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엘리엇이 잠깐 움찔했지만, 곧 황제에게 폭 안겨 들었다.
엘리엇은 황제 할아버지도 좋아했다.
가끔 무섭긴 하고, 또 같이 있으면 이모할머니와 대장님이 무서운 태도를 보일 때도 있지만, 아이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아는 법이다.
“내 앞에서는 울어도 된단다.”
그래도 엘리엇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 할아버지는 엄마도, 아빠도 아니니까.
아빠는 저번에도 황제 할아버지 앞에서 용감하게 행동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아빠 집에 가고 싶어요.”
“……여기가 네 아빠의 집이었단다.”
“아니야!”
엘리엇이 돌연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고는 결국 못 참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빠 집은 여기가 아니에요. 아빠 집에는 내 방이 있는걸. 아빠가 보고 싶어요.”
황제는 엘리엇을 훌쩍 안아 올렸다.
아이가 말하는 아빠가 에리히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당연한 일에도 마음이 아팠다.
엘리엇에게 서운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제 친부모를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슬펐기 때문이다.
“엘리엇, 오늘 저녁에는 할아버지랑 같이 자지 않겠니?”
“……집에 가고 싶어요.”
엘리엇은 조금 망설였다. 역시 여기는 무섭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황제가 슬퍼 보였기 때문에 팽개치기가 미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마사랑 같이 자는데도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이곳이 싫었다.
황제가 엘리엇을 달래려고 다정한 목소리로, 어린 제러드에게는 백발백중 통하던 비장의 수를 꺼냈다.
“코코아를 마시러 가는 건 어떠니? 곰돌이 모양 마시멜로를 띄워 주마.”
“우웅.”
평소 같으면 팔짝 뛸 만큼 좋아할 일이었으나, 이번에도 엘리엇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황제는 염려스럽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알았다.”
“황제 폐하.”
그의 뒤에 서 있던 로건이 우려를 담은 목소리로 불렀다. 황제는 가볍게 손을 들어 괜찮다고 표시했다.
“호위 인력이 모자란 것이 문제라면, 내가 함께 가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
황제가 말했다. 확실히 그것이 제일 안전한 방법이긴 했다.
공작 부부에게 의견을 묻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아이를 위해 공작저에서 하루 머물겠다는 것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건은 오히려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 황궁을 비우시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습니다.”
“어차피 물러날 사람이, 지금 황궁에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황권을 유지하려면, 발언을 하지 않을지라도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그랜드 홀에 남아 있었어야 한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 권위를 보여야 할 테니 말이다.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엘리엇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가혹한 권력 다툼이 아니다.
실은 제러드를 상대로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물러서고 물러서다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엘리엇의 미래에 대해서는 그 부모와 다시 한번 대화해 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은 물러나야 한다.
칩거한 시점부터 이미 황권은 포기한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황후를 방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죄인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제 와 황궁을 잠시 비운다고 해서 특별히 문제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걱정인 것은, 지금 공작저가 비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괜히 아이가 거기 갔다가 텅 빈 집을 보고 당황하고 상처받는 쪽이었다.
“가서 아이의 유모를 데려오너라.”
“알겠습니다.”
보통 때라면 황제와 황태손의 행차에 유모가 관여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엘리엇을 가장 잘 알고 보살필 수 있는 것은 그 유모일 터라, 황제는 기꺼이 그녀를 불러들였다.
“이잉. 마사는 그냥 자라고 할 텐데.”
엘리엇이 떼쓰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무얼 하고 싶으냐? 놀이방에 갈까?”
“놀이방이 있어요?”
엘리엇이 깜짝 놀라 물었다. 황제는 웃으며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있지. 네 아빠도 자주 놀러 왔었단다.”
황제는 잠시 망설인 끝에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에 있는 아빠 말고 에리히 말이다.”
그 말에 엘리엇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그 얼굴이 피를 물려준 아비를 꼭 닮았기에 황제는 씁쓸함과 달콤함을 함께 맛보았다.
“하늘에 있는 아빠와 네 아빠는 사이가 좋았거든.”
“진짜요? 아빠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에리히는 원래 속말을 잘 안 하는 편이니 말이다.”
그 말에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 보면 아빠가 더 시끄러울 때도 종종 있었는데 말이다.
그 생각을 하니까 또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었다. 엘리엇은 잠깐 놀이방 생각에 팔렸던 정신이 돌아왔다.
“내일 아침에는 공왕 할아버지도 올 거란다. 그러니까 다 같이 아침을 먹고, 그때 돌아가면 어떠니? 왜 그래?”
