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평민들 사이에 사람을 심고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 것이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다면, 델포드 남작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황후가 시민들 사이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은 타블로이드지로 쏠쏠한 재미를 봤지만 그 타블로이드지가 생성된 배경에는 황후가 있었다.
그녀는 이리스 이전에도 연극과 공연 문화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한때 스테판이 소속되어 있었던 무용단을 만든 것도 그녀가 한 일이다.
귀족과 자산가, 정치인을 대상으로 은밀한 모임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소문을 새어 나가게 하여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도 그녀가 했던 일이다.
시민들이 정치나 과학, 그 밖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귀족과 황실에 대해서 떠드는 것보다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한 다른 분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이야기를 클레어가 듣는다면 황후가 자기 무덤을 팠다고 말할 것이다.
문화는 마음을 성장시키고 교양과 지적 능력에 관여하며, 추문은 신비감을 해소시킨다.
어차피 황족이니 귀족이니 해 봐야 진짜 푸른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지하면 태생만으로 상대를 존경하고 숭배할 수 없게 된다.
혈통에 통치권을 결부시키려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직 거기까지 이해하지 못한 스테판은 자신의 사고의 한계 안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결국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면 황후는 패배할 수밖에 없어.’
황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작용할지 스테판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딱히 국부로 섬기던 게 아니라도 시민 대다수는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감정이 촉발된 상태였다.
연극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가여운 황태자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국상까지 지금처럼 애매한 상태로 질질 끌다가 황제가 살아 돌아오면 끝장난다. 그 상태에서 반역이 선언되면 황후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
황후는 너무 오랫동안 싸워 왔기에 적의 수장 말고는 머릿속에서 지워 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연극의 주인공이 대적자를 물리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이 중요하듯, 이 싸움도 결국 다스려야 될 제국민을 손에 넣지 못하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면 황후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계속해서 폭동을 밀어 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려고 해도 그것은 일단 군대를 확고하게 손에 넣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황제가 살아 있는 이상, 그게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황후는 황태자가 살아 있을 때 훨씬 예리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퍽 둔감했으며, 타성에 젖은 듯 선뜻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다.
그녀는 이제 도전자가 아니라 수성하는 자였다. 손
에 쥔 것을 아까워하긴 해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각오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니, 그것이 그녀에게 긴장감을 유지시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먼저 터뜨린다. 국상을 치르고 리누스가 즉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끝마무리로 즉위식을 치러야 한다.
그래야만.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을 테니.’
아니. 자신이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스테판은 알고 있었다.
그는 아직 황후를 믿고 있었다. 신뢰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말이다.
일이 터지면, 황후는 결단을 내릴 것이다.
그녀는 지금 로멜 끝부터 수도 아래의 중남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의 행정권과 수도 인근의 군 병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판 자신도 결단했다.
국상일의 총궐기로 황후가 끌어내려지거나, 황제나 클라우제너 공작이 돌아와 복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황후의 최후가 어떻게 되든, 제 손으로 하지 않은 것은 복수가 아니다.
“이대로 두면 하비흐 의원이 죽을 거야!”
“디트마어 경이 저 안에 있어요!”
그가 풀어놓은 바람잡이들이 여기저기에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흥분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구해야 합니다!”
스테판은 거기에 유언비어 몇 마디를 흘렸다.
“이거 황후가 하비흐 의원을 죽이려고 그런 거 아니야? 디트마어 람스베르크 경도 함께 있었으면, 한 번 저질러서 둘을 해치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거잖아.”
그 말은 군중 속으로 삽시간에 흡수되었다.
안 그래도 울리히는 지금 시민권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가 의사당 앞에서 끌려갔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하원 의원의 연설권과 불체포 특권에 대해 주장하다가 끌려갔기 때문에 지금 하원도 동시에 시민권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그가 부당하게 살해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군중은 분노했다.
큰불이 이미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하물며 폭음까지 터져서 순식간에 거리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울리히! 울리히!”
외쳐 부르는 소리가 점차 하나의 울림이 되었다. 그리고 이내 구호가 되었다.
“울리히!”
“그로버 탑을 부수고 의인을 구하자!”
화재에 쫓겨 뛰쳐나오던 수비대와 간수들이 출입문 앞에서 성난 군중과 마주쳐 움찔했다.
“으아악!”
노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간수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군중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탕!
다음 순간, 겁에 질린 수비대가 발포했다.
