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49. 형제
리누스는 얼굴을 찡그린 채 안주인의 거실에 들어섰다. 가슴속이 마르는 것 같기도 하고, 오수로 꽉 차 목구멍으로 넘칠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구역질이 났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클레어가 자신을 굳이 알은체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엘리엇을 잃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함께 있는 동안 아이에게 그다지 잘해 준 것도 아니었다.
정을 들이려고 애쓴 적도 없다. 오히려 좀 짜증스럽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아이를 알고 보살펴 왔다는 착각을 느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리누스도 알고 있다.
동시에 그는 기묘한 불편감을 느꼈는데, 그것이 책임감이리라고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엘리엇은 제러드의 아이였고, 자신이 만일에 진짜로 제러드의 동생이라면 아이는 당연히 자신의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 에리히가 아니라.
아니,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제러드의 동생이 아니고, 에리히도 제러드의 형제이기에 아이의 양부가 된 것이 아니다.
그러면 클레어 때문에 이런 기분이 되는 건가?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클레어가 꽤 미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칠 정도로 아름다운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녀가 보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긍정적인 감정을 쌓은 상대도 아니었는데.
그녀가 먹인 것이 식사가 아니라 실은 다른 것이었던가. 설령 그것이 어두운 바닷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의식을 휘저어 떠오르게 했다고 할지언정, 인생의 전반을 바꾼다거나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누르게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 초조함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냥 에리히에게서 빼앗고 싶은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를 변하게 만든 것을 자신이 차지하여 이 목구멍 밑으로 가득 찬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해야 여자 하나로 그게 될 리가 없었다. 만일에 자신이 열등감을 지우고 에리히나 제러드가 되고 싶다면, 혈관의 피를 모조리 바꿔 넣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니, 지금 황제의 빈전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마치 사랑받았던 아들이기라도 한 양 자신과 세상을 모두 속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쉬지 않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클레어를 만나고 싶었으니, 이제 곧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는 셈인데도 여전히 발밑에 땅이 아니라 물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전에는 땅 위에서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숨쉬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물 위에 선 채 목이 말랐다.
“리누스.”
리누스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클레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임신을 했다고 들었지만, 아직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살이 빠진 듯, 어깨가 한층 가늘어 보였다.
리누스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러나 그가 미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막시밀리안이 가만히 손을 뻗어 사이를 가로막았다.
“막시밀리안!”
리누스는 분노가 치솟은 나머지 도리어 하얗게 변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얼굴 근육에 미동 하나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황공합니다, 전하.”
굳이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리누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예민한 시기니까 네가 이해해.”
클레어가 담담하게 말했다. 리누스는 쑥 들어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앉아.”
“…….”
그는 미묘한 질투에 사로잡힌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레어.”
“계속 나를 보고 싶다고 했었다면서? 무슨 일이니?”
“전해 들으면서도 만나 주지 않았던 거야?”
“여러 가지 일이 있었잖아.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언제든 밥을 같이 먹어 주겠다고 했으면서.”
“고작해야 밥 때문에?”
클레어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네가 할 일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우리가 이제 한가하게 밥이나 같이 먹을 사이도 아니고.”
클레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리누스는 서운한 마음을 씁쓸하게 되씹었다. 루덴도르프의 별장에 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고, 그때와 지금 말하는 밥도 전혀 다른 것이다.
클레어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엘리엇이 마음으로부터 에리히의 자식인지는 모르겠으나, 클레어의 아이인 것은 확실했다. 제 아이를 잃은 여자가 원수의 자식에게 마음 쓸 이유가 없다. 게다가 배 속 아이의 아비 또한 그의 어머니가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누스는 부당한 억울함을 느꼈다. 아니, 아이 자체에 대해서조차도 그랬다.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위로도 하고 싶었고. 축하는, 지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지만.”
“……그래.”
“엘리엇이 알면 서운해했겠다고 생각했어.”
리누스는 말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신감이라니. 그건 그가 느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녀의 배 속에 들어 있는 아이가 에리히의 자식이라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건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엘리엇이 가여워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 친자가 생기면 클레어는 제 자식에게 더 마음을 기울이게 될 테고, 엘리엇에게는 서럽고 억울한 일이 되리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역시 자신이 배신감을 느낄 일은 아니다. 걱정이라면 모를까. 엘리엇이 제러드의 아들이라서 마음이 쓰이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클레어가 제러드를 배신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의 복잡한 마음은 짐작도 못 하는 듯, 클레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둘째 생기면 첫째가 힘들어한다고 하긴 하더라. 내가 잘해야지.”
“어.”
“그런 이야기를 하러 왔니?”
“…….”
리누스는 침묵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 널 해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엘리엇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에리히가 아니었으면.”
“리누스, 날 너무 화나게 하지 말아 줄래?”
클레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 이렇게 집에 들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엘리엇과 에리히가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얼굴을 마주 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엇을 염려했다는 건 충분히 전해졌어. 위로하러 와 주고 싶었다는 것도. 고마워. 하지만 그걸 황후 폐하께서 기꺼워하시진 않겠지.”
“어머니와는 상관없어.”
“없을 수가 없잖아?”
클레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그녀는 지난 몇 주 동안 리누스 개인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누스가 진짜로 엘리엇을 염려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 상대에게 관심을 표시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엘리엇 쪽이다.
오히려 왜 그렇게 애타게 자신을 만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한테 결백을 증명하려고 해도 아무 의미 없어.”
“……나는 딱히.”
“리누스. 나는 원래는 부모의 잘못을 자식이 받아야 한다거나, 아니면, 단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어떤 권리나 의무를 갖고 있다거나 하는 그런 주장을 싫어해.”
클레어가 말했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는 인간답게 살 권리뿐이고, 의무도 마찬가지로 인간답게 살 의무뿐이다. 백 년도 더 전에 위대했던 선조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로 남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권리를 갖는 것도, 남의 삶을 온전하게 만들 의무를 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어차피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고, 좋은 집에서 태어나든 못된 부모에게서 태어나든 똑같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런데 요즘에 생각이 좀 달라졌어.”
리누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모의 죄가 자식과 별개라고 할 거라면, 자식이 그 결과물을 취해서도 안 되지. 죄의 대가로 호의호식하는 건 공범이라고 할 수 있겠더라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황제의 관을 쓰게 될 사람은 네 어머니가 아니라 너야, 리누스. 네가 주도권을 잡고 생각을 돌리면, 이 모든 일을 온건한 방향으로 풀어 갈 수도 있겠지.”
클레어는 리누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찬찬히 말했다.
“그럴 마음이 있다면, 도와줄게. 저번에도 그 말 하려고 했던 거였어.”
“…….”
리누스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숨 막힌 사람처럼 쌔액 숨을 들이쉬었다.
“너도 나보고 황제가 되라는 거군.”
“그렇게 들리니? 전혀 아니야. 네가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면, 의무도 다하라는 거야. 황후 폐하의 아들이기를 거부할 거라면, 그녀가 주는 것도 거부해. 그래야 내가 너를 원수로 여기지 않지.”
클레어는 자신이 에리히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누스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분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네 뜻을 따르면.”
“…….”
“나를 받아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