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1화
봄비가 떨어질 때마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서 황토색 먼지가 가라앉았다. 뾰족뾰족 고개를 내민 새순들이 물기를 받고 연두색 냄새를 피워 올렸다.
어디엔가 다 핀 꽃나무가 있는지, 향기가 풀 냄새에 섞여 번지듯 공기 중에 머물러 있었다. 에리히는 걷다 말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을 하늘로 펼쳤다. 하늘에는 해가 떠 있었지만, 손바닥에 빗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그는 우산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차에서 막 내렸을 때는 이슬비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빗방울이 가늘어서, 보좌관이 우산을 받치고 뒤따르려는 것을 거절했다. 혼자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오늘은 가문의 문장이 박힌 마차를 타고 왔기에 공연히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다. 아첨꾼이든, 아니면 학생의 본분에 대해 자신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외워 반박하는 후배든.
특히나 후자 말이다.
“곤란하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는 사이에 이슬비는 가랑비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재 건물이 보이는 자리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문 앞에 있는 조그마한 차양 밑에서 낯익은 적갈색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클레어 델포드.
그는 잠깐 불편하게 그 이름을 떠올렸다.
영민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마음에 들어 해야 마땅하건만 왜 이리 짜증이 나는지 모를 일이다. 걷는 동안 간신히 차분해졌던 머릿속 어딘가가 들쑤셔진 듯이 어지러워졌다.
돌아갈까.
비 때문에 코트가 젖겠지만, 그게 뭐 중요한 일은 아니다. 돌아서서 세 블록만 가면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 빌린 책은 나중에 돌려주러 와도 되고, 심부름꾼을 시켜도 된다.
어차피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밀러 교수의 연구실에 드나드는 것은 단순히 학업이나 학연 때문이 아니라, 밀러 교수에게 힘을 실어 준다는 의미가 더욱 컸다. 그것은 부친인 프란츠 클라우제너 공작의 뜻이기도 했고, 그 자신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바였다.
그렇다 해도, 연구실에 다니는 것이 최근에 즐겁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 서재에 다니는 것도.
아니, 또 어찌 보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신경질이 치솟거나 화나는 일도 너무 많아 그는 최근에 스스로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하늘이 급속도로 어두워지면서 후두둑 빗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단번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
차양 밑에 서 있던 소녀가 그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이 짜증 나서 에리히는 마주 인상을 썼다.
“들어가지 않고 왜 여기 서 있지?”
“열쇠가 없어요.”
클레어가 대답했다.
“윌이 와 있을 줄 알았는데, 와 보니 잠겨 있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열쇠를 미리 받아 뒀어야 했는데.”
“…….”
“각하는 열쇠 없어요?”
“없어.”
벌써 몇 번이나 정정했는데도 클레어가 각하라고 불렀기에 에리히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클레어는 그의 경고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예쁜 입술을 삐죽대며 쫑알거렸다.
“하나 복사해 놓지.”
“자기 열쇠를 가진 건 교수님의 조수뿐이야.”
“나도 알아요. 어차피 공용 열쇠 하나로 이 사람 저 사람 돌려쓰는데 하나 더 만들면 어때서? 각하가 하나 갖고 있겠다고 하시면,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않을걸요?”
‘감히’라는 단어에 강조가 들어 있었다. 물론 클레어가 이렇게 말할 때 그런 강조는 아첨이나 송구함의 표시가 아니라 빈정거림이다. 에리히는 확 짜증이 치솟아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고작해야 그런 일로 특권을 휘두를 사람처럼 보이느냐는 말까지는 너무 구차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쏴아아.
만일에 장대처럼 순식간에 거세진 비가 의식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면, 그는 별 이유도 없이 화를 냈을 것이다.
클레어가 치맛자락을 끌어당겼지만, 발목이 보이는 승마용 드레스가 벌써 종아리까지 젖어 있었다. 에리히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쪽에 세우고 자신이 바깥쪽에 섰다. 이건 어디까지나 매너 차원의 일이다.
작년에는 키가 작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장기인 건지 올해는 제법 자라서 머리가 자신의 가슴까지 왔다.
차양 밖으로 나간 코트의 어깨 부분이 금세 젖어 안쪽까지 축축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것보다 높이 올려 묶은 클레어의 머리칼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칼 뿌리 쪽이 벨벳 실 같은 붉은색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굳이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는 시선을 떼려고 애를 쓰며 숨을 들이마셨지만,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걸어올 때부터 공기 중에 머물러 있던 달콤한 꽃향기가 비 냄새를 뚫고 문득 폐 속까지 들어왔다.
