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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2화 (207/263)

봄비 2화

잠시 차양 아래 적막함이 고여 들었다. 비는 멎을 기미가 없었다. 그나마 날이 풀려 따뜻한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제 손으로 몸을 감쌌다. 에리히는 힐끗 그것을 보았다. 입술은 여전히 보드라운 붉은색이었지만, 뺨이 파리한 것 같기도 했다.

“추워?”

“조금요.”

“참아.”

벗어 주고 싶어도, 코트는 이미 젖어 있었다. 처음에는 재킷을 줄까 했지만, 셔츠까지 축축한 것을 보니 아마 재킷도 별 소용이 없는 상태일 것이다. 사실 약간 땀이 났기 때문에, 얇은 셔츠 바로 위에 입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건네는 것도 꺼려졌고.

클레어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참고 있어요. 먼저 물어봐 놓고 그게 할 소리예요?”

“…….”

“나 참.”

클레어가 바깥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에리히의 팔이 거의 다 밖으로 나가 있는 것을 알고는 놀랐다.

“좀 이쪽으로 와요. 다 젖었잖아요.”

그녀가 치맛자락을 정돈하여 공간을 만들며 에리히를 끌어당겼다. 에리히는 움직이지 않고 버텼다. 차양 밑에 몸을 완전히 넣으려면 거의 어깨를 붙일 정도로 가까이 서야 한다. 그건 곤란했다.

“됐어. 나는 춥지도 않은데.”

“그러다가 감기 걸려요.”

“…….”

“뭐 해요? 나랑은 붙어 서 있는 것도 싫어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에리히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차라리 에스코트를 했으면 했지, 이렇게 부적절한 거리에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습기 탓인지 옆에 선 사람의 온기가 유난히 신경 쓰였다. 오늘따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향기를 풍겼고, 그건 옆에 서 있는 소녀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습기 냄새에 가슴이 계속해서 울렁거리는 탓인지, 불쾌감이 없어졌어도 불편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위가 습한 탓에 오히려 몸 안은 마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갈증이 났다.

“호화로운 마차 놔두고 뭐 하러 걸어왔어요? 그거 있었으면 좀 얻어 타고 갈 건데. 보좌관이랑 호위는 또 어디다 버리고.”

클레어가 타박했다. 에리히는 세 블록 건너에 자신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그걸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달려가면 5분이면 충분했고, 가서 보좌관을 시켜 다른 마차로 클레어를 데려다주게 하면 될 테지만…….

그가 불분명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클레어가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밀러 교수님도 정말 너무하시다니까. 원래 대학원생이 무급 노예의 다른 말이라지만, 학부생은 좀 봐줘도 되는 거 아닌가? 여기까지 오가게 해서 이렇게 빗속에 가둬 두다니.”

“넌 대학원생이 아니고, 무급 노예라는 말도 틀렸어. 노예는 원래 급료를 받지 않아.”

그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나도 알아요. 각하는 꼭 그렇게 트집을 잡아야 해요? 굳이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으면서 그래.”

“그렇게 부르는 것 좀 그만해. 나는 각하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되나?”

“뭐라고 부르든 그게 뭐가 중요해요? 각하든, 소공작님이든, 백작님이든, 다 같은 말인데.”

“같은 말이라니?”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범접할 수 없이 높은 분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다는 뜻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존경은 무슨. 너는 비꼬려고 그러는 거잖아.”

“풍자당하는 건 높으신 분의 운명이니 참으세요.”

“빈정거리지 마. 네 말마따나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존경받는 건 부당하지만, 그것만으로 조롱당할 이유도 없어.”

클레어가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 속에 고인 금편 같은 반짝임과 마주쳐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고 고개를 돌렸다. 자칫하면 손을 뻗을 뻔했기 때문에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미안해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에리히는 짧게 대답하며 빗줄기를 노려보았다. 감정의 요동을 다스리려고 했지만, 자제력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클레어도 곧 시선을 돌려 나란히 바깥만 바라보았다. 비는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날씨라면, 게으른 윌리엄 프레스콧은 결석 처리가 되더라도 절대 여기까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학점과 관계없는 일이니까.

역시 마차까지 뛰어가야겠다고 에리히가 생각했을 때, 클레어가 호칭을 고쳐 다시 불렀다.

“백작님.”

“왜? 또 내 신경을 건드리고 싶어? 방금 네가 이거나 그거나 다 똑같은 의미라고 하지 않았나?”

“예법대로 불러 드리겠다는 뜻인데요. 그러라고 했었잖아요. 아니면, 뭐라고 해요?”

“……그냥 이름 불러.”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자신이 이 문제를 꽤나 전부터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클레어의 말이 옳다. 작위명에는 결국 상하의 계급을 확인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그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클레어는 말의 배경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은 아마도 그 부름에 내포된 의미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의 큰 결정이 무색하게도, 클레어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저한테 너무 가혹한데요.”

“처음에는 대담하게 부르더니.”

그는 눈썹을 치켜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겁이 나서 부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 테고,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닌 주제에.”

“뭐, 비교적 그렇긴 한데.”

클레어가 웬일로 수그러든 태도로 모호하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서로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건 나더러 널 델포드 남작이라고 불러 달라는 뜻인가?”

“아, 그건 진짜 좀 오그라드네요.”

클레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너무 눈에 띄고 싶지 않아요. 안 그래도 여자가 연구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는데.”

“네 말마따나 연구생으로 이미 눈에 띄고 있는 마당에, 밀러 교수님의 연구실에 드나들고 있는 나와 아는 사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 같군.”

“그 말도 맞긴 한데요. 밀러 교수님한테는 원래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까.”

그 말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에리히는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네가 이렇게 나를 태연자약하게 대하는 것부터가 평범한 일은 아니지.”

“별로 태연하게 대하고 있지 못한데요. 남들이랑 의식하고 있는 부분이 다를 뿐이지요. 본인이 평범하다거나 존재감 없다고는 절대 생각 안 하실 텐데.”

클레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에리히는 그녀가 의식하고 있다는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부연 설명은 없었다. 적어도 작위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나를 이렇게까지 짜증 내 하는 건 너밖에 없긴 하지.”

“보통은 짜증 나도 말 못 하죠, 감히?”

‘감히’라는 단어가 또 나왔다. 에리히는 또다시 눈썹을 치켜들었다.

“알았어요. 그러면…… 선배님.”

클레어가 말했다.

“관계 면에서 볼 때, 이게 제일 중립적이죠.”

“……그건 그렇군.”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긴 했으나 납득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됐어.”

클레어가 미소를 머금었다. 고운 다홍색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것에 시선이 닿은 순간, 에리히는 결국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고 말았다.

툭.

들고 있던 가방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딱히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문과 그의 몸 사이에 갇힌 클레어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혀끝이 뻣뻣하게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얄미운 입술과 금편이 박힌 듯한 눈동자에서 시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당황해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리고 클레어가 입을 열기 전에 할 수 있는 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를 불러오는 게 낫겠군. 여기 있어.”

“……이 비를 맞고요?”

몸이 홧홧하게 더우니 비를 좀 맞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코트와 재킷을 한꺼번에 벗어 클레어의 머리 위로 던지고,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자리를 피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클레어가 추운 것처럼 떨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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