광이었으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문제겠지.’
어떻게든 아버지에게까지는 불똥이 튀지 않게 해야 한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남작이 로저의 에스코트를 받아 응접실로 나왔다. 옌스는 벌떡 일어서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델포드 남작님.”
“만나서 반갑군요.”
그는 내밀어진 손에 부드럽고 공손하게 입술을 대면서, 살그머니 클레어의 안색을 살폈다.
극도의 비탄이나 슬픔에 잠겨 있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뺨은 홀쭉하고 병색이 조금 있었으나, 임신 중인 데다가 쓰러졌던 것을 고려했을 때 이만하면 건강해 보였다.
옌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회임 축하를 드리지 않을 수도 없어서 옷감을 조금 가지고 왔습니다.”
응접실 한쪽에서 하인이 선물을 들고 서 있다가 클레어가 돌아보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기 싸개나 기저귀로 쓸 만한, 아무런 처리도 거치지 않은 보드랍고 고급스러운 순면이었다.
로저가 농담처럼 말했다.
“아니, 옌스. 너무한 것 아닌가? 내가 있는데, 남작님에게 선물로 옷감이라니?”
“먹을 것은 함부로 선물할 수 없고, 입덧 중에는 꽃도 불편하게 느끼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성의 표시입니다.”
“고마워요. 신경을 많이 쓰셨군요.”
클레어가 담담하게 말했다. 옌스의 말이 옳다. 지금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음식이든 꽃이든 가까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금전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써서 골랐다는 의미였다.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클레어는 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자신이 상석에 앉았다.
“우리가 아마 완전히 초면은 아니죠?”
“예, 재작년에 에이블리 자작령에서 열렸던 상단 연합회 모임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수행원으로 아버지를 따라간 것뿐이라 아쉽게도 인사만 드렸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그때는 수행원이었는데, 이제는 대리인이라니. 경쟁자가 무척 많으셨을 텐데요.”
클레어의 말에 옌스는 긴장한 손끝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곧바로 이렇게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사우스랜드 곡물상은 당연히 상속으로 이어지는 보통 상단과 다르다. 진짜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상 옌스에게 이어지기는 하겠으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이름을 빌려주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경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질 것이다.
옌스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상단 대리인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 아버지는 저를 신뢰하십니다.”
“웨슬리 경을 대신해서 왔다고 말씀하실 생각은 없나 보군요.”
“송구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심을 피해 갈 수는 없을 텐데요.”
옌스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얼었다. 서로 사정을 다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가혹하시군요.”
이건 웨슬리 가문 입장에서는 외통수였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무슨 심각한 내용도 아니고, 그냥 만나러 오라는 것이니 더 그랬다.
적당히 핑계를 대서 거절할 수도 없다. 웨슬리 경이 황후의 시녀 율리아의 계획에 손을 보탰기 때문이다. 만남을 거절한다면, 그 일에 대한 사죄조차 거절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만나면?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황후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래서 옌스는 부친 대신 자기가 왔다. 그는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대리인이 될 수 없다. 사실 부친의 의논 상대로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사우스랜드 곡물상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클레어가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거부하기 쉽다. 또 황후가 의심하더라도 부친이 클레어를 만난 것보다 훨씬 여파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클레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가혹하다니. 웨슬리 경이 나와 디트마어 경에게 하려고 했던 일을 생각하면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할 텐데.”
“죄송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희 아버지에게 선택지가 있었던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그걸 남작님께서 이해해 주실 필요는 없으시지요.”
옌스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각오가 되었습니다.”
“자아, 남작님, 그만하시죠. 종종 젊은 남자를 무릎 꿇게 하고 싶어 하시는 건 압니다만.”
로저가 끼어들었다. 클레어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왜 말을 그렇게 이상하게 해?”
“제가 뭘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젊은 남자 무릎 꿇리는 걸 즐기는 것 같잖아. 협상할 때 상대를 막론하고 이쪽이 우위에 서려고 노력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로저가 어깨를 으쓱했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웨슬리가를 몰아세우려던 건 사실이었지만, 이 자리에서 사죄를 받으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옌스가 진짜로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급격히 피곤해진 기분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닌데. 어쨌든, 불편하니까 그냥 앉으세요.”
“예.”
“제안을 하려고 했어요. 뭐 어차피 웨슬리 가문의 이야기이니, 옌스 씨가 자부하는 만큼 아버지의 신뢰를 받고 있다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옌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클레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를 배신하면, 웨슬리 가문이 사우스랜드 곡물상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요.”
“……황후 폐하에게 등을 돌리는 건 저희에게는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 반대로 말하죠. 웨슬리 가문이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황후를 배신할 수밖에 없어요. 웨슬리 가문은 그런 위험을 감내할 만큼의 야망을 가지고 있나요?”
클레어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