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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204/263)

205화

리나는 백작에게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오늘은 그럴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발을 질질 끌고 침실로 돌아가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아팠다.

“아가씨,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아, 부탁해요. 그리고 준비되면 알려만 줘요. 시중은 필요 없어요.”

남의 시중을 받을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리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거기서 스테판을 만날 줄은 몰랐다.

슈나이더 백작가에 들어오기 전부터도 리나는 꾸준히 스테판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페라 극장의 일에 얽혀 구류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구치소에서는 하루 만에 나왔다고 들었다.

초반에는 클라우제너 보안부가 그의 행적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리나가 뭔가를 부탁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살던 집은 정리되었고, 오페라 극장의 개인실에 남은 사물은 버려졌다. 리나는 그것을 챙겨서 창고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스테판이 이쪽 업계에 남아 있다면 결국 누군가와 소식이 닿을 거라고 믿고 여기저기에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 짐을 맡아 가지고 있으니 찾으러 오라고.

하지만 소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여러 애인 중 한 명의 집에 굴러들어 가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나 싶어 막시밀리안에게도 부탁했지만, 수도를 벗어난 것 같다는 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계엄령으로 난리 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갔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그래도 가족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 버리다니.

[착각하지 마. 스테판은 어차피 너 같은 건 그냥 부려 먹기 좋은 하녀로밖에 생각 안 해.]

스테판의 애인에게서 몇 번이나 그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애인들이 하고 있는 종류의 착각은 한 적 없지만, 어쩌면 가족 같은 사이라고 생각한 것 역시 착각일 수도 있겠다고 그녀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그렇게 나타날 줄이야.

[스테판!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구치소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는데, 그 뒤로 소식을 알 수가 없어서…….]

[네가 지금 날 신경 쓸 때냐? 왜 이렇게 쓸데없이 헤집고 다녀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 너, 제정신이야?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지금 시국이 무슨 상황인지도 짐작이 안 가?]

스테판은 그녀를 벽에 때려 박을 기세로 밀쳐놓고 거칠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너같이 못난 건 어디 나오지 말고 조용히 처박혀서 안전하게 남이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으면 된다고!]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애써서 백작가에 밀어 넣어 줬으면 안전하고 편하게 지낼 생각을 해야지, 도대체 무슨 쓸데없는 일에 머리를 디밀고 다니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리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나 스테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너희 아버지와 함께 지금 당장 수도를 떠나. 슈나이더 백작가는 이미 위험한 선을 밟았어.]

[스테판, 너, 황후 폐하의 첩자라는 게 진짜야?]

[빌어먹을. 그런 거에 관심 갖지 말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잖아.]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말이야.]

리나는 그의 팔을 움켜잡고 말했다.

[나랑 같이 가. 그냥 단순히 돈 받고 시키는 일을 하던 거면, 지금 빠져나오는 게 나아. 가능해.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께서 도와주실 거야.]

그가 황후 쪽 사람일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스테판은 무용수다. 그의 어머니도 무용수였고, 아버지 쪽은 일찍 돌아가셔서 만난 적은 없지만 역시 무용수였다고 들었다.

황후 같은 사람이 그런 상대를 중하게 쓸 리 없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리나도 스테판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귀족의 정부나 애인으로 저택에 드나들기도 하고, 호화롭고 방탕한 파티를 열어 약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스테판 아래에 있던 무용수들은 그의 연줄을 통해 ‘후원자’를 잡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아마 그들도 대부분 황후의 정보원이었으리라.

그런 말단이라면 괜찮다. 그들은 오페라 극장이 망하자 대부분 흩어져 제 갈 길을 찾았다. 아마도 조직이 그들을 찾는 일은 더 이상 없으리라. 하지만 스테판이 조금이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스테판은 그녀의 걱정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금 내가 그게 제일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았냐? 내가 할 말이야. 공작 부인이 하는 일에서 손을 떼. 너 지금 공작 부인에게 마차도 빌려주고 있지? 미친 짓에도 정도가 있지. 여차하면 다 네가 뒤집어쓴다.]

[클레어 님은 그러실 분 아니야. 나한테는 은인이시기도 하고. 옳은 일이 아니라도 꼭 필요하시다고 하면 도와드려야 마땅한데, 심지어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하시는걸.]