한순간 세상이 정적 같은 충격에 묻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계엄군의 총 앞에 선 시위대처럼 흩어져 달아나지 않았다. 분노가 임계점을 넘은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간수의 울부짖음과 총소리가 온통 허공에 불꽃처럼 터졌다.
스테판은 흐름에 휩쓸리지 않은 채 군중이 폭도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강가에 서서 적의 시체가 떠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참을 수는 없었다.
황후가 손에 묻혀 온 수많은 오물 중에 자신의 것은 그저 평범한 축에 속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남에게 그녀를 넘겨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을 위해서 참아 왔으니까.’
황후의 개가 되어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 그녀의 돈과 힘으로 자신의 세력을 늘리고, 마침내는 검은 연꽃 조직의 일부가 자신의 말과 황후의 명령을 구별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뻗었다. 스테판은 반사적으로 상대를 밀치며 품에서 권총을 꺼내려 했다.
그랬다가 그는 기겁하여 숨을 들이마셨다. 후드가 벗겨지며 리나의 금빛 머리칼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는 사납게 소리쳤다.
“여기서 또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할 소리야!”
리나가 그에게 맞서서 언성을 높였다.
50. 감옥이 부서지는 날
그로버 탑 앞의 군중 속에는 사실 무어 공작도 있었다.
그녀는 하녀의 옷을 빌려 입고 호위 한 명만 거느린 채 남몰래 암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후의 눈을 피해 공왕궁을 빠져나온 이래 계속해서 평민들 틈에 섞여 생활해 왔으므로, 이번 일을 위해 특별히 암행한 것은 아니었다.
움직일 수 없는 클레어 대신 디트마어가 울리히를 면회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준 것도 그녀였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카우츠키 경, 이걸 대체!”
그녀는 사람들에게 쓸려 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면서 아는 얼굴을 향해 필사적으로 다가갔다.
집회에 참석하고 있던 하원 의원 카우츠키는 자신에게 손을 뻗는 무어 공작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며 소리쳤다.
“각하!”
“이를 어찌하나!”
각하라는 외침에 호위가 한순간 긴장했지만, 카우츠키나 무어 공작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카우츠키가 염려스럽게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몸을 피하십시오!”
“내가 문제가 아닐세. 이걸 대체 어떻게…….”
탕, 타당!
연이어 총성이 들려왔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디트마어와 울리히를 생각하더라도, 지금 폭동을 일으켜 수비대와 싸울 것이 아니라 진정하고 탑의 화재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흥분과 광기에 빠진 군중을 장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카우츠키 말고도 하원 의원이 몇 사람 나와 있었지만, 그 누구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총성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무기를 가진 시민들이 자신의 무기를 꺼내거나 집에서 가져와 이내 시가전이 되었다.
불타오르는 탑을 뒤에 둔 수비대가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앞으로 진격하지도 못한 채 공포에 질렸다.
누군가가 사다리를 가져다가 감옥의 높은 벽에 걸었다.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는데, 이번 것은 가스 폭발이 아니었다. 화약이다. 공사용으로 쓰는 것일 테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울리히! 울리히!”
구호처럼 그 이름이 불렸다.
무어 공작은 파랗게 질렸다. 호위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저들은 대책도 없이 화재 속으로 들어갈 작정인가?!”
“각하께서 지금 어떻게 하실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은 뒷일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호위는 그녀를 들쳐 업었다. 무어 공작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때 리누스는 세 명의 친위사단장을 접견하고 있었다.
수도와 그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친위사단 3개는 제국군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인 부대였다.
장부상의 숫자는 북방군이나 남방군보다 적을지 몰라도, 훈련 상태나 장비를 감안하면 결코 그보다 약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친위사단장과 참모진을 비롯하여 그 밑의 고급 지휘관 대부분이 에른스트 출신이거나 그 도움으로 출세한 자들이다.
그 밑으로도, 대부분이 황후에게서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에른스트 출신의 황후파가 아니면, 군에서 출세할 수 없다. 이것이 황후가 가장 믿고 있는 힘이다.
클라우제너가 돈으로 성채를 쌓아 올리는 동안 에른스트는 무기로 요새를 만들었다.
‘어째서 그냥 힘으로 뒤엎지 않았을까? 이 정도라면, 암살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리누스는 손등에 키스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드디어 만나 뵙게 되는군요.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장성하신 모습을 뵈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아주 훤칠해지셨습니다.”
세 사람이 돌아가며 상찬했다. 리누스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내가 어지러웠으나, 할 일은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