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55. 집착
친위사단 쪽도, 북방군 쪽도 연락망은 이미 흐트러진 뒤였다.
황궁과 의사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전투는 속행되었고, 제3 친위사단의 일부는 여전히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찾고 있었다.
시위대 앞을 벗어난 리누스의 호위 중 세 명이 그 양쪽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최대한 병력과 물자를 수습하여 에른스트에 집결해야 한다.
황후는 포기한다. 그들은 황후를 따르기는 했으나, 그들의 깃발은 리누스였다.
“아직 동측 기차역이 살아 있습니다. 그쪽을 통해서 수도를 빠져나간 다음, 옌스베르크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에른스트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로타어가 리누스에게 붙인 부관이 말했다.
“전하께서 계시는 이상, 아직 진 것이 아닙니다. 클라우제너 공작의 명성이 높다 한들, 그는 방계에 불과합니다. 반역자입니다.”
황제가 살아 있다는 것도, 엘리엇의 존재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에른스트와 로멜이 온당한 상속권을 위해 전하와 함께할 것입니다. 버러지 같은 자들이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서 봤자.”
“멈춰.”
리누스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다가 짧게 말했다. 부관은 당황했다.
“지금은 부대와 합류하는 게 우선입니다.”
“야코프 장군이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로텐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들이 모여 있는 상점가에서 리누스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도시를 관통해 가로지르는 강이 가까웠기에, 불유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리누스는 호위 중 두 명을 지적하여 명령했다.
“너, 너. 이 길과 저 길로 가도록. 야코프 장군을 만나면 내가 여기 있다고 해.”
“전하, 지금은 그럴 때가.”
“명령이다.”
어쩔 수 없이 전령들이 달려갔다.
리누스는 불편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서서 냄새나는 강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동측 기차역보다는 배가 낫지 않을까? 내가 에리히라면 철로를 가만 놔두지 않았을 텐데.”
“동측 기차역은 소수의 여객만 다니는 곳입니다. 북방군 별동대가 거기까지 미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북쪽 철로는 안전한가?”
그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항구가 나을 수도 있지. 해군은 여전히 태업 중일 테니.”
리누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부관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에게 물었다.
“쾌속선을 준비할까요?”
“가능한가?”
“징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게 낫겠군.”
리누스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진지하게 해로를 생각했다기보다는 머릿속 절반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라우제너의 안가가 이 근처에 하나쯤 있을 텐데.’
에른스트도 오래된 저택을 이 인근에 가지고 있다. 사용은 거의 하지 않았다.
선대 에른스트 공작이 정부를 만나는 장소로 사용했기에, 그곳의 비밀 통로는 더 이상 비밀 통로라고 할 수 없었다.
‘비밀 통로라.’
그게 그 시기에 지어진 저택의 유행이었다면, 클라우제너 공작가가 가진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배수진을 치기 위해서든, 만일의 경우에 도주하기 위해서든, 이 근처 안전 가옥에 숨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뜻을 전달해 두었으니, 야코프 장군도 이 근처에서 수색하고 있으리라.
그는 산책하듯 천천히 강변을 따라 걸었다. 어차피 전령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부관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야코프 장군이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찾던 부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리고 이것이 클라우제너의 안전 가옥을 자극했다.
클레어는 그때까지 여전히 정보를 차단한 채 고요히 안전 가옥에 머무르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디트마어와 울리히의 시신이 발견되었거나 죽었을 거라고 여겨졌다면, 진즉 돌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막시밀리안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클레어 님, 좀 누워 계시는 게…….”
“아니야. 마음이 불편해서…….”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충분히 안락한 의자에 기대어 있으니까.
바깥 상황이 궁금했다. 전령을 끊었더니 소리조차 숨죽인 저택이 고요했다.
에리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와 의견을 나눈 것은 밀러 교수의 서재에서 재회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보안 때문에 편지조차 주고받지 못했으니,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군을 끌고 와서 쓸어버린다고 했으니까.’
로멜-아렌 제국의 의회를 만든 것은 프리드리히 대제와 세레니티 여왕이다.
물론 귀족 합의체로서의 상원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중류 계급의 정치 참여에 대한 사회적 요구 또한 있었다.
