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가 분명해-232화 (233/263)

#232화

56. 회복기

클레어는 호되게 앓았다.

그녀가 건강하다고는 해도, 병이 없고 일상생활에서 별문제 없이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이지, 육체적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클레어는 운동 신경도 별로였지만, 특별히 몸을 단련한 적도 없었다.

이 날씨에 더러운 강물에 빠졌다가 건져져서, 흠뻑 젖은 채 온몸에 힘을 주고 밤새 두려움과 싸웠다.

긴장을 하고 있던 동안에는 별일 없었던 것 같았지만,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씻고 잔 게 다행이었다. 머리카락에서 아직도 하수도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첫 사흘 동안은 고열이 펄펄 끓는 상태로 그녀는 잠꼬대하듯 신음했다.

“수질 오염을 막아야겠어…….”

그나마 생활 하수 정도나 버려지는 강이라 다행이었다. 폐수로 오염된 시커먼 물이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니.

엘리엇은 또다시 엄마와 격리되어야만 했다.

“싫어! 싫어! 엄마랑 잘래!”

전에 없이 울고불고하며 떼를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폐렴이 엘리엇에게까지 옮으면 큰일이니까.

“또 아빠만 엄마랑 있고! 흐어엉, 엄마랑 같이 잘래.”

“엄마는 아프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지 않았니?”

“엄마아아아, 으아아앙, 엄마아아아!”

에리히는 목 놓아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안아 주다가, 단어 그대로 얼굴을 쥐어뜯겼다.

걷어차인 가슴팍에 멍이 든 것을 보니 많이 컸구나 싶긴 했다.

그나마 사흘째가 되자 열도 좀 내리고, 격렬한 기침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클레어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면으로 된 마스크를 쓴다면 면회가 가능하다는 의사의 조건부 허락을 간신히 얻어 냈다.

엘리엇은 침대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에도 반발했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답게 아픈 클레어의 모습을 보고는 얌전히 손만 잡았다.

그리고 방울방울 눈물을 흘렸다.

클레어는 애써 웃으면서 쉰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아주 용감하게 기다렸다면서?”

“나 용감한 거 싫어.”

“칭찬하는 건데도?”

“나 착한 아이 싫어. 나쁜 아이 할 거야. 하늘에 있는 엄마도, 아빠도, 다 싫어. 엄마도 미워! 흐으으응!”

말꼬리에 또다시 울음이 섞였다. 클레어는 아이를 보듬어 주지도 못하고 손으로 겨우 눈물만 닦아 주었다.

“미안해.”

“엄마 나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손가락 걸고 약속할게.”

“거짓말.”

그러면서도 엘리엇은 클레어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세 번이나 찍었다. 그러고도 불안한지 울먹거리며 호소했다.

“엄마, 아프면 안 돼. 아파서 하늘에 있는 엄마처럼, 흑.”

“안 그래.”

클레어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냥 감기가 너무 심하게 걸린 거야. 진짜야. 너도 그런 적 있잖아?”

“그치만…….”

“내가 우리 엘리엇을 두고 가긴 어딜 가? 엄마 목소리 들어 봐. 너도 이런 적 있잖아?”

“응…….”

결국 엘리엇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클레어는 안아 주는 대신에 머리밖에 쓰다듬어 주지 못했지만, 이내 엘리엇의 손을 꼭 잡고 다시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사나흘이 더 지나자 침대에서 일어날 만했다. 용케도 배 속의 아기도 무사했다.

주치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운이 좋으신 겁니다. 다행히 큰일 겪으시기 전에 아기씨가 제자리를 잡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아니, 컨디션이랑 직접 관련된 건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입덧도 없어졌거든요.”

먹을 걸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었는데, 이제는 입에 넣는 족족 잘 들어갔다.

그간 못 먹은 영양소를 한꺼번에 흡수하기라도 할 것 같았다.

“입덧이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에 입맛이 없었던 거였을까요?”

“아직 원인을 모르는 증상이니까요. 시기상 점차 없어질 때이기도 합니다. 큰일을 겪으신 후라 아기씨가 부인을 위하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진짜로 몸을 안정시키고 보양하셔야 합니다. 출산은 아주 큰 일입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제 몸조심해야죠. 아픈 뒤라서 까라지네요.”

클레어는 그렇게 대답했다.

전에는 보양하라고 하면 화가 날 정도로 뭘 먹을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괜찮았다.

