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오래된 석조 복도가 가스등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로버 탑은 감옥이지만, 제법 청결이 유지되어 있었다. 정치범이 주로 수용되는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다시 말해 오랫동안 귀족의 감옥으로 쓰였다는 말이고, 또 다른 말로는 간수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머무는 장소라는 뜻이기도 했다.
디트마어는 반대 방향에 있는 진짜 감옥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알고 있었기에 불편한 기분으로 간수를 따라 복도를 밟았다. 좀도둑, 살인범, 또는 종종 가난한 자들이 갇히는 감옥은 지하에 있는 옛날 감옥을 그대로 쓰는 곳이 많다. 대체로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났으며 바닥이 오물로 질척거리게 마련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비록 썰렁하고 삭막했으나 잘 관리된 곳이었다.
“가스등 냄새가 나는군.”
그는 좀처럼 의식한 적 없는 것을 깨닫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스등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실제로는 몇 번 만나지도 않은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가스등 냄새를 몹시 싫어하는 것이 인상에 박힌 듯했다.
간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가스등까지 밝혀 놓고 있을 수 있는 건 대단한 특권이다. 그는 디트마어가 흠을 잡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곧 목적하던 자리에 닿았다. 간수가 철창의 잠금을 풀어 놓고 자리를 떴다. 디트마어는 철창문을 열고 손님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하비흐 경.”
“잠깐만, 지금 기가 막힌 마무리 문장이 떠올라서.”
울리히 하비흐는 감옥 안에 놓인 작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살은 홀쭉 빠져 있었으나 기분은 좋아 보였기에 디트마어는 기가 막힌 채 그를 쳐다보았다.
‘걱정했더니.’
그가 투옥된 것은 보름 전의 일이다.
무모하게도 연설회를 의사당 앞에서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연설 내용 그 자체보다도 ‘하원 의원이 연설회를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계엄령이 내려진 데다가 황후가 찾는 자 중 하나였으니, 붙잡혀 가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디트마어는 그때 울리히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옛날에는 권력에 눈먼 부나방이라 생각하고 경멸했고, 클레어의 청문회 뒤로는 고마운 협력자이니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기회주의자라고 여겼으나, 이제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하원 의원의 연설권과 불체포 특권은 절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울리히의 신념은, 이유 자체는 다를지언정 디트마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고 생각했었지만, 하는 것을 보면 역시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은 아니다.
“회고록을 쓰는 건가?”
“비슷해. 지금이 내 정치 인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으니. 경에게 지금 맡겨야 가지고 나가서 인쇄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역시 잘 맞지 않았다. 디트마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명성을 위해 선행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왕이면 신념을 가지고 이렇게 해 준다면 얼마나 고마울 것인가.
[어떤 마음인지는 이해하지만, 디트마어 경 같은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저를 포함해서 세상 사람은 대다수가 속물 아니겠어요? 제가 경을 존경하는 이유도 그것이지요.]
클레어조차도 그렇게 말했다. 그는 딱히 자신이 대단한 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자신을 존경한다는 말에 기쁨과 부담감을 함께 느꼈었다.
울리히가 마침표를 찍고 펜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일어서서 디트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와 줘서 고맙네.”
디트마어는 그 손을 맞잡아 악수를 했다. 울리히가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자신은 침대에 앉았다.
“그런데, 괜찮은 건가? 경이야말로 계엄군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텐데.”
“뇌물을 좀 썼지. 협력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공작 부인께서?”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의 소식이 전해진 뒤로 공작 부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셔. 병문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슈나이더 백작 영애를 통해서 정중한 거절의 인사만 받았다네.”
“경이 지금 남을 방문할 생각을 하다니.”
울리히의 타박을 듣고 디트마어는 입꼬리를 경련시켰다. 투옥을 작정하고 의사당 앞에서 연설회를 열었던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공개적으로 방문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도움을 청하거나 해서 부담을 드리려는 것도 아닌데. 아니, 물론 방문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러니까 그냥 말만 해 본 거야.”
“그렇구만.”
“…….”
“그럴 수 있지.”
