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가 분명해-216화 (217/263)

#216화

이때 황후는 친위사단 주둔지로 향하는 마차 안에 있었다.

황궁에서는 상황실을 만든다 해도 빠르게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급박한 것은 북방군 쪽의 상황이다.

북방군 별동대가 수도 북쪽의 역으로 들어오는 철로 중 네 개를 폭파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황후는 혼란에 빠졌다.

기차역을 확보할 작정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중앙역으로 들어올 작정이니 그쪽 철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황제와 아이는 어쩔 작정인 걸까? 결국 수도로 데려오긴 해야 할 텐데, 그들이 도보로 진군하는 북방군 본대와 함께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실상 주력 부대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북방군 일부를 호위군으로 쓸 것인가? 하지만 이것도 주력 부대를 갈라야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선택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차로 오리라 생각했다.

황후가 지금까지 철로를 보호했던 것은, 수도 자체가 독자적으로는 생존 불가능한 도시라는 점이나 에른스트 영지와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도 있었으나, 황제의 이동 경로를 제한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것을 에리히는 거침없이 파괴해 버린 것이다.

결국 다른 수단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황후는 아직도 그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수 싸움에서 이미 진 셈이었다.

그 와중에 달려온 전령이 아렌 공왕과 남방군의 소식을 전했다. 이것도 황후의 패배였다.

“쯧…….”

황후는 마음속으로 욕을 내뱉었으나 겉으로 동요를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가볍게 혀만 찼다. 남방군의 움직임도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애당초 아렌 공왕의 군 통수권이 살아 있는 것부터가 문제다.

합법적인 권한은 설령 그것이 사문화된 법이라 할지라도 명분과 핑계로 사용될 수 있다.

클레어라면 도덕적 명분이나 사회적 합의가 그 위에 있으니, 명분을 획득하지 못한 것도 패배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후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그런 세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탓이다.

대신 그녀는 한탄했다. 이러니까 제국을 통합하려면 한쪽을 완전히 없애 버렸어야 했던 것이다.

‘이해할 줄 알았는데.’

황후는 누구를 상대라고 할 것도 없이 생각했다.

그놈의 사랑 타령 따위에 에리히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황제처럼 애당초 그릇이 안 되는 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말이다.

그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 프란츠 클라우제너는 더없이 완벽하게 일과 애정을 분리한 훌륭한 사람이었건만, 에리히의 정열적인 기질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는 있지.’

용모가 황실의 것을 닮은 만큼 나쁜 기질도 함께 옮겨 간 모양이다.

다정스러운 제러드도 그랬다.

돌이켜 보면 그는 표정과 몸짓, 성품이 에리히와 정반대처럼 보였으나, 진짜 속내를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자기 행동의 여파를 계산하는 방법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 마음과 결정이 옳다고 확신하는 오만함이 에리히와 똑 닮았다.

“하.”

황후는 마음속으로 한탄과 억지스러운 조소를 뒤섞어 내뱉었다.

자신이 제러드였다면, 설령 아렌의 하급 귀족을 황태자비로 삼을 결단을 내렸더라도, 결코 델포드처럼 작은 가문을 고르지는 않았으리라.

물론 지금은 델포드 남작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이다. 당시에만 해도 클레어 델포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헛된 생각이지.’

이미 죽은 제러드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건가. 의미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런데도 유령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자꾸만 옛일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돌이키시는 게 어떨까요?]

의붓아들이라는 이름의 정적은 한 번,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고작해야 갓 스물이 된, 바로 생일이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저 자신은 권력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습니다. 황후께서 원하시는 것이 저의 죽음이니,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살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지만요.]

[그렇게 말하니 마치 네 삶의 목표가 생존인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황후께서 저를 잘 알고 계신다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말이 의붓어머니이지 단 한 번도 모자지간처럼 시간을 보낸 일이 없음에도, 아버지보다 그를 잘 알고 있노라고.

하긴, 20년을 죽이려고 노려보고 있었으니 오죽하겠느냐고 제러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을 할 때도 웃음은 온화하고 입매는 다정했다.

