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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201/263)

202화

리누스는 여전히 황후의 골칫거리였다. 잠깐은 제정신을 차린 것 같더니, 결국에는 이 꼴이다. 대체 클레어 델포드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목숨을 구해 줬다고는 하지만 보은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잠깐 머무는 사이에 정이 들어 봤자 얼마나 쌓았겠는가. 남녀 관계는 더더욱 아닐 터였다.

에리히의 것이 탐나서 그런다면, 차라리 힘을 얻으려고 애써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클라우제너를 처리한 후에 사로잡아 강요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리라.

에리히가 진짜 죽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를 품은 여자를 그리 쉽게 꾀어낼 수 있겠는가.

“하…….”

황후는 탄식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설령 에리히가 탈출하지 못하고 붕괴된 건물에 묻혀 있다고 하더라도, 클레어를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황후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는 태도로 밖으로 나섰다. 빈전에 들른 것은 그냥 자신의 실패를 확인하고 찬찬히 사색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 앞에서는 아우구스타만이 아니라 에티호넨 백작과 에른스트 소공작, 라멜로프 하원 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황자 전하를 뵈려 했으나 계시지 않아 황후 폐하께 왔습니다.”

“쯧.”

황후가 혀를 찼다. 에른스트 소공작이 살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용건을 말해 보게. 내가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북방군에 황자 전하께서 직접 가시는 게 좋겠다는 건의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에티호넨 백작이 말했다.

“국상 중에 황자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북방군 사령관을 확실하게 움직이려면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서두르면 일주일 정도면 다녀오실 수 있으니까, 발인에는 늦지 않으실 겁니다.”

“국상 기간은 조금 더 끌 수 있으니까요. 빅토리아 대공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리아 대공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리누스의 계승을 지지해 주던 이 중 하나였는데, 확실히 태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녀가 황실의 가장 어른인 만큼, 그 태도 변화는 다른 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조카와 동생은 다를 수 있지.’

제러드의 죽음은 눈감았어도, 황제 시해는 그러지 않을 모양이다. 어쨌거나 악재였다.

“사람은 만나고 있나?”

“예방을 청하는 자들이 많지만, 모조리 거절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지로 돌아갈 마음도 없는 것 같고요.”

빅토리아 대공은 과연 황제의 생존을 알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알기 때문에 굳이 자기 영지로 돌아가거나 사람을 모아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반대로 모르기 때문에 리누스를 지지하지는 않아도 굳이 저항까지는 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애도하기로 한 건지.

황후가 구부린 검지와 중지를 움직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쥐고 싶었으나, 그 정도로 감정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볼 만한 일이군. 북방군 문제는 내가 리누스와 의논해 보겠네. 라멜로프 경은 무슨 일인가?”

“위빙 상단도 창고를 열었습니다.”

라멜로프 의원이 말했다.

“명목은 빈민 구제입니다만, 태반이 반역자들에게 흘러들어 갔을 겁니다. 위빙 상단만이 아니라 포목상 대부분이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클라우제너는?”

“모든 가산을 봉인한 그대로입니다.”

“감찰청이 움직일 거야. 사우스랜드 곡물상과 위빙 상단, 그 외에 델포드 남작이 소유하고 있거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회를 전부 압류하도록 했네.”

“민심이 악화될 겁니다.”

“어쩔 수 없어. 실제로 반군에게 협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황후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누스가 즉위하고 나면 끝나는 게임이야.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모두 잊을 텐데.”

헨리에타 황후가 죽었을 때도, 제러드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돈을 풀고 흥밋거리를 던져 주면, 금세 시선은 그리로 몰리게 마련이다.

자유니 정의니 이상적인 소리를 부르짖기는 쉽지만, 결국 인간은 남보다 자기가 더 낫다는 점에서 기쁨을 누리는 법이다.

제 몸에 나는 상처 하나가 더 아프고, 제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한 푼이 더 아까운 것들이, 언제까지 도덕적 우월감 때문에 가혹한 상황을 버티겠는가.

지금은 싸움이 성립하고 있으니 하나로 모여 있지만, 곧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아우구스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용건을 끝마치고 공손히 먼저 물러갔다. 그제야 아우구스타가 입을 열었다.

“북방군에는 제가 가겠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가시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제가 황후 폐하의 대리인으로서는 제일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요.”

황후는 이상한 기분이 되어 아우구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심복이었으며, 이 세상에 아우구스타를 믿지 못한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문득 빅토리아 대공이 머물러 있는 장소가 루덴도르프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황후는 아우구스타가 자신을 위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며,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알아채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이 아우구스타의 두려움을 맛보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열한 짓이다. 실제로 공포를 주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지금 타인의 두려움을 바란다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눈을 내리깐 아우구스타는 아직 황후의 생각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황후는 감정을 숨기고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누스와 이야기해 보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테판은 요즘 어디에 있지?”

아우구스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멀리 떠나도록 지시했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까요.”

“그렇군.”

황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타가 그녀를 반보 뒤에서 따랐다.

이 머리 위에 관을 올리겠다고 결정했던 젊은 시절에는 죽은 뒤의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모두 쥐어 누리면 만족할 줄 알았다. 차라리 관 속에 가지고 들어갈 것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했지, 남길 것에 대해서는 떠올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남긴 것을 받을 아이가 필요했다. 자신의 분신이 되어 함께 행동할 자가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가장 가까이에서 성장을 지켜보았던 것은 제러드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에리히와 베티나다.

‘그 셋 중 하나만 내 자식이었더라도 좋았으련만.’

아니, 스테판이었어도 좋았으리라. 어느 누구든 다스리느라 힘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제러드의 아들이라는 그 아이는 어떨까? 이렇게까지 큰 사건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그녀는 그 아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순수한 호기심이 들었다. 클레어 델포드와 에리히는 그 아이에게 만족하고 있을까?

황후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침궁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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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너 공작저의 경계 태세는 아직도 엄중했다. 보울러 백작이 정문에 차려 놓은 천막 사무실도 건재했다.

그러나 전처럼 외부인의 출입을 전면 금지하지는 않았다. 공작 부인이 안으로 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 외에도 몇몇 사적인 용건으로 드나드는 방문객이 있었다.

하지만 그 손님 중에 리누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군. 그냥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하지 않았나.”

리누스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보울러 백작은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리누스는 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황공하오나 황자 전하, 염려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회임 중인 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부인께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입니까?”

“설마 클레어를 감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험하게 하십니까? 공작 부인께서는 후계자를 품고 계시는 귀한 몸이시며, 공작가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여주인이십니다. 부인께서 만나고자 하신다면 막을 이유가 없지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임부이니, 자네들이 제대로 소식을 전하지 않은 채 눈과 귀를 가로막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일은 없습니다.”

보울러 백작이 철통처럼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리누스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클레어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유가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냥 위로의 인사를 하고 싶다는 것뿐 아닌가.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엘리엇에 대해서, 또…….

그때였다.

저택에서 집사가 나와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리누스 황자 전하. 보울러 백작님.”

리누스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채 피곤한 눈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집사는 지난 몇 주 동안 그가 간절히 바라던 말을 꺼냈다.

“마님께서 만나 보시겠다고 합니다.”

리누스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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