“왜요?”
그가 침묵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듯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니, 뭘?”
“말꼬리 잡지 마세요. 방금 나한테 뭐라고 한 소리 하려고 했었잖아요.”
그랬다. 에리히는 그녀에게 빈정거리지 말라고 화를 내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빗소리에 쓸려 간 듯 이미 그럴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그조차도 낯설었다. 그렇게 가라앉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면 애초부터 화를 내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그것을 깨닫자 자기 자신에게도, 클레어에게도 짜증이 났다.
별 이유도 없이 초조해진다. 그는 셔츠가 목을 지나치게 죄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타이를 살짝 헐겁게 했지만, 별로 편해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 채로 그는 팔짱을 끼었다.
“그나저나 넌 또 승마 수업을 빼먹은 모양이군.”
“끝나고 왔을 수도 있죠.”
“네가 행여나.”
“남이사.”
“커리큘럼에는 다 의미가 있는 거다.”
“승마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운동이 되기는 하겠지만, 결국 어른 되고 나면 오히려 밖에서는 타지 말라고 하는걸.”
그 말에는 에리히도 대꾸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귀족이라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당연히 말 정도는 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말을 타고 다니는 귀부인은 극히 드물었다.
“넌 거의 대여 마차를 타고 다니지 않았나?”
“마차가 없으면 말을 타라고요? 이게 무슨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것 같은 소리예요? 수도에서 마구간을 운용할 능력이 없으면, 마차만이 아니라 말도 못 타고 다녀요.”
클레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가 할 말을 앞질러서 반박했다. 에리히는 이번에는 타격감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마구간을 운용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말을 못 타서 안 타는 거겠지. 네 운동 신경을 생각하면.”
“…….”
“작년에 낙제해서 올해 다시 듣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응? 속보도 제대로 못한다며.”
“……그거 윌이 말했어요?”
“네 입으로 말했었잖아. 말이 널 우습게 보는 것 같다고.”
대체 얼마나 못하면 아카데미 마장의 승마용 말이 얕보겠느냐고 비웃어 주었더랬다.
“아니, 참. 탈 기회가 별로 없어서 못 타는 거라고요.”
클레어가 툴툴거렸다. 에리히는 무표정을 고수하는 것을 잊고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마구간에 온순한 승용마가 있었다. 굳이 호흡 맞추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속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클레어가 눈을 흘겼다. 그가 웃은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근데 안 바빠요?”
“남이야 바쁘든 말든.”
“특별한 일도 없는데 이런 데까지 오니까 궁금해서 그러죠. 공작가의 일은 안 하세요? 내년에 졸업이잖아요. 보통 후계자가 그 정도 되면 실무 수업을 하러 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버지께서 건재하신데 내가 굳이 일찍부터 실무를 하러 다닐 필요는 없지.”
“흠.”
“뭐가 흠이야? 실무를 하는 건 오히려 네 쪽이 아닌가?”
“델포드 남작령은 콩알만 해서 실무고 뭐고 없어요. 그냥 우리 식구 가계부 쓰는 거죠. 있는 거라고는 조그만 논밭뿐인걸요.”
“조그만 논밭밖에 없는 집의 가계부를 쓰는 걸 보고 밀러 교수님이 널 억지로 끌어들였다고?”
에리히는 코웃음을 쳤다.
“제대로 공부해. 귀족이 가진 재능을 썩히는 것도 의무를 방기하는 일이야.”
“잔소리가 하고 싶으면 돈 주세요. 한 번에 1만 골드씩.”
“클레어.”
“거액의 장학금을 일시불로 쾌척한 다음, 아카데미 교수 자리나 내각의 각료 자리를 마련해 주셔도 괜찮고. 그 정도면 코피 터뜨려 가며 열심히 공부할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안 되는 줄 알면, 남의 인생, 상관 말아 주실래요?”
클레어가 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 닥치라는 소리를 하는 건데, 시선이 그 손과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에리히는 그 이유를 분노에서 찾았다. 속이 화르르 불타는 듯이 끓고, 발밑이 흔들거려서 그는 공연히 그 자리에서 몇 걸음 제자리걸음을 했다.
클레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도 알고 있다. 여자가, 그것도 귀족가의 숙녀가 교수가 되거나 각료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남작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상속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직계의 혈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능력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내던진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클레어가 말하는 방식이 유난히 자신의 신경을 건드려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