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클레어는 긴장으로 숨조차 쉬지 못했다. 몸이 무거워서 좌석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리누스는 삶에 미련이 없다. 그는 이미 물에 몸을 던진 적이 있다.
자결과 타살은 서로 다르다지만, 리누스의 경우에는 명예나 자존심 때문에 죽으려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클레어의 생각에는 그랬다.
하지만 에리히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조준했던 총구를 내리고, 리누스를 쳐다보았다.
“네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왜? 멍청한 겁쟁이는 인형처럼 어머니한테 끌려다니기나 할 줄 알았나 보지?”
“아니라고 할 순 없군. 네가 인형처럼 끌려다닌 건 부정할 수 없지 않나.”
“네가 뭘 안다고!”
리누스가 고함지르며 총구를 흔들었다. 에리히는 새파란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모르겠군. 우유부단할 뿐이지, 근본은 착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리누스는 오히려 더 모욕감을 느끼고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에리히가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리누스가 자기를 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였다.
땀과 흙먼지가 몸에 엉키고, 늘 단정하게 갖춰 입는 옷차림새는 간곳없이 단추까지 날아간 셔츠 위에 묵직한 가죽조끼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거만한 몸짓이 남아 있는 탓인지 평소의 그와 크게 차이 나 보이지 않았다.
리누스는 증오심을 품었다. 자신 쪽이 훨씬 깔끔한 상태이고, 체력도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제 손에도 총이 쥐어져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패배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의 손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네가 이 일에서 빠져나와 멀리 떠나겠다면, 제러드를 생각해서 눈감아 주겠다.”
“무슨 개소리……!”
리누스가 흥분하여 소리치는 순간 에리히가 달려들었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던 것이다.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하고 주먹이 턱을 강타한 순간 리누스는 그대로 자빠졌다. 에리히는 그를 깔고 앉아 총을 쥔 손을 비틀어 쥐었다.
“끄, 윽!”
리누스는 발광했으나 본디 그는 몸을 단련한 적이 없었다. 손목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벌어진 손가락 사이에서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에리히가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이런 놈인 줄 알았다면, 제러드도 후회했을 거다.”
“어차피……!”
“어차피, 뭐? 멀리 떠나게 해 주겠다, 보호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한 건 너였어.”
퍽!
그의 주먹이 리누스의 복부에 꽂혔다. 컥, 하고 리누스가 숨 막히는 소리를 질렀다.
“제러드가 네게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고, 클레어도 네게 기회를 줬을 테지.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해.”
“그게, 무슨, 윽, 소리야……!”
리누스가 반쯤 비명을 질렀으나 에리히는 무시했다. 그는 깔아뭉개 제압한 리누스 따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들고 있던 리볼버의 탄창을 열어 총알을 넣었다.
그제야 리누스는 그가 들고 있던 것이 빈 권총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제 괜찮아, 클레어.”
클레어가 야코프를 배신한 참모를 겨눈 채 덜덜 떨고 있던 팔을 애써 내렸다. 에리히는 그자를 쳐다보고 물었다.
“소속과 이름은?”
“제3 친위사단 참모부 소속 뒤프레입니다. 7년 전, 막시밀리안 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군.”
친위대원이 옛 상관을 위해 사단장을 배신하다니, 예전의 에리히였다면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충성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전과 다르게 판단했다. 클레어가 위험할 수도 있는 순간에 들어온 적절한 지원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사직하도록 해. 귀관은 군에 있을 자격이 없다.”
“예.”
뒤프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에리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개인으로서는 꼭 사례하고 싶으니, 한가해지면 한번 찾아오도록. 비서에게 귀관의 이름을 말해 두지.”
“예, 영광입니다!”
아마 저자가 바란 것도 그것이리라.
환한 얼굴로 경례를 올리는 그에게 에리히는 명령했다.
“가서 기관차를 세우도록.”
“옛!”
그가 거수하며 대답하고는 객차의 앞쪽으로 달려갔다.
리누스는 벗어나려고 몇 번이나 꿈틀거렸으나, 에리히가 그의 몸을 꺾어 누른 무게와 힘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는 사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의 통증이 퍼졌다.
“끄아악!”
비명을 지르는 순간, 몸이 해방되었다. 리누스는 혼란한 채로도 재빨리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 전에 에리히의 총구가 그의 이마에 닿았다.
“큭!”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고 참을 만큼 참았다. 제러드도 더 이상 불만 없겠지.”
정말로 일이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는 정원 그늘 속에 숨어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훔쳐보는 소년이 있었으니까.
[정말로 저 녀석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냐?]
그의 질문에 제러드는 웃는 낯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리누스에게는 죄가 없어.]
[황실의 혈통을 어지럽힌 것만으로도 이미 대역죄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만 그렇게 하지. 난 저 애가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실제로 가능성이 낮은 일이긴 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을, 굳이 어린아이 당사자에게까지 알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차피 내 대가 되면 리누스는 방계가 돼.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 내 뜻을 받아들이면, 굳이 저 애가 상처받지 않고 끝날 텐데, 일부러 상처 줄 필요는 없잖아.]
[속도 좋군.]
[도와줄 거잖아? 형은 의회주의자니까.]
[형은 무슨.]
평소에는 이름으로 부르는 주제에, 그럴 때만 형이었다.
[너 때문에 의회가 낫다고 판단한 게 아니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권좌에 앉았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을 목격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에리히는 복잡한 기분이 되곤 했다.
각자 가문이 갈린 데다가 이종사촌이었다. 형제라는 의식은 없었지만, 그 마음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 했으면 제러드도 납득해 줄 것이다. 리누스는 너무 선을 많이 넘었다.
단순하게 황후에게 끌려다닌 것만이라면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겠으나, 클라우제너 저택을 습격하고 비상용 요트를 폭파한 것은 리누스 자신의 뜻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클레어를 해치기 위한 목적이었다. 설령 연민이 남아 있었더라도, 분노를 덮을 만큼은 아니었으리라.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게 내 마지막 정인 줄 알아라.”
그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클레어가 그를 불렀다.
“잠깐만요. 지금 쏘지 말아요.”
“…….”
“자비를 베풀자는 게 아니에요.”
에리히는 눈만 흘끗 돌려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가 아직도 간헐적으로 총성이 계속되고 있는 뒤쪽 차량을 눈짓했다.
에리히는 이미 지쳤고, 저기에 아군이 몇 명이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 거기에 누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가장 확실하게 안전을 보장받는 방법은 리누스를 인질로 잡는 것이다.
그 뜻을 알아듣고 에리히는 몸을 일으켰다. 리누스가 발광하듯 소리쳤다.
“쏴! 쏘라고! 무서운 것도 아닐 텐데!”
퍽!
에리히는 총을 쥔 손으로 그를 후려쳤다. 안 그래도 묵직한 주먹에 쇳덩어리까지 더해진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리누스의 고개가 꺾였다.
에리히는 억지로 리누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를 끌고 가 뒤쪽 차량과 연결되는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총격이 멎었다. 친위대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팔을 아래로 내렸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에리히의 부관이 힘없이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각하, 고맙습니다.”
에리히는 명령했다.
“총을 바닥에 내려놔라. 황명에 따라, 스스로를 황제 될 이라 참칭한 리누스 로멜을 반역죄로 체포한다.”
기차에 먼저 오른 것은 야코프가 가장 신뢰하는 에른스트파의 장교들이었으나, 리누스가 에리히의 손에 붙들려 있는 이상 저항은 무의미했다.
참모가 무사히 기관차를 장악했는지, 마침내 기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에리히는 리누스를 부관에게 넘기고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클레어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