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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분명해-218화 (219/263)

#218화

예상보다 이쪽에 투입된 병력 수가 많았다. 황후는 이쪽이 주력이라고 생각하고 거의 모든 병력을 다 이쪽으로 보낸 모양이었다.

혹은, 남방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힘을 투사하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적의 움직임은 난삽했다. 잘하면 미끼 역할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각하…….”

카를은 염려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에리히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제 몸의 안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정도는 희생해야 한다. 클레어가 알면 큰일 날 소리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가족을 염려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클레어는 간혹 지나치게 예민한 구석이 있다.

고귀하게 태어났다면 마땅히 그 가진 권리만큼 의무를 다해야 하는 법이다. 로멜의 귀족은 그 태생이 전사 귀족이다. 피를 흘려야 마땅했다.

물론 귀족이 창칼을 잡고 말을 타던 시기는 백 년 이상 전에 지났다.

어린 시절부터 격투기와 검술을 배워 봤자 총탄 한 방이면 죽게 마련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너에서도, 에른스트에서도, 황실에서도, 아직 전통을 지키고 있다.

유사시에는 가문의 남자들이 여자와 아이를 지켜야 하고, 남자들끼리 있다면 권위 있는 자가 제일 앞에 선다.

에리히는 그것이 시대착오적인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엇이나 앞으로 태어날 제 자식에게까지 그런 삶을 강요할 작정은 없다.

아마도 클레어가 키우는 것처럼, 사랑을 주며 자유롭게 제 할 일을 찾아가도록 놔두는 게 앞으로의 시대에 더 올바른 양육 방식이리라.

그러나 에리히는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이었고, 제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적인 감정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거지.’

의무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여기 남아서 지휘를 계속해야 한다.

애초부터 별동대에 끼어든 것 자체가 사적인 이유가 다분히 포함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각도 그를 멈추지는 못했다.

“나는 소수만 이끌고 들어갈 거야. 여기는 경에게 맡겨도 되겠지?”

“예.”

“버티기만 해. 클라인 경의 후속 부대가 곧 올 테니까.”

“예.”

카를과 호위병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경례를 올렸다.

에리히는 훌쩍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고작해야 20여 명의 기병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황후에게 들어간 보고는 거짓이었으나, 리누스가 의사당 앞에 있는 시위대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여전히 황후가 하는 일에 찬동하지 않았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 시점에서 직접 클레어를 찾아다녀 봤자 소용없으리라.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든 미움을 쏟아붓기 위해서든, 권력을 쥐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클레어가 그런 것에 별로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역시 통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누스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수단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리누스의 불행은 자신이 그것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점까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필요한 일이기는 하니까.’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강요하여 붙들어 두기 위해서도, 반대로 황후의 손에서 그녀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힘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제 역할을 다해야 하는 법이다. 리누스는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아우구스타가 말했다.

“하원 의원들을 우선 설득해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인가?”

“협상장으로 일단 끌어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적어 드리는 게 좋을까요?”

아우구스타가 말했다. 그녀의 안색이 피로와 염려로 얼룩져 검게 보였다.

리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여유는 없어 보이는데.”

리누스는 그렇게 말하고 바리케이드 밖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친위사단들이 걱정과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그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사실 이 자리에서 살해당하더라도 별로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좀 슬퍼해 주긴 하려나? 아니면, 멍청했다고 생각할까?’

그는 그런 일이 생기면 클레어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딴 생각을 하느니 지긋지긋한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미 해가 졌기에 그의 창백하고 하얀 안색과 은빛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 더욱 하얗게 떠올랐다.

황자의 모습을 발견한 시위대가 술렁거렸다.

“주동자가 누구인가?”

리누스가 물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노이만 하원 의장은 리나를 쳐다보았고, 리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은 둘 중 누가 나설지를 살피는 듯했다.

리누스는 문득 웃고 싶어졌다. 결국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리더였다.

