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몸이 좌우로 균일한 리듬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클레어는 백일몽에 빠져 있었다.
평소보다 더 많이 덜컹거리는 것 같은데, 혹시 노선을 잘못 탔나?
이러다 내릴 역을 놓치겠다. 지각하면 썩을 놈의 본부장이 갈굴 게 분명했다. 그럴 거면 퇴근이나 일찍 시켜 주든가.
출근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회사를 때려치울 수도 없고. 어제가 남동생 기일이었다는 것은 연차를 낼 이유가 되지 못했다.
어차피 성묘 갈 계획도 없었으니까, 진짜로 이유가 없었던 게 맞았다.
어머니는 기일이라고 해서 굳이 거창하게 하지 말고, 하얀 국화라도 한 송이 사다 놓고 사진을 보며 추모하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혼자가 된 이후로 그조차도 한 적이 없었다.
침울하다는 것도 병가를 낼 이유는 아니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가정이었고, 특별히 어린 시절에 불행을 겪지도 않았다.
남들보다 가족을 조금 일찍 잃었지만, 성인이 되어 취직하고 독립까지 한 후의 일이었다.
혼자 사는 삶에도 불만이 없었다.
제 한 몸 충분히 보살필 수 있을 만큼 월급을 받았고, 여자 혼자 안전하게 살 수 있었고, 더치페이라면 가끔 친구들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을 만했고, 또 1년에 한두 번은 사치도 했다.
그럼에도 집에 혼자 머무는 날에는 허무한 마음이 들곤 했다.
자신의 뒤에 남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때때로 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대로 끝나도 상관없지 않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벌이는 거 좋아하잖아. 게다가 능력 인정해 줘, 인센티브까지 있는데, 왜 싫어하는 척하는지 모르겠군.]
에리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니, 에리히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는 인센티브 같은 단어는 모를 테니.
자신이 뭐라고 말했던가. 그냥 웃으면서 얼버무렸던 거 같다. 지금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인센티브가 다 뭐냐고 했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얼버무린 말이었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공해서 돈을 벌면 뭐가 남죠?’
그녀는 혼자였다.
물론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갖고 싶은 물건도 많았고, 노후 걱정도 있었다.
좋은 곳에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에게 기분 좋게 한턱을 내거나, 모두 좋아하는 일이다.
하지만 축하해 줄 사람은 있어도,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없었다. 뭔가를 남겨 줄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면, 남동생이 있어 봤자 어차피 외로웠을 것이다. 딱히 인생을 같이할 만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래도 죽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하게 흩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얼굴 보니 탄수화물이 모자란 모양인데, 이거나 먹어.]
본부장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는데, 눈앞에 뿅 하고 커다란 컵이 나타났다.
그녀는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꿈은 꿈이라서,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기력 속에서 몸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군고구마.”
클레어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먹은 것이 군고구마 아이스크림이었다.
우유와 고구마를 같이 먹는 것에 대해서, 공작저의 요리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배고픈가?”
클레어는 그 대답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어 있던 어깨가 낯설다는 것을 깨닫고 파드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마차 안은 좁았다. 머리를 부딪칠 뻔한 데다가 눈앞이 핑 돌아 그녀는 휘청거리다 마차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전철의 진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마차의 흔들림이었던 모양이다.
리누스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 의사가 없으니, 지금 응급 상황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어떻게……?”
되물으려는 목구멍이 갈증으로 갈라져 터질 것 같아서 말을 온전히 하지 못했다.
리누스가 몸을 움직였다. 그제야 클레어는 자신이 그에게 기대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데, 몸속에서는 열이 활활 끓는 듯이 솟구쳤다. 컨디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젖은 스커트에서 떨어지는 물이 마차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에서 냄새가 났다.
그 위에 도톰한 양털 망토가 덮여 있었다.
“미안하군. 시간이 급해서 갈아입힐 사람을 불러올 수 없었어.”
리누스가 그녀에게 수통을 건네며 말했다. 클레어는 혐오감에 치를 떨며 그 손을 탁 쳤다.
그러자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 수통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리누, 읍!”
거부를 표시할 시간도 없었다. 리누스가 그녀의 팔을 비틀어 잡고 당겨 입술을 겹쳤다.