마치 진심으로 웃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라 황후는 ‘이럴 때조차도 위선을 가장할 필요는 없을 텐데’라고 생각했었다.

[생존이 목표라는 것도, 권력에 흥미가 없다는 것도 진심입니다. 다만, 저 혼자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

[저는 피를 대가로 받았습니다. 또, 아직 치르지는 않았지만 피로 적셔질 채권에 서명한 자가 너무 많지요. 그들의 생존이 목표라고 한다면, 황후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래서? 넌 네가 받은 피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할 텐데, 그 방법으로 떠올린 것이 이렇게 나를 찾아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결정을 돌이키라고 말하는 것이냐?]

[황태자의 자리를 리누스에게 주겠습니다.]

[어이가 없군.]

[아버지는 제가 설득할 수 있습니다. 대신 황후께서도 물러나십시오. 이건 그냥 제안입니다.]

거절해도 괜찮다고, 제러드는 덧붙였다.

[그다음부터는 의회에서 싸우시죠. 황후께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지금도 이미 의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시니.]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피를 피로 씻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습니까? 황후께서는 리누스의 머리 위에 일단 관을 씌운 후에 그것을 당신의 머리 위로 가져갈 생각이시겠지만, 제가 없어도 그게 간단히 되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만만하구나.]

[백 년이나 지났어도 로멜과 아렌이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로멜을 에른스트로 바꾸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제러드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의회를 통한 장기 집권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차라리 그쪽을 노리시면 어떻습니까? 저는 정말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황후께서 원하시는 것이 오로지 에른스트와 로멜 귀족의 힘만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니까요.]

[…….]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문제가 그것만으로도 해결될 겁니다.]

황후는 그때 코웃음을 쳤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제 운명을 선택하게 해 보았자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단지 시가 상자에 들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제 손으로 처음 연잎 궐련에 불을 붙였던 황제처럼.

그것에는 아렌 공왕도, 에리히도 동의할 것이다.

‘지나친 이상주의자만 아니었어도.’

아니, 이것은 헛된 생각이다. 제러드는 그녀의 아들이 아니고, 아들이 될 수도 없었다.

그래. 동시에 그녀는 그의 견해에 일부 동의하는 면도 있었다.

완전히 감정을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지배자가 될 자격이 있다면, 자신에게조차도 자격이 없었다.

아니,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제러드가 그 이상주의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로멜의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권력을 포기해도 그의 권위가 손상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오히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머리 위에 얹힌 관을 존숭하는 사람만 늘어났으리라.

진작 리누스를 포기했어야 했다. 사람을 남몰래 갈아 치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헨리에타가 부러웠다.

젊은 시절에는 늘 그녀를 바보라고 생각했고, 아들에게 그 사랑스러움과 함께 어리석음을 물려주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제 아들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해도 다 쓸데없는 일이다.

황후는 치맛자락을 몇 번 매만졌다. 그러면서 드레스 밑자락에 숨겨진 큼직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이 순간 그녀는 평소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다고 경멸하던 남자와 똑같은 충동을 느꼈다.

상자를 열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 버릴 수 있다.

그것을 알기에, 자신은 타인과 다르다는 뜻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등받이에 기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방만한 자세를 취할 수 없어서 그러지 않았다.

전령이 마차 창을 두드렸다.

“황자의 소식이 있느냐?”

“레이디 아우구스타와 함께 시위대를 상대하러 가셨습니다.”

“그래.”

그 보고는 황후의 분노를 두려워한 자가 거짓으로 보낸 것이었으나, 황후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가 직접 나서면 시위도 잠시간은 소강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황자는 아비를 잃고 상중인 아들이다.

게다가 황후 자신이 아니라 황자가 전면에 나설 것이라는 그 시그널에 누그러질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 두고 일단 북방군을 처리한 후.

그 생각을 했을 때였다.

탕! 탕!

앞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마차가 급박하게 멈추면서 몸이 확 앞으로 기울어졌다. 황후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무슨 일이냐!”

“저게 시민을 노예로 만들려는 사악한 마녀다!”

멀리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문이 벌컥 열리고, 호위가 말했다.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폭도입니다!”

황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