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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분명해-233화 (234/263)

#233화

클레어는 약간 어이없는 기분으로 웃어 버렸다. 드라마에서 간혹 남편이 입덧하는 걸 보긴 했지만, 흔한 일은 아닐 텐데.

“그런 게 체질과도 관계있나 보지요?”

황제도, 맨프레드 대공도 아내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처럼 들리긴 했다. 에리히가 그럴 줄은 몰랐지만.

클레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열흘 전 쓰러지기 전에 황궁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때는 좀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상 제대로 된 만남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제국 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은 지 벌써 10년이 되어 가는데,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알현장이나 그랜드 홀에서, 혹은 파티 같은 곳에서 무릎 구부리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적인 장소에서 마주 앉아 인사를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말이다.

아렌 공왕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깊어서 그렇다고들 하는데.”

“이렇게 되니, 더더욱 우리가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네가 불편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도 껄끄럽다고 생각했었지만.”

황제가 말했다.

아무래도 임신한 데다가 아픈 후였다.

완전 개방 상태인 황궁이 안전한가도 문제였으나, 온다고 해도 예법 때문에 괜히 몸에 부담을 줄 수 있겠다 싶어 방문으로 결정했다.

그러고서도 황제는 걱정했었다.

에리히는 그럴 리 없겠지만 클레어로서는 집에 황제의 행차가 들어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속 보러 와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앓고 있었던 데다가 모든 사람에게 휴식이 필요한 시기였으니까.”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괜찮아요.”

무어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온다고 해도 남작이 엄청나게 티파티나 오찬을 준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방문한 것이니, 이해해 주게.”

“그럼요. 사실 지금은 손이 닿지 않아서, 준비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다과는 우리가 준비해 왔어. 남작이 고구마와 얼린 우유를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게 당이랑 탄수를 제일 쉽게 보충해 주니까…….”

클레어는 민망함에 뺨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그게 벌써 소문이 났을 줄 몰랐다.

시종이 가져온 상자 하나에는 군고구마 아이스크림이, 다른 하나에는 초콜릿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후자는 엘리엇 몫인 듯했다.

황제가 아닌 척하면서 살짝살짝 응접실 문 쪽을 신경 썼다.

“감사합니다. 엘리엇이 좋아하겠어요. 생일 아니면 이렇게 커다란 케이크는 주지 않는데.”

“아, 교육적으로 안 좋다면…….”

“괜찮아요. 며칠 정도는 어리광을 받아 주어야지요. 그리고 황제 폐하를 만나 뵙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도 좋은 일이고요.”

그 말에 황제가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면 데려오라고 유모에게 말해 두었어요. 어젯밤에 늦게 잠들었거든요.”

같이 잤으면 좋았겠지만 클레어는 아직도 기침을 하고 있는 터라, 역시 옮을 것이 걱정되었다.

마스크를 쓴 채로 잠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엘리엇은 클레어가 떠나는 게 걱정되는 것처럼 눈을 안 붙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진짜로 늦게 잠들고 말았다.

아침에 잠깐 일어나 인사를 하고 밥을 먹었지만, 못 참고 금세 낮잠이 들어 버렸다.

어제, 그제, 연이어 엘리엇을 만나러 왔던 아렌 공왕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오히려 잘됐네. 제 일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아이가 들을 이야기는 아니니까.”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결심을 세운 모양이었다.

“의회 쪽 소식은 간단히 들었습니다. 퇴위는 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고요.”

“그래.”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회의 반발이 상당했다네. 내가 물러나면 당장 엘리엇이 상속하게 되는데, 너무 어린 것도 어린 것이지만, 에리히가 섭정이라도 하게 되면 또다시 이번 같은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는 것 같더군.”

“그랬다가 자칫하면 황권이 강해지면서, 정작 그걸 쥔 사람이 황제 폐하가 아니게 될 테니까요. 황실을 폐지하자는 쪽으로는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그런 의견도 있는 모양이지만, 귀족원의 반발이 상당해서 말이야.”

무어 공작이 설명을 덧붙였다.

“영주들의 과반수가 아직은 귀족이야. 황제 폐하께서 위에 계시지 않으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더욱 문제가 가중되겠지.”

“아렌과 로멜이 전쟁을 다시 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상징 정도로 앉아 있는 게 좋겠다는 말에 동의했다네.”