디트마어는 어쩐지 놀림을 당한 기분이라 괜히 떨떠름해졌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가 일어섰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전하겠네. 원고는 이리 줘. 꼭 전달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알려 주고.”
“아니 아니, 이 사람, 내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화를 내고 그래? 잉크도 아직 안 말랐는데.”
울리히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경쾌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감옥에 있는 동안 고독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바깥소식도 궁금하고.
디트마어도 진짜로 바로 떠날 작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도로 자리에 앉았다. 울리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떠본 거였어? 와, 경도 많이 변했군.”
“나쁜 상황에 놓여 있을까 봐 어렵게 찾아온 건데, 그냥 봐도 괜찮아 보이는걸. 원고를 쓸 정도의 여력이 있다면 됐어.”
“서운하게.”
“서운할 건 또 뭐 있나? 아, 경에 대한 평판이 요즘 어떤지 궁금하겠군.”
울리히가 싱글싱글 웃었다. 디트마어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바라던 대로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지. 지금 경을 구하기 위해 그로버 탑을 부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서, 말리는 게 쉽지 않아.”
사실상 그가 막고 있지 않는다면, 시위대는 금세 반군으로 화할 것이다. 울리히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으므로 염려스럽게 물었다.
“경은 어떻게 할 작정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계엄군과 대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닌가?”
“봉기를 하더라도 국상일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날은 군의 배치도 어느 정도 명확하고, 집회 금지도 불가능할 테니까. 적어도 황후나 황자 중 한 사람을 잡아야만 끝날 일인데, 희생만 생기고 실패할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지.”
“그게 잡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 전에 군 병력이 보충될 것도 생각해야지. 또, 황자를 잡으면 어떻게 할 건데? 목을 칠 건가? 그래서는 의회가 아니라 반란군이야.”
“나도 알아. 현실적으로 어렵겠지.”
디트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민의 편에 선 하원 의원들은 공화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디트마어 자신도 그게 낫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랬을 때 귀족원의 반발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황후파에 선 귀족들을 전부 제거한다고 해도, 결국 다른 특권 세력이 커지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특히나 지금 남방군을 막고 있는 아렌 공왕과 아렌 영주들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단순히 세력 다툼만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공화정은 오랫동안 이론으로만 존재해 왔다. 황제가 아무리 지금까지 존재감이 없었다고 해도, 국상의 관이 나가면 그 앞에서 통곡할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암살당한 황태자의 일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제 자식도 아닌 황태자를 위해 눈물짓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제국민 대다수는 황실을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황실을 제멋대로 하려는 황후를 미워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뿌리 뽑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극히 적다. 애정과 충심을 가진 사람이 아직 많이 있었다. 황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구조적 문제는 드러난 일이 없었다.
“역시 빅토리아 대공을 모시는 게 제일 무난하게 수습되겠지.”
“나는 경이 좀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할 줄 알았는데. 피를 흘려야 그 토양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법이야.”
“경은 그러고 싶은가?”
“아니, 내 이야기는 아니지. 하긴, 누군가 한 명이 굳게 마음먹고 황실의 자손을 전부 숙청해 버릴 거라면 모르겠지만,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있는데 누가 감히.”
그녀에게 배 속의 아이를 내놓으라고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제 앞에 있는 디트마어부터 막으려 하리라.
디트마어가 문득 말했다.
“가스등 냄새가 심하지 않나?”
“그런가? 나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별로…….”
말하다 말고 울리히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디트마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철창문을 걷어차듯 열었다.
“이리 나오게!”
“뭐?”
“아무래도 불안해!”
그가 말한 순간이었다.
펑!
폭발음이 들렸다. 복도 반대편 끝에 있는 계단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가스등이 터진 것이다. 아니, 가스를 주입해서 터뜨린 게 분명했다.
그로버 탑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스테판은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로버 탑이 보이는 작은 광장에 모여 있던 군중이 웅성거렸다.
‘리나가 피했어야 하는데.’
슈나이더 백작가가 피신했다는 소식은 아직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더 늦출 수는 없었다. 국상일이 되면 늦어 버린다.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물었다.
“스테판, 시작할까?”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앞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