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57. 재판
단시간에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에른스트령에는 이미 징집된 병사가 수만 명 단위로 모여 있었다.
북방군이 제때 철도와 전신을 끊지 않았다면, 이들은 이미 수도와 아렌으로 밀려들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가 끊기면서 육로 이동은 어렵게 되었고, 해로는 빅토리아 대공 때문에 막혔다.
사우스랜드 곡물상이 배신하여 클레어에게 붙으면서, 군량의 확보조차 여의치 않게 되었다.
사실상 군대로 막힌 곳은 하나도 없는데도 식량이 떨어진 채 포위당한 성 같은 상황이 되어, 에른스트 공작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황후 폐하에게서 다른 지시는 없는 건가? 수도로부터 연락은?”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공작 각하.”
“황자 전하께서 친위사단을 거느리고 오시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되었느냐, 황자 전하께서는?”
그 소식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에른스트령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상당수의 지방군이 모여 새로 편제를 이룬 상태다.
북방군 중에도 몇 개 부대는 이탈하여 이쪽과 합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결단을 내린다면 독자적으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황자와 친위사단의 행방만 반복해서 물었다.
마르고트로부터 이럴 때를 대비한 지시는 받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모를 자처하며 이런저런 말을 귀에 불어넣는 자는 많았으나, 애초부터 그는 간담이 작아 제가 스스로 판단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황제 특사 앞에서 바로 납작 엎드린다는 결단도 쉽게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북방군이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른다는 말을 또 어찌 믿느냐? 우리가 수도와 연락이 끊겼다는 것을 알고 클라우제너 공작이 수작을 부린 것일 수도 있어. 황제 폐하께서는 서거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면 수도로 진군하시겠습니까? 인편 연락이 닿는 곳까지 내려가면 황후 폐하께서 지시를 내려 주실 겁니다.”
“어……. 기다려 봐.”
그 결단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에른스트 공작은 더듬거렸다.
그러는 동안 문을 열어 황제 특사를 받아들인 것은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소극적이었으나, 이 일에 친정까지 연루된 것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먼저 문을 열면, 마음 약한 황제는 친정까지 반역죄로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친정도 황실의 방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실 특사가 들어오자 에른스트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인장 반지를 벗어 내주었다.
* * *
클레어는 노이만 의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나니, 행정 공백이 생긴 거군요.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관리가 수도 인근에 남을 게 아니라면 자기 고향 쪽으로 발령되기를 원하니, 에른스트령의 행정관은 에른스트 출신이 많을 테고요.”
“그렇습니다.”
노이만 의장이 무겁게 말했다.
“에른스트만이 아니라 각지의 행정관 대부분이 해임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연루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특별히 황후의 명령을 받아 행동한 게 없었어도, 지금까지 로멜 우월주의에 따라 정책을 시행했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하죠.”
“맞습니다. 지금 황제 폐하께서 마르고트 에른스트의 죄를 오로지 황실의 혈통을 속였다는 것 하나에 한정시켰기에 아직 죄가 씌워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정책 결정에서의 부당한 행위나 아편 유통을 눈감은 문제가 재판소에 올라가면, 남을 사람이 별로 없겠군요. 사실상 지금까지 힘 있는 영주가 맡고 있는 곳은 행정관이 가신이나 다름없기도 했고.”
그 문제에 대해서도 에리히와 이야기해 보긴 했다. 하지만 직접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늘 하듯,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온 말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 단번에 모든 행정관을 갈아 치울 방법은 없다.
당장 총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공백을 메우는 게 제일 중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결국 새 의회가 결정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일단 도와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네요. 사우스랜드 곡물상을 통해 에른스트 공작령의 행정을 도와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오오.”
“그쪽에서도 원래 군량으로 보내려던 곡물 재고를 창고에서 내보내지 못해서 곤란을 겪고 있었으니 차라리 잘되었어요. 해로를 통해서 보내고, 식량을 배급하면서 징집병의 신원을 파악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도록 하죠. 비용은 에른스트 공작이 기꺼이 지불해 주리라 믿어요.”
“그럴 겁니다.”
“아마 민간에도 배급이 필요할 테죠. 공단 쪽도 맡아 줄 수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배급을 개인에게 하면 어느 정도는 노예 현황도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해 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안 그래도 자기 잘못을 덮기 위해 행정관들이 증거를 인멸할까 봐 염려하던 참입니다.”