[은인은 무슨. 공작 부인도 다 이익이 있으니까 한 일이지.]

스테판이 코웃음을 쳤다.

[애당초 슈나이더 백작의 딸이라는 건 그냥 네가 제자리를 찾은 것이고, 공작 부인이 그 과정을 도와준 건 당연한 거야. 목숨까지 구해 줬는데 그것도 안 해 주면, 그게 사람이냐?]

[스테판.]

[그 과정에서 꼴 보기 싫은 이리스를 쫓아냈으니, 공작 부인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였지. 거기다가 다이아몬드 모델이니 뭐니 하는 것은 전부 공작 부인이 너를 이용한 건데, 속도 없이.]

철썩!

리나의 손이 거침없이 스테판의 뺨으로 날아갔다. 스테판은 빨개진 뺨을 손으로 감싸고 시뻘겋게 화난 눈으로 리나를 노려보았다.

[이용해?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있니?]

[리나, 나 지금 화나기 직전이다.]

스테판이 이를 뿌득뿌득 갈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리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너, 내가 슈나이더 백작님의 딸인 거 알고 있었지?]

[…….]

[언제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아니면, 수도에 왔을 때부터? 이리스 양이랑 아는 사이가 되었을 때도? 너 사실은 카탸 부인이랑도 아는 사이였지? 경쟁자였잖아?]

리나가 쏟아 내듯 소리쳤다.

[나한테 그날 지하실에 물건 갖다 놓으라고 한 것도 너였어. 별것도 아닌 일을 시켜서 계속 무대 뒤랑 출입구 사이를 오가게 한 건 아무 의도도 없는 일이었니? 그날 클레어 님을 불러들인 건 너였다며?]

[도대체.]

[근데 내가 알기로 그날 너는 오페라 극장에 아예 있지도 않았거든. 네가 클레어 님을 함정에 빠뜨렸잖아!]

그 순간 스테판이 다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손이 마치 등을 애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쓸어내렸다가 후드를 끌어 올려 리나의 화사한 금발을 가렸다.

입술이 리나의 입가에 닿았다. ‘가만히’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가 그대로 몇 걸음 옆으로 옮겨서 복도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리나는 깜짝 놀라서 얼었다. 곧 복도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밖으로 나갔다.

몇몇은 흩어져 제집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대로 무리를 이루어 골목을 함께 걸어갔다. 시위대에 합류하러 가는 건지, 아니면 그냥 감정의 격동을 조금 더 연장하려는 것뿐인지는 불분명했다.

사람이 모두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스테판은 리나의 몸에서 손을 뗐다. 숨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면서도 리나는 달아오른 뺨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홱 밀쳤다.

스테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뭘 했든 상관없잖아. 어쨌든 가족 전부 데리고 여기를 떠나. 너희 영지도 불안하니, 하츠펠트 후작령이나 후겐베르크 백작령으로 가는 게 좋겠어. 가서 조용히 있으면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소식 한마디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응, 알았어’ 하고 네 말대로 할 것 같니?]

말하면서도 리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스테판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것이다.

스테판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누그러진 얼굴로 리나를 쳐다보았다.

[겁이 없어졌네.]

[지금 비꼬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겁먹어야 해?]

[아니. 넌 원래 겁이 없긴 했지.]

스테판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리고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리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런 거 알 필요 없어. 아무튼 이거만 있으면 수도를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가능한 한 빨리 떠나. 미친 사람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위험하다면, 너부터 수도를 떠나야지. 슈나이더 백작가는 어차피 클라우제너 공작가와는 떼어 놓기 어려워. 아버지가 선대 공작님과 친분이 깊었던 걸 생각하면, 끝까지 의심을 피할 수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너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떠날 준비나 해. 나는 어차피 못 떠나. 황후가 살려 두지 않을 테니.]

[스테판!]

그녀는 소리쳤지만, 스테판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 자리를 훌쩍 떠났다.

리나는 마차 안에서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우구스타가 친필로 쓴 통행증과 정식 직인이 찍힌 위조 신분증이었다.

‘스테판,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야.’

리나는 봉투를 움켜쥔 채 절박하게 생각했다. 이걸 클레어에게 말해야 좋을지 아닐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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