거기에는 별로 음탕한 의도도 들어 있지 않았다. 죽을 자에게 물을 주기라도 하려는 양 입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왔다.
목적이 무엇이든 끔찍하게 불쾌해서 클레어는 온몸으로 발버둥 치며 그 혀를 세차게 깨물었다.
“윽.”
피비린내가 클레어의 입 안으로 확 퍼졌다. 리누스가 그녀를 놓고 물러났다. 흰 얼굴과 셔츠에 물과 피가 섞여 주르르 떨어졌다.
“미친놈!”
클레어는 헐떡거리면서 소리쳤다.
깨끗한 손수건이 없었기에 리누스는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비로소 줄곧 추구하던 ‘로멜 귀족다운’ 무표정을 얻은 것 같았다.
“알아서 마시라고 줘도 거절했잖아.”
그가 몇 번 혀를 움직여 상처를 살핀 후에 말했다.
옆쪽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지만, 피가 자꾸 흐르는 것 말고는 혀 자체를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몸조심해야지, 클레어. 아기가 놀라겠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어? 너와, 네 아기인데.”
리누스가 피에 젖은 입술로 무감정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호러물의 괴물이라도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너도, 엘리엇도, 그 아기도 미워하지 않아. 사실 네 건강을 고려하면 이래저래 불안하니까 상황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이왕 생겼으니 건강하게 아기를 낳고, 몸조리 잘해서 너도 건강을 되찾길 바라.”
“날 대체 어쩔 셈이야? 왜 이러는 거야? 네가 이기고 싶다면, 조용히 처박혀 있던 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에른스트로 데려갈 거야.”
“에리히 때문에 이래?”
역시 인질로 쓸 생각인가?
자신은 에리히를 동요시킬 수 있을 테고, 아기는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다. 그걸 생각하면, 진짜로 골치 아픈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마음에 사로잡혀 있던 클레어는 최악의 경우를 그렸다.
에리히를 암살하고, 자신과 아기가 모두 사로잡혀 있다면, 그때부터 클라우제너는 에른스트의 것이다.
델포드는 괜찮다. 아렌 남부에 있으니 에른스트가 손을 뻗기 힘들뿐더러, 작은아버지인 제임스가 알아서 잘할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제너와 에른스트는 가까이에 붙어 있고, 수장에 따라 서로 다르게 행동하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상당히 동질이다.
게다가 자신이 죽으면 루덴도르프는 결국 다시 에른스트에 붙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두 가문을 합쳐 북방에서 독립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렌의 곡물에 의지하면서 북방에서 농업은 사양 산업이 됐지만, 루덴도르프 평야는 건재하니까.
‘아…….’
그녀는 자신이 이 시대 귀족처럼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북방에 독립국이 생기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결국 거기 사는 평민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 기껏해야 상단이 조금 힘들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족쇄 역할을 하게 될 바에야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리누스에게 사로잡혀서 자신이 겪게 될 일 때문이 아니라 클라우제너 때문에.
지금까지 정말 쓸데없는 것에 목숨 건다고 그렇게 비웃어 왔던 그 가문과 그 명예를 위해서.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 힐긋 마차 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리누스가 말했다.
“혹시 몰라서 밖에서 문고리를 묶어 두게 했으니 헛된 생각은 하지 마.”
“리누스.”
“너와 아기를 해칠 마음은 없어. 진심이야.”
클레어는 숨을 할딱거렸다.
리누스가 다시 수통을 건넸다. 그녀는 거절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말라붙을 것 같았던 리누스의 피 냄새가 배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네가 왜 이러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글쎄. 나도 종종 모르겠을 때가 있지. 전에는 알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뭐?”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전부 죽게 마련인데, 그사이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 뒤에 뭔가 남을 것도 아닌데.”
리누스가 말했다.
“어머니도, 제러드도, 결국 죽으면 똑같은 흙과 재에 불과하듯이.”
클레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해하듯 말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꿈을 꾸었기에, 그녀는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무저갱 같은 허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누스가 붉은 눈동자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넌 아기를 낳으면 잘 기르겠지? 나 같은 놈이 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