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황제가 그녀를 돌아보고 말했다.
“전승되는 게 오로지 피만은 아니지. 내가 물려받은 것은 전통과 역사이니. 알고 있을 텐데, 마르고트.”
다른 말로는 오래된 사회적 합의다. 그것을 뛰어넘으려면, 그녀는 권력과 음모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마르고트는 발광하듯 버둥거렸으나 기둥에 묶인 몸을 어찌하지도 못했다. 몸부림칠수록 밧줄이 몸에 파고들었다.
황제의 눈빛이 묵은 살의로 번득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황제답기는커녕 인간답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5년 전에 이 여자를 쏴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제가 벌레처럼 여기고 무시하던 자들에게 끌어내려지는 것이 더 끔찍할 테니.
“황제 폐하.”
디트마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황제는 그를 바라보고 아랫입술을 한 번 윗니로 문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황후를 끌어내 돌팔매질을 하라고 명하고 싶었으나 이자의 시선이 있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아직도 디트마어는 무릎 꿇지 않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경의도, 존숭도 없었다.
약간의 당황과 의구심, 짙은 실망감 위에 번진 약간의 기대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각 있는 시민의 시선이다. 황제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클라우제너 공작에게서 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네, 람스베르크 의원.”
“그러십니까?”
“경의 바람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지금은 내게 맡겨 주었으면 좋겠군. 본디 씨앗을 뿌린 자가 거두어야 하는 법이니.”
“황공한 말씀 거두십시오. 저는 이 자리에 한 사람의 제국민으로서 나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황제는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마르고트 에른스트를 기둥에서 내려 주어라.”
“황제 폐하……!”
그가 입에 담은 지칭에, 가까이 다가왔던 로타어와 아우구스타가 경악하며 무릎을 꿇었다.
에른스트라고 부른다는 것은 황후의 지위를 부정한다는 뜻이다.
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무엇 하느냐? 이대로 기둥에 묶여 있길 바라느냐?”
“아, 아닙니다. 황공합니다!”
로타어가 황급히 손짓했다. 병사 몇이 단상 위로 올라가 밧줄을 풀고 황후의 몸을 안아 내렸다.
“황후 폐하……!”
아우구스타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피가 터진 입술과 엉망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고, 망설임 없이 제 옷을 벗어 황후의 몸을 덮었다.
“가자.”
황제가 말하고, 열린 바리케이드 사이를 성큼성큼 통과하여 지나갔다.
친위사단이 총을 받들어 올리고, 로타어가 황후를 업고 뒤따랐다.
그 뒤를 디트마어와 노이만 의장이 따르고, 그러자 하원 의원들도 줄지어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시위대는 조금 더 멈칫거렸다. 조금 전까지 계엄군이었던 병사들 사이로 지나가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결심을 세우고 의원들의 뒤를 따르자, 금세 그것은 행렬이 되었다.
아우구스타가 타고 온 마차가 있었으나 황제는 그것을 타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황궁까지 걸었다.
거기에는 특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다. 적당히 시간을 끌고, 황후가 제 뒤를 따른다는 굴욕감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라 길을 가득 메운 행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보통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중앙 대로를 건너 황궁의 정문으로 들어선다. 하원 의원들은 이 일이 시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궁의 그랜드 홀이 열렸다.
황제가 칩거한 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음에도 빈틈없이 관리된 공간에는 먼지 한 톨 없었으나, 비극적인 시간이 켜켜이 쌓인 듯했다.
황제는 익숙한 태도로 알현실을 가로질러 가 황좌에 앉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재판을 하지.”
그가 말한 재판이, 디트마어가 말한 재판과는 다른 종류의 것임은 명백했다.
이건 올바른 절차가 아니었다. 재판관도, 변호사도 없었으며, 증인은 물론 법전조차 없었다. 하지만 디트마어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타가 목 놓아 외쳤다. 반쯤 의식을 놓은 채 끌려온 황후는 그녀의 품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엇에 관해 말씀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칩거하시는 동안, 황후께서 황실의 대표로서 일부 통치 행위를 하시긴 했으나……!”
“아니. 그걸 문제 삼으려는 건 아니야.”
황제가 차갑게 말했다.
통치 문제에는 관심 없었고, 사실 그 책임은 마르고트 혼자의 것도 아니다.