“상단이 그걸 전부 견제하거나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대강 분위기 정도는 알 수 있을 거예요.”
암살이나 살인 증거는 대부분 이미 사라졌을 테지만, 정책 문제나 양귀비 유통 경로는 그러지 못한다.
마약상이 된 자들이 그렇게 쉽게 자기 이익을 포기할 리도 없었다.
사라질 증거를 염려할 게 아니라, 새로 생겨날 범죄를 염려해야 할 판이었다.
“상단에 부담이 크게 가해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우스랜드 곡물상이 죄를 갚으려면 지난 20년 동안 만든 상단의 기반까지 모조리 뽑아다 반납해야죠. 염려 마세요. 총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지금은 행정관들은 거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노이만 의장님은 염려 없으시겠지만, 하원은 난리들이죠?”
“거의 대부분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노이만 의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는 수도에 있어도 크게 상관없었다.
의석이 지역별로 정해진 수가 배치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선거권은 재산세에 비례했기 때문에 투표권을 많이 가진 자와만 이야기하면 되었다.
귀족이나 지역 유지가 밀어주면, 단 한 사람의 힘으로도 당선이 가능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체제가 바뀌었다. 세금 장부를 기준으로 이름이 실린 자는 모두 한 표씩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황궁에 들어왔던 시위대가 지키고 서서 기어이 얻어 낸 권리였다.
“흘린 피가 적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클레어는 조용히 말했다.
상원도 체제를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작위 귀족들이 영주로서 자기 영지의 대표자 노릇을 했으나, 이번 일에 연루된 가문이 많아 새삼 세어 보니, 이미 영지를 팔아 버린 자가 많았다.
이쪽은 하원 총선거가 끝난 후에 다시 정비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때까지는 권리가 정지된 셈이었다.
당연히 반발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황궁과 의사당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지금도 쉬지 않고 의사당 앞에서 연설회와 집회가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정면으로 불만을 말할 만큼 담대한 자는 없었다.
“총선거 비용은 황제 폐하께서 사재로 대기로 하셨습니다.”
“그쪽은 걱정 없겠네요. 그보다 전 재판소 쪽이 걱정인데요. 아니.”
클레어는 거기에서 말을 멈췄다.
노이만 의장이 관여해서 좋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처럼 두루 여러 사람과 부드럽게 지내는 쪽이 좋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말해서 나서면, 마치 명령하는 것처럼 되고 만다.
‘쉽지 않네, 정말.’
딱 하나만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데.
전 같으면 망설임 없이 저질렀을 것이다. 델포드 남작이 군중에 섞여서 무슨 일을 좀 하더라도, 그저 하급 귀족이 한 일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든 표면에 드러나면 황태손의 이모가 제 조카를 황좌에 올리기 위해서 음모를 꾸몄다고 기록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느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낫다. 이 일이 대귀족의 음모와 권력 다툼으로 끝나서는 안 되니까.
그렇다고 결말이 보이는 문제에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공작 부인, 손님이 오셨습니다. 슐츠 경이십니다.”
“전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노이만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레어도 일어서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얼굴 뵙고 서로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다음에는 보좌관을 보내 주셔도 괜찮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찾아뵈어야지요. 의사당에도 한번 얼굴을 비쳐 주십시오. 다들 기뻐할 겁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안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클레어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노이만 의장이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 물러갔다. 클레어는 손등을 싸쥐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응접실로 안내된 슐츠 하원 의원은 긴장하여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여기서 잘해야 해.’
이대로라면 그는 에른스트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정계 입문 당시부터 에른스트의 후원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에른스트나 황후의 법적 문제에 깊이 관여한 적은 없고, 법률 고문 노릇을 하거나 비공개적으로라도 조언한 바도 없으나, 그걸 누가 믿어 주겠는가.
그레이도 먼저 선을 그었다.
[선생님의 입장은 이해하고, 또 도 넘은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닌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제가 선생님을 위해 남작님께 청탁을 넣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는 최선을 다해 돕겠노라고 말하고, 지금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증거를 모아 주고 있었다.
그러니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은 처음부터 포기했다. 이렇게 저쪽에서 직접 불러 줄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