레이디 퍼스트의 원칙에 따라 그는 리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요구 조건은 전해 들었네, 슈나이더 백작 영애.”

“리나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는 가문의 뜻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군. 어쨌든 슈나이더 백작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계엄령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지?”

“무리하고 거대한 부탁을 드릴 마음은 없습니다. 자비를 청하고 있을 뿐입니다.”

리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민의 생활과 수도 폐쇄로 인해 생이별한 가족의 재회라는 확고한 명분을 쥐고 있는 이상 그것은 단순한 청원이 아니었다.

리누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자비라. 하원이 선량한 백성들을 부추겨 이렇게 길거리로 끌어내어 총구 앞에 세워 놓고서 자비를 말하는 건가?”

“이것은 청원입니다, 황자 전하.”

“나도 알아, 노이만 의장. 하원이 여기 있는 이상, 이걸 반역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리누스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몹시 싫어했을 뿐이지, 위선적이고 정치적인 말을 할 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국상을 목전에 두고 있지 않나. 선왕 폐하의 가시는 길을 굳이 이렇게 어지럽혀야 하나?”

“황자 전하.”

“국상이 끝난 후에 하원 의원들이 조용히 의견을 모아 찾아왔어도 충분한 일이야. 선황 폐하께서는 폭도의 손에 돌아가셨는데, 경들은 지금 백성을 폭도처럼 만들어 여기까지 몰고 왔군.”

리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비애 탓이었으나, 다른 이들 눈에는 슬픔처럼 보였다.

사실 감정의 벡터로 따진다면 닮은 것이기는 했다.

“이것이 반역은 아닐지라도, 국상의 자리를 어지럽히는 황족 모독죄인 것만은 분명해.”

“황자 전하께서는 지나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리나가 나서서 반박했다.

“저희는 다만 지금처럼 군으로 사람을 압박하거나 끌어가지 말고, 평소처럼 생업을 이어 가게 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있을 따름이에요.”

“이야기는 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영면에 들어야 할 분의 안전을 소란스럽게 하니, 국상 일이 끝날 때까지 해산해.”

리누스가 말했다.

“정 불안하다면, 영애와 노이만 의장, 그리고 몇몇 대표를 뽑아 오도록 해. 계엄령의 단계적 해제에 대해 의논해 보지.”

자식이 비명횡사한 부모의 안식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가족의 안위와 시민의 안전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큰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도덕적 명분 싸움 사이에서 시민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쿵! 쿵! 쿵! 쿵!

북소리에 맞추어 땅을 진동시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승리의 행진곡 같은 소리였다.

지금까지 시위대를 휘감고 있던 슬프고도 결단에 찬 곡조와 전혀 다른 것이 골목 전체를 흔들었다.

거기에는 압도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서 리누스의 배 속까지 웅웅거렸다.

“혈관에 흐르는 피를 확인하자!”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학살자를 죽여라!”

그런 외침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멀리서부터 울려 퍼졌다.

노래하던 시위대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시위대가 갈라지고, 그 속으로 피와 화약 냄새를 풍기는 한 무리의 시민군이 행군했다.

맨 앞에 선 자 넷이 큼직한 수레를 밀고 있었다.

수레에는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기둥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중년 부인이 묶여 있었다.

“황후 폐하!!”

경악한 아우구스타가 비명을 질렀다.

이 광경에 지금까지 평화롭게 있던 시민들은 모조리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황후에 대한 온갖 증오를 내뱉었으나, 이렇게 눈앞에 나타난 황후는 괴물이 아니라 나이 들고 조그만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황자를 묶어 끌고 왔다면 이렇게 충격받지는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그 당황함을 뚫고 누군가가 선창하듯 소리쳤다.

“목을 쳐라!”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외쳤다.

“죽여라!”

“학살자를 죽여라!”

광기에 가까운 살의가 순식간에 시위대 전체를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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