황제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죄인인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고, 이미 물러나겠다고 말한 데다가 권한도 모두 하원으로 넘긴 터이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그냥 있으라더군.”

“아아. 이해했습니다.”

“의회가 새로 구성되면, 거기서 또 새로운 결론이 나오겠지. 그때까지는 보류하기로 했네.”

황제가 말하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초조한 듯이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흩어지려는 생각과 의지를 다시 다듬으려 할 때마다 생긴 습관이었다.

전에는 늘 손안에 파란 돌을 쥐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 없이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클레어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엘리엇은 이미 가혹한 일을 겪었다. 처음부터 황위 따위와 관계없이 행복하게 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유년 시절만큼은 자신의 슬하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아마도 욕심일 것이다. 황제가 제 자식을 그렇게 키우려다가 이 모든 사달을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황제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듯이 말했다.

“사실, 엘리엇을 내가 키우게 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네.”

“네…….”

“내 아들이 남긴……, 하나뿐인 자식이니까. 아니, 지금까지 자네가 소중히 키워 왔고, 동생의 아이라고 해서 손자를 생각하는 할아비의 마음보다 모자랄 거라고도 생각하지는 않네만…….”

“아니요. 이해합니다. 부모를 잃으면, 아무래도 조부모가 먼저 거두게 마련이니까요.”

“알아주어 고맙네.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더군. 엘리엇이 자네를 많이 사랑해.”

이모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 말이 엄마를 대신하는 말이다.

부모가 있다면, 조부모가 나설 일은 없다.

황제는 마음이 쓰림을 느꼈지만, 또 자신이 제러드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나설 주제도 못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엇을 황태손으로 책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교육에도, 양육에도 법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엘리엇이 행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는 것이지.”

“네…….”

“의회에서 나더러 다시 집정하라고 할 리는 없어. 황실의 양육 법도라는 것도 앞으로는 바뀔 수밖에 없을 거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믿음직한 친척이나 훌륭한 가문에 보내어 양육하는 풍습이 옛날에 있었으니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걸세.”

황제가 고개를 숙였다. 콧날로 눈물방울이 떨어져 무릎을 적시는 게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와 에리히가 아이를 잘 보살펴 주겠지만, 부디 잘 부탁하네.”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그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제 자식인걸요. 오히려 제가 폐하께 많이 사랑해 주시라고 부탁드려야 합니다.”

로멜이라는 성을 물려받게 될지, 아니면 황실이 폐지되고 결국 클라우제너 소속이 될지, 혹은 처음 계획했던 대로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엘리엇은 그녀의 아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엘리엇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 것은 그 오후의 일이다.

반짝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엘리엇은 소리쳤다.

“엄마!”

엄마는 없었다. 하지만 아빠 집의 자기 방이었다.

햇살이 환하게 들었다. 바닥에는 동화책이 흩어져 있고, 장난감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엘리엇은 안심했다. 여기는 아빠 집이다.

아빠는 아빠 집이라는 말에 뭔가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엘리엇에게 그건 아주 좋은 말이었다.

아빠 집에는 늘 재밌는 일이 가득했으니까.

엄마는 방으로 돌아가서 자고 있을 것이다. 엘리엇은 이제 안심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오자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찰스 외삼촌이 찌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찰스 외삼촌!”

집에 돌아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다시 왔나 보다. 반가운 마음에 엘리엇은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찰스는 움찔했다.

엘리엇을 사랑하긴 했지만, 황손이라고 할 때도 부담이 너무 컸는데, 이제는 황태손이라고 한다.

클라우제너라고 할 때만 해도 아이를 핥아 먹을 기세로 좋아했던 아버지 제임스조차도 움찔했는데, 그가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여기 앉아서 엘리엇이 깨어나기를 기다린 것은 클레어가 을러댔기 때문이었다.

[엘리엇이 이래저래 불안한 것 같으니까 너라도 옆에 있어 줘. 당연히 내가 데리고 있어야 되는데, 감기 옮는 게 좀 그래서.]

[마, 마사가 있잖습니……. 있잖아.]

평생 반말 쓰고 살아온 사촌 누이한테도 존댓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사도 있을 거고, 집사랑 보모도 불러올 거야. 그리고 너도 좀 있어. 엘리엇이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사람들을 여럿 데려와서 주변을 좀 안정시키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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