그러나 황권이 가장 강력한 순간에 프리드리히 대제가 자기 힘으로 의회 체제를 만들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세레니티 여왕이 함께 그 작업을 했다.
그러므로 법은 황권 아래에 있다. 아렌 왕가의 왕권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황권 아래에 자발적으로 위임하는 형태다.
때문에 백 년이 지나 형식만 남아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황제가 즉위하거나 아렌 공왕이 바뀌면 충성을 맹세하는 예식을 거행한다.
이것은 명예의 문제였으므로, 클레어가 보기에는 약간 비웃음이 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실권은 법과도, 명예와도 또 다르게 결정되곤 했다.
‘적어도 남방군은 공왕 전하가 멈춰 둘 수 있을 테고.’
북방군도 수중에 넣을 자신이 있으니 에리히가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그러면 이제 시위대만 남는다.
노이만 의장에게 하원 의원들을 동원해서 계엄군의 발포를 막으라고 종용했으나, 과연 폭발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디트마어가 살아 있다면, 단순한 폭동으로 끝나지 않게 이끌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또 모르는 일이다.
클레어가 모를 뿐이지, 이미 넘칠 정도로 차오른 갈구를 생각하면, 오늘 갑자기 누군가가 단상에 뛰어올라 당통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 어차피 역사의 흐름은 일개인이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클레어는 에리히처럼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적어도 책임 한 자락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그 한중간에 있어야 했는데.
‘아기만 생각하자.’
엘리엇과 아기를 위하는 것만으로도 두 손이 꽉 찰 테니.
하지만 어둠 속에 있으니 상념이 깊어졌다.
[내 인생은 이미 꽉 찼어.]
그 애가 용감하다는 걸 몰랐던 게 아니다. 그러니 만일에 자신이 좀 더 신뢰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평소에 개인적이며 사적인 삶을 추구하는 게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제 인생을 꽉 채운 남자에 대해서 먼저 말해 주었을까?
아니면, 그날 에리히를 믿고 찾아갔으면 어땠을까? 배 속에 있는 아기의 혈통은 곧바로 확인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일이 커지는 대신 아마 엘리엇이 곧바로 황태손으로 선언되고, 5년 동안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심화시키는 대신 의회에서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암살 위협은 늘 있었겠지만, 그만큼 보호하려는 사람도 많았으리라. 엘리사는 황태자비로서 훌륭하게 해 나갈 수 있었을 게 분명하다.
‘딱히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것도 에리히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게 나았으리라는 후회와 비슷한 것이다.
그냥, 생각만 해 보는 것이다. 지금은 딱히 생각할 게 없으니까.
그녀는 아기에 대한 생각도 했다.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에리히를 닮는 게 얼굴은 더 낫겠지? 베티나 공녀도 미인이고……. 그래도 여자아이라면 엘리사를 닮으면 좋겠다. 그럼 귀여운 옷을 옷장에 한가득 걸어야지. 아동복을…….’
생각하다가 클레어는 멈췄다. 아니, 이제 일은 그만 늘리고 좀 더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을 만들 거니까.
아니다. 또다시 생각해 보니 이번에 태어날 아이가 클라우제너의 후계자가 될 거라면, 하나만 더 낳더라도 상속 재산을 비슷하게 맞춰 주려면 사업체가 수백 배는 커져야 했다.
‘아니, 앞으로도 절대로 오일 머니는 못 이기지. 그냥 클라우제너의 재산 중에 갈라낼 수 있는 걸 갈라 보자.’
그게 세상을 위해서도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릴 테지만, 인장 반지를 내놓고 다 맘대로 하랬으니 전부 맘대로 해야지.
그런 생각에 클레어가 혼자서 웃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숨죽인 살기가 공기 중에 감돌았다. 클레어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군복을 입은 탐색자가 있습니다. 목표는 불확실합니다.”
조그만 소리로 호위팀 부장이 속삭였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상대가 그냥 지나쳐 줬으면 좋겠지만, 만일에 약탈하려는 병사들이라면 이 집은 꽤 좋은 먹잇감일 것이다.
쾅쾅 두드리는 바람에 문이 흔들렸다. 호위팀 부장은 이를 악물고 손짓했다. 요안나가 클레어를 잡아끌었다.
다음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