의회가 함께 책임져야 했으며, 사실 자신이 그녀를 방치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그는 마르고트를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게다가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 여자를 끝내야 한다.
세상이 바뀔 것이다. 엘리엇의 세상이 오기 전에, 자신이 만든 죄악을 모조리 걷어서 가져가야 마땅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황후가 한 일은 모조리 부정되어야 했다.
“마르고트 에른스트, 네가 재판 받을 일은 불륜이다. 그리고 살인이지.”
“불륜?”
그때까지 너무 지친 나머지 표정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던 마르고트가 어이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불륜이라니. 그것보다 자신과 황제 사이에 더 걸맞지 않은 말은 없었다.
애초부터 배신을 운운할 만큼 좋은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리누스는 내 자식이 아니고, 황실의 핏줄도 아니지. 마르고트 에른스트, 애초부터 우리 결혼은 무효였고, 너는 황실에 거짓 자손을 밀어 넣었으니, 이보다 더한 반역죄는 없다.”
황제는 나직하게 선언했다.
[통치가 옳은가 그른가로 따지면, 논쟁의 여지를 주는 셈입니다.]
아내와 수없이 이런 논쟁을 했던 바 있는 에리히가 로건에게 일러 주는 듯이 말했다.
물론 진짜는 자신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을 터이다.
[일단 논쟁이 되면 발언권을 주게 됩니다. 악인에게는 변명할 기회를 주면 안 됩니다. 장엄한 죽음과 마찬가지로, 변명이 연설처럼 남아 오랫동안 유령이 되어 떠돌 겁니다.]
그러니, 그녀를 쳐 내려면 개인적인 부정을 처벌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그리고 황제는 애초부터 그럴 작정이었다. 그보다 그가 더 원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고트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20년 전에 말했다면 모르되, 이제 와서 무슨.”
당연히 취할 조치는 모두 취했다. 결혼식 날 밤에 황제에게 약과 독주를 먹여 재웠다.
어차피 이런 남자의 자식을 낳아 봤자 무능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관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그걸 황제가 알 게 뭔가?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면 든 줄 알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조지, 네가 헨리에타에 대한 의리를 지켜서 결코 다른 여자와는 자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제정신을 가지고 있던 시기가 길지도 않았던 주제에.”
“아니,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황제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남자로서 수치가 되든 말든 그는 이 사실을 공개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불임이야.”
그랜드 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헨리에타가 죽었을 때 약을 마셔 버렸지. 재혼을 강요당하는 게 끔찍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고트가 아니었으면 재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고트는 절대로 아내를 대신할 수도, 그녀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강요를 받아들였으니까.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죽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니, 그때가 아니다. 더 일찍이다.
그녀가 사악하다는 것을 몰랐을 때부터, 영특한 에른스트 공녀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싹을 밟았어야 했다.
알았을 때는 이미 헨리에타는 죽었을 때니까, 그 전에 반드시.
황제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황좌에서 일어섰다. 옛일이 떠오를수록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다 낫지 않은 섬망증을 자극했다.
그는 오랫동안 미뤄 온 일을 실행하려고, 권총을 꺼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작은 커프스 링크가 잡혔다.
“아.”
안 된다.
그는 아직도 엘리엇에게 그걸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조그만 아이가 손목에 차고 있던 파란 돌. ‘아빠의 파란 돌’이라고 불렀던 것.
그건 제러드가 아니라 에리히의 것이다. 아이는 제러드만의 아이가 아니고, 그러니 저 혼자의 아이도 아니다.
아이를 생각하면, 그는 견뎌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 했다.
온전히 이 일을 끝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는 커프스 링크를 움켜쥔 채 다시 털썩 황좌에 앉았다.
“마르고트 에른스트는 사생아를 거짓으로 황실의 직계손으로 속였으며, 마침내는 황좌를 탐내어 황태자를 살해했으니 이는 반역죄다. 어찌해야 옳은가?”
“……반역죄의 처벌은 본디 교수형이지만, 황태자 시해죄에는 증거가 없습니다.”
슐츠 의원이 나서서 말했다. 황후를 변호한다기보다는 법적 문제를 검토하는 듯한 건조한 어조였다.
황제는 주먹을 움켜쥔 채 말했다.
“처벌이 결정될 때까지 마르고트 에른스트를 탑에 감금한다.”
“폐하!”
아우구스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황제는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