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클레어는 리누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받아들여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널 용서해 주길 바란다는 거야?”
“…….”
리누스는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 순간에는 클레어가 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것이 무척 화가 났다.
야심을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을 상대로라면, 황제가 될 사람이라는 것이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긴, 그런 사람이었다면 자신은 여기 와 있지 않을 것이다.
클레어는 싸늘한 얼굴로 리누스를 바라보았다.
“네가 네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데도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면, 나는 그걸 도와줄 용의가 있고, 또 네 어머니와 너를 별개의 존재로 보려고 노력하긴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거나 하는 일은 굳이 필요하지 않겠지.”
“클레어…….”
“그게 아니라면, 내 남편과 자식의 목숨값으로 널 죽여도 모자라지 않지.”
그나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에리히와 엘리엇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리누스부터 무너뜨리려고 했을 것이다. 리누스는 황후가 밟고 서 있는 명분과 힘이라는 두 개의 기둥 중 한 축의 핵심이다. 그리고 어느 쪽 기둥이 약한가를 생각해 보면, 명백히 리누스가 가장 약한 고리다.
오히려 에리히는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사촌이라 그런지 마음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클레어는 더 냉혹해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이유로 너를 용서하려고 노력해 보겠다는 거야. 아니, 그래. 사실 내가 용서하거나 말거나 그리 상관있는 사이도 아니긴 하지.”
클레어는 냉한 무표정으로 말했으나, 리누스는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남이라고 생각해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고 공정하게 생각해 준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운함을 느꼈다. 차라리 클레어가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와 원망으로 펄펄 뛰었다면 훨씬 마음이 만족되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말해 버렸다.
“좋아해.”
“뭐?”
클레어는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너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서 귀를 의심했다.
리누스가 침착한 얼굴이 되었다. 일단 한번 말해 버리고 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 탓이다.
“널 좋아해. 널 원해.”
“너 미쳤니?”
“나도 알아. 미친 거 같은 소리라는 거. 하지만 이제 말 못 할 이유가 없잖아?”
“하.”
클레어가 기가 막힌 숨을 내뱉었다. 리누스는 거의 즐겁기까지 한 기분으로, 그녀의 얼굴이 노기 때문에 달아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집중하여 봐 준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일 줄 몰랐다.
“너 정말 뻔뻔하구나.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한테 그딴 소리를 해?”
클레어가 탁 막혔던 목을 틔우며 겨우 말했다. 그녀의 손이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모욕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체 얼마나 날 우습게 봤으면. 하, 진짜 기가 막혀서.”
리누스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입에 불평불만을 달고 있었어도, 실은 자신이 잔소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자신을 염려하는 것을 확인하고, 떼쓰는 게 어디까지 통하는지 살핀 것이다.
그런 식의 애정을 갈구하는 그에게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처지가 안쓰러운 데다가 비록 친동생은 아닐지언정 에리히가 동생으로 여기는 사촌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허튼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에리히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가 에리히를 조금이라도 형으로 여겼다면, 이런 소리를 할 수는 없는 거였다.
애당초 진짜로 자신을 여자로 보는 것도 아닐 터였다.
“네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어. 돌아가.”
클레어는 싸늘하게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널 모욕하려는 게 아니야, 클레어. 나는 그냥 네게.”
리누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클레어는 손을 홱 피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소파 곁에 서 있던 막시밀리안이 리누스의 손목을 중간에 잡아챘다. 리누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막시밀리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클레어는 그냥 나가려다가 다시 리누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리누스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멈췄다. 열이 어렸던 붉은 눈동자가 당황한 듯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클레어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싸우고 화내는 것도 그럴 만한 상대여야 하는 것이다. 진짜 어린아이라면 어른의 도리로서 감싸 주어야 할 테지만, 리누스는 이미 스무 살이다.
자신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를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실은 훨씬 더 어른이어야 한다. 스무 살이면 성인이며, 하물며 그는 황제의 관을 써야 할 사람이었다. 에리히처럼 황족의 의무 따위를 따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잘못 낳아 잘못 키웠다고 부모를 원망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될 처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조차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클레어는 발걸음을 돌렸다.
리누스가 그녀를 뒤따라오려고 했지만, 막시밀리안이 그의 손목을 쥔 손을 놓기는커녕 악력에 힘을 주었다.
“이거 놔, 아악!”
손목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리누스가 비명을 올렸다. 막시밀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경칭조차 붙이지 않은 채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슈나이더 백작은 이제나저제나 초조한 기분으로 저택 문 앞에 서 있었다. 외출한 리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출입이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계엄군이 바로 인근에 주둔하여 백작저를 감시망 안에 넣고 있다.
비록 전통 있는 로멜의 귀족 가문인 데다가 지금까지 비정치적인 쪽에서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당장은 귀족원의 눈을 의식한 황후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숙청될 것이 분명했다.
‘어리석음의 대가지.’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카탸 슈나이더가 맡았던 여러 가지 지저분한 일 자체도 문제였으나, 자신이 그녀의 장부를 디트마어 람스베르크에게 넘기고 증언까지 하기로 약속했으니, 황후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일 것이다.
계엄령 때문에 의회가 열리지 못해서 그 일 자체는 흐지부지된 것 같은 면이 있었다. 하지만 황후가 그 계획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황후만 문제가 아니다. 시위대도 걱정이었다.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시기다. 실제로 그가 아는 사람 중에도 별장을 털린 사람이 있고, 클라우제너 공작도 죽지 않았던가.
그의 생각을 하면, 백작은 지금도 목이 막히고 눈과 귓속까지 뜨거워졌다. 마음 편히 울지도 못하고 그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셨다.
사람이 죽고 나면 후회만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아내를 단속하라는 그의 충고에 불쾌해했던 것과, 리나가 돌아왔을 때 그가 알면서도 숨겼던 것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 모든 일이 에리히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했던 자잘한 모든 잘못들을 미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명한 아이가 아름다운 소년으로 성장하고, 우아한 남자가 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어른으로서 해 준 일은 아무것도 없이, 오히려 의지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지금도 그랬다. 남겨진 공작 부인과 유복자를 위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리나가 외출하는 것이 이토록 불안하고, 그래서 또 미안했다.
[전 괜찮아요. 편들어 줄 사람이 밖에 많이 있고, 슈나이더 백작 영애라기보다는 벼락출세한 프리마 돈나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요. 그냥 모조리 다 뭉뚱그려서 가십이었으니까요.]
리나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 대담성이 대체 누굴 닮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슈나이더 백작은 생각했다.
드디어 마차가 정문에 도착했다. 슈나이더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리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밟아 내려가 직접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던 리나가 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가 조금 놀랐다.
“아버지.”
그녀의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려 주며 슈나이더 백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찍일찍이 다니지. 피곤하니?”
“네, 조금요.”
“별일 없었고?”
“…….”
리나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슈나이더 백작은 그녀를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외출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으나, 나쁜 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방긋 웃어 보였다.
“별일 없어요. 연극이 부분적으로 오페라를 도입했는데, 아주 훌륭해졌더라고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
“좀 피곤하긴 해서요. 저 쉬러 들어갈게요.”
“그래.”
리나가 그렇게 말하고 제 공간으로 물러서면, 백작은 차마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 안으로 끼어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