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계엄령으로 끌려가거나 시위대에 참여한 자를 빼고도 대회의장은 절반 이상 찼다.
하지만 의장도 없는 상황인 데다가 사실상 회의가 이루어질 형편도 아니므로 정족수는 무의미했다.
헬무트는 미묘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단상 위에 올라서야 하겠으나, 지금 그 정도 위치를 가진 자는 모두 몸을 사렸다.
그러지 않은 자는 모두 에른스트 공작저에 모여 있거나, 시위대에 합류했으므로 여기 없다.
남은 자들도 모두 충분히 한 가문의 가주로서 교육받았거나 정치인으로서 잔뼈가 굵은 자들이련만, 책임을 지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형편없는 자들뿐이다. 물론 그 형편없는 자들 속에 헬무트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다.
‘오히려 노이만 의장이 의외인데.’
그는 중립적인 입장과 두루 친화력 있는 성품으로 중재력이 좋아서 의장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신념이나 정치적 결단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어느 쪽에 서야 할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클라우제너가 시위대와 같은 편에 서 있기도 하다.
“아무것도 들은 말씀이 없으십니까?”
곁에 앉아 있던 자가 소곤거리듯이 헬무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에른스트의 방계이며 클라우제너의 친척이라고 해도, 여기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입장을 나타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난번에 그 일이 있은 이후에 헬무트는 많이 후회했다.
공작 부인의 환심을 사기는커녕 오히려 미움받을 쪽으로 행동했으니, 그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야기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에리히가 살아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까.’
글쎄, 에리히의 존재만으로도 부담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그에게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이리라.
“빅토리아 대공께서는 대체 어찌하시려고.”
뢰제너 후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공식적으로 황제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시점에서 사실 빅토리아 대공이 제1순위의 황위 계승권자이다.
나이로 생각해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적고, 또 대공 자신이 권좌에 관심 없다는 의사를 꾸준히 표현해 왔다.
그러나 만일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말하면, 아무도 그 계승 순위에 대적할 수 없었다.
“설마 상속권을 주장하시지는 않겠지? 가족을 중히 여기는 분이라, 당신보다 어린 동생의 유산을 받고 싶어 하지는 않으실 텐데.”
“글쎄요. 리누스의 손에는 넘길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죠.”
먼저 자신이 황제의 위를 계승한 다음 베티나 공녀나 에리히에게 상속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특히, 베티나 공녀라면 양녀로 삼아서 제1순위 상속권자로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생존해 계시리라는 쪽에 확실히 무게가 실리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그럼 왜 황제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근위대가 이곳에 있는데.
마침내 대회의장의 정문이 열려, 헬무트의 생각을 끊었다.
빅토리아 대공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손을 잡고, 작은 금발 머리 남자아이가 짤따란 다리로 다박다박 걸어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 순간 숨을 멈췄다.
순백색에 황금색으로 장식한 황자의 예복을 잘 차려입은 아이의 모습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아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부모가 아직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음에도, 제 아비를 똑 닮은 아이에 대한 소문은 근 1년 가까이 수도를 휩쓸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어도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 클라우제너 공작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것부터, 구혼 상대의 여동생에게 불의한 짓을 저질렀다는 소문까지. 청혼까지 5년이나 걸린 일이 그 소문의 근거처럼 보였다.
그리고 공작은 소문을 부정하기는커녕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덕분에, 설마 그가 그럴 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부정과 가십이 함께 쌓여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헬무트는 그 일에 대해 델포드 영지로 조사원을 보내어 전후 사정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낳은 어머니가 공작 부인의 여동생인 건 확실해 보였으나, 동시에 그걸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공작 부부 둘 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가장 이상했으므로, 결국 공작 부인도, 여동생도 출산하여 본래는 아이가 둘 있었으리라는 결론밖에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에리히가 아니라면 모든 게 설명되는 것이다.
시종이 단상 위의 연설대를 치웠다. 아이의 모습을 가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선이 내려다보는 한가운데서 아이는 약간 겁먹은 듯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움츠러들거나 떨지는 않았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고운 입술을 앙다문 모습은 아이 뒤에 믿음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헬무트는 그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곁에 앉은 뢰제너 후작이 놀란 나머지 책상 모서리를 부서져라 틀어쥐었다.
빅토리아 대공이 회의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고요함 덕에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황손을 내가 제일 먼저 의회에 소개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네. 로멜의 엘리엇, 제러드 로멜과 엘리사 델포드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태어난 외아들이며, 조지 로멜과 헨리에타 아렌의 결혼에서 이어진 직계손으로서, 제1황위 계승권자임을 나, 빅토리아 로멜이 증명하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뒤따라온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에리히가 미리 확보해 두었던 언약서와 사제, 증인까지.
언약서에 서명했던 사제는 미리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쌍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알트마이어 대부인은 그 곁에서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따라서 엘리엇 로멜을 황태손의 위에 봉하고자 하는 황제 폐하의 뜻을 대리하여, 이곳 제국을 대표하는 의회 앞에서 선언하고자 하네.”
긴장한 아이가 빅토리아 대공의 손을 꽉 잡았다.
중요한 절차임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대공이 문득 아이 쪽을 보고 한번 다정하게 웃었다.
그러자 아이가 깜짝 놀란 듯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가 꽃봉오리가 펴지듯 활짝 웃었다.
빅토리아 대공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엄격하고 강한 태도로 말했다.
“이의 있는 자가 있는가?”
그 모습 앞에서 소리 높여 따질 자가 여기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제일 먼저 일어선 것은 맨프레드 대공이었다. 뒤이어 크로지크 백작이, 그다음 클라우제너 휘하의 가문들이 주르륵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다음이 헬무트였다. 뢰제너 후작이 깜짝 놀라 그를 따라 일어섰다. 헬무트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고 있었던 다른 로멜 귀족들도 일어섰다.
마지막은 아렌 귀족들이었다. 사실, 그들이야말로 이보다 기쁜 일은 없을 터였다.
느릿한 움직임에서는 오히려 다른 귀족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엿보였다.
하원 의원들은 분분히 각자 때마다 일어섰다. 그리하여 의사당에 모인 상하원 의원은 모두 일어선 채 거수하여, 새로운 황태손에게 인사를 올렸다.
* * *
“열어라.”
황제의 말에 계엄군 사령관은 망설였으나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친위사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바리케이드가 좌우로 열렸다. 계엄군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계를 풀고 받들어총 자세를 취했다. 장교들은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계엄군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결국은 사령관 로타어조차도 거수했다.
황후는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얻을 수 없었던 권위였다.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왜 황제가 그 권위를 갖고 있는가.
그게 말이 되지 않았다.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군과 병사를 돌보기는커녕 정무조차도 제대로 보지 않은 지가 몇 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제국의 주인이며, 군은 그의 앞에 무릎 꿇는다.
“하하!”
황후는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명 소리 같았다.
황제의 말이 옳았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것이 그녀를 가장 미쳐 버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