엘리엇이 손가락을 쪼물거렸다.
“할아버지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집에 갈래요.”
“그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마사가 허겁지겁 방 밖으로 나왔다.
잠들었던 참이라 구겨진 옷 위에 외투를 걸치고, 머리도 정돈하지 못한 채 황급히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황공합니다. 황손 전하께서 깨신 줄도 모르고 제가 감히…….”
“오늘 밤은 모두에게 힘든 밤이었으니까. 자네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지 않네. 불러오라고 한 것은, 엘리엇이 클라우제너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인데…….”
“도련님,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마사가 엘리엇을 달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염려되는 일이 있는 걸 알고 있으니 자네를 불러오게 한 거야.”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도 된다고 판단하셨다면, 제가 무어라고 반대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알기로, 어린 도련님이 추운 집에 돌아가시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닐 듯하여…….”
빈집이라고도, 불 꺼진 집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으므로 마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돌려서 말했다.
엘리엇이 마사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추워?”
“……네, 도련님. 창문이 깨져서 무척 춥답니다. 그러니까 우리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창문을 고친 다음에 돌아가요.”
엘리엇이 자주 보던 동화책에, 장난을 치던 아이가 창문을 깨뜨리는 바람에 밤에 감기 걸린 이야기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는 마사는 그렇게 말했다.
엘리엇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럼 엄마랑 아빠도 감기 걸려?”
“아아, 도련님. 두 분은 괜찮으셔요. 어른이시니까…….”
마사는 안쓰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황제의 앞인 것도 잊고 엘리엇을 꼭 안아 주었다.
소식이 온 것은 그때였다. 전령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황제 폐하! 왔습니다!”
“음?”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와 부인께서!”
황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리히의 동향에 대해서 그는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북방군과의 전투를 멈추도록 근위대와 제2 친위사단을 보냈으니, 오늘 밤 안에는 마무리 짓고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다.
“가 보자꾸나.”
황제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엘리엇이 마사의 손을 마구 잡아끌었다. 그러다가 어른들의 속도가 성에 차지 않는지 혼자서 복도를 마구 달렸다.
“도련님! 그쪽으로 가도 못 나가요!”
“빨리! 빨리!”
엘리엇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황제의 눈짓을 받은 로건이 엘리엇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사람 팔 위에서도 들썩거리고 뛰어오르려는 엘리엇을 안고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에리히는 황궁 안까지 들어와서야 클레어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고 왔지만, 물에 젖은 몸은 도무지 따뜻해지지 않았다.
거기에 말 위에서 바람까지 맞았으니 아직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굳이 옷을 갈아입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마차를 찾아오게 해 갈아타지도 않았다. 그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클레어도 같은 심경일 터였다.
그랜드 홀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넘친 인파가 정원을 메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식이 벌써 안으로 전해진 듯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기꺼이 길을 열어 주었다.
“괜찮아요. 우리는 내궁으로 갈 거예요.”
에리히에게 어깨를 안긴 채 클레어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랜드 홀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려 해서, 군중은 끓는 물처럼 움직였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클레어 님!”
디트마어와 리나가 제일 먼저 달려왔다. 클레어는 두 사람에게 괜찮다고 손짓했다.
말할 수도 없이 피곤했던 데다가, 공작 부인인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느끼기도 했다.
에리히도 노이만 의장에게 됐다고 손짓하고 내궁 쪽으로 향했다.
로건의 품에 안긴 엘리엇이 나온 것은 그때였다.
“이모!”
엘리엇이 소리쳤다.
클레어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모라고 불린 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게 클레어에게는 엘리엇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눈물이 솟구쳤다. 배 속부터 온통 뜨거워졌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다. 다시는 이 웃는 얼굴을 보고 매달리는 무게를 느끼지 못할 줄 알았다.
또다시 혼자가 되는 줄 알았고, 이 어린아이를 혼자로 만들게 될 줄 알았다.
클레어는 울면서 두 팔을 벌렸다.
로건이 내려 주자 엘리엇이 달려와 온몸으로 힘껏 부딪치듯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클레어가 그 힘을 감당 못 해서 뒤로 넘어지려는 것을 에리히가 뒤에서 받쳐 안아 주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 엄마한테 그렇게 힘껏 부딪치면 뭐라고 했지?”
“우리 이모야!”
엘리엇은 듣지도 않고 소리치고 클레어의 목에 매달렸다. 클레어는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를 껴안았다.
바라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