아픈 그녀를 위해 주방에서 전복과 소고기를 넣은 죽을 만들어 주었는데, 자꾸만 버터를 넣거나 푹 끓이지 않고 쌀알이 씹히게 만들어서 클레어는 조금 불만이었다.

그래도 뭐든 먹어지는 게 고마운 일이었다. 여전히 매콤 새콤 한 게 당겼지만, 그건 에리히를 갈아 보자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희망 사항은 금세 파기되었다. 클레어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어 아침 식탁에 나가 보니.

“욱.”

에리히가 입덧을 하고 있었다.

* * *

“어이가 없어서 진짜.”

응접실에 앉아 그간 못 먹었던 버터 듬뿍 쿠키를 차례차례 입에 집어넣으며 클레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는 내가 가졌는데, 왜 당신이 입덧을 해요?”

“내가 뭘.”

에리히는 쿠키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잠깐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았다.

그렇다고 클레어에게 먹지 말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냥 견뎠다.

그를 오래 알아 왔지만,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손과 얼굴을 계속 움직이는 것은 클레어도 처음 봤다.

얼굴도 그랬다. 아니, 그 싸움 직후에도 멀쩡하게 하얀 안색을 하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이었다.

‘못 먹고 계속 토하는 게 힘들긴 하지.’

클레어는 쿠키를 물리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쿠키가 먹고 싶어서 못 견딜 것도 아니고, 그냥 진짜인가 확인차 갖고 오게 해 봤던 것이었다.

파벨이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대신 변명했다.

“사랑이 깊어서 그러신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애 하나 더 생긴다고 책임지는 게 힘든 처지도 아니잖아요. 스트레스 받을 게 뭐가 있다고?”

클레어는 반박했다. 그리고 에리히를 향해 말했다.

“아빠 되는 기분만 내면 될 사람이 왜 이래요? 그렇다고 나한테 동조했다기에는, 입덧하는 거 본 적도 없으면서?”

“…….”

“다른 데가 아픈 거 아니에요? 구역질하는 거 보니까 투정 부리는 건 아닌 것 같고.”

“내가 엘리엇도 아니고.”

“그럼 엄살인가?”

“뭐?”

에리히가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그 얼굴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탈출해서, 걸어서 수도까지 왔을 때보다 얼굴이 더 안됐다.

“임신한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 입덧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신경 안 써도 돼.”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며칠 식사 거른다고 죽을 것도 아니고. 난 됐어. 네가 제대로 먹게 되었으니 다행 아닌가?”

“이왕 대신 해 줄 거면 낳는 걸 대신 해 주지. 만삭 기간이나.”

“…….”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지저분해요?”

이번에도 에리히는 침묵했다. 네가 기르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냥 참았다. 반박하고 싸울 기력도 없었다.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한 건 좀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이스크림을 사다 놓으라고 할게요. 난 그게 제일 낫더라고요.”

“음…….”

“입 벌려 봐요.”

이유도 모르면서 에리히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클레어가 그의 입에 레몬 사탕을 하나 넣었다.

“음.”

“안에 레몬 꿀을 넣은 거예요. 이걸 먹으면 속이 좀 가라앉더라고요.”

에리히는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효과가 좀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집사가 소식을 알렸다.

“황제 폐하와 공왕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시종이 문을 열었다.

행차는 퍽 간소했다. 호위는 로건을 비롯해 근위대 몇 명이 전부였고, 시종도 둘뿐이었다. 공왕 쪽은 무어 공작이 동행하고 있었다.

에리히의 안색이 변했다. 시종 하나가 들고 있는 상자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읏.”

그는 애써 입을 막지 않고 짧은 신음으로 참아 냈다. 클레어가 물려 준 레몬 사탕으로도 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당황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황제가 물으려는 찰나, 에리히가 견디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체면을 생각해 그렇게 말한 것이지, 사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쳐나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손님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아렌 공왕이 물었다.

“에리히 공은 건강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아니, 물론 이번 일로 그도 무척 힘들었을 테지만…….”

“입덧이래요.”

클레어가 웃는 얼굴로 즐겁게 대답했다. 무어 공작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놀랐다.

“하하.”

아렌 공왕이 재미난 것을 보기라도 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외숙질 간인데도 닮은 곳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에리히 공이 황실의 핏줄을 짙게 받은 게 느껴지긴 하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고생하셨었다네. 맨프레드 대공도 그랬지, 아마?”

아렌 공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이제 웃으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