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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분명해-236화 (237/263)

#236화

클레어는 부드럽고 평화롭게 말했다.

“만찬에서 뵌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조용한 자리에서 만나 뵙는 것은 아마 처음이지요?”

“저야 늘 한번 찾아뵙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이때까지 그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 하는데 죄송이라뇨. 슐츠&셔우드 같은 쟁쟁한 법률 사무소가 델포드의 일을 신경 써서 돌봐 주신 것도 감사드려야 했고요.”

“만일에 부인께 도움이 되었다면, 그건 그레이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 돌아간 것입니다.”

“슐츠 사무소가 전혀 힘이 없는 곳이었고, 또 경께서 그레이를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설령 그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지금처럼 명성을 쌓지는 못했을 거예요.”

클레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록 지금은 제가 남편의 이름을 빌려 괴르델러 백작님 같은 분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전에는 오히려 슐츠&셔우드가 델포드 남작가를 그렇게 신경 써 주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인걸요.”

“동료 덕에 제가 감사를 받다니 민망합니다.”

“이건 개인적인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고, 또 그레이가 신뢰할 만큼의 인품을 경께서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제가 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드린 말씀이랍니다.”

슐츠는 모호한 미소로 표정을 가렸다. 클레어가 말한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인품을 칭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복잡한 일일 수 있었다.

그는 아렌계 평민 출신의 법률가이면서, 에른스트의 후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가신이 아니었으므로 직접적으로 명령을 받거나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지는 않았으나, 필요할 때는 대체로 판단을 에른스트에 유리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피를 흘린 사람 중 하나였다.

아편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뒤부터 곧바로 중립을 지켰고, 계엄령이 떨어진 이후에는 노이만 의장의 설득에 따라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것은 아편이나 노예상이 적당히 흐려진 도덕심으로도 눈감고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하나는 슐츠&셔우드 법률 사무소가 그레이의 뜻에 따라 델포드 남작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다른 귀족 가문이나 중류 계급 출신의 의원들과 다르게 그는 가난한 집 태생이었으므로, 하원 의원이 특권을 잃으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쨌든 그는 며칠 전에 시위대의 앞줄에서 계엄군이 발포한 총탄에 맞아 팔에 부상을 당했다.

이만하면, 그의 입장은 충분히 전향자로 보일 수 있었다. 복합적인 상황에서 시민을 택한 셈이다.

클레어는 그에게 차를 권하면서 두루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슐츠가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말을 꺼냈다.

“총선거 후에 내각도 다시 구성될 거긴 하지만, 그때까지는 슐츠 경의 법무부 장관직은 유지된다고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임시로 사무 처리를 하고 있는 정도입니다만.”

“재판소도 새로 구성될 때까지 일단 일을 할 예정이라고 들었고요.”

“하지 않고 일을 쌓아 둘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너무 정치적으로 중요한 재판은…….”

“시간을 끄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주위에 별로 보이지 않더군요.”

클레어는 슐츠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마르고트 에른스트의 죄를 황실의 혈통을 어지럽힌 것으로 한정 지은 것은, 폐하 당신께서 지금까지 사사롭게 지내 오셨기에, 중요한 국무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지만요.”

“자격이 없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슐츠 경께서는 굳이 말을 꾸미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폐하께서는 국무를 의회에 위임하신 뜻을 지키고자 하신 것이니까요. 사실 반역죄라는 것은 가둬 두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지요.”

슐츠는 헛기침을 했다.

“다만, 사사로운 죄로 감옥에 갇힌 지 수개월에서 1년 이상 지난 뒤에야 판결이 내려지면, 사람들은 그녀의 진짜 죄가 무엇인지 잊을 겁니다.”

사형을 시키는 건 쉽다. 황제 암살 의혹의 증거까지는 필요도 없었다.

지금 반역죄로 그녀를 가둔 것처럼, 거짓 황자를 내세워 황위를 계승시키려 하고, 황권을 휘둘러 계엄령을 내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아니면, 지금 석방해서 분노한 군중 앞에 던져 주어도 될 것이다. 돌에 맞아 죽거나 단두대에 목이 떨어지리라.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재판에서 온당한 방법에 의해 온당한 처벌이 내려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마르고트 에른스트라는 이름이 무고한 희생자나 영도자의 이름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로멜 우월주의는 어디까지 뿌리내렸을까?

처음에는 이익이 사람들을 쉽사리 물들이지만, 일단 뿌리내린 문화는 합리를 벗어난다.

로멜이 더 부유하고, 인구가 더 많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는다.

지금의 분노와 열기가 가시고 나면, 1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혼외자를 속여서 남편의 자식으로 키우는 건 당연히 잘못이지만, 그게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처형당할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대로 재판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크게 남는 것은 그게 될 것이다.

마르고트가 사적인 과실 때문에 처형당한 황후로 남으면, 훗날 그녀의 공적을 들어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을 게 분명했다.

“저는 그녀가 확실하게 아편과 노예, 내전 문제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시위대의 열기는 총선거로 옮겨 갔으니, 그게 끝나면 관심도 식어 버릴 테지요. 생업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다음에 재판소를 다시 구성해서 또 몇 달이나 걸리는 재판 끝에 판결을 내리면, 그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마르고트는 이제 곧 육십이다. 체구가 작고 마른 데다가 흰머리가 많아서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외적으로 더욱 초췌해지리라는 것은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됐을 때, 또 그때까지 재판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싹틀 것인가?

“말씀하시는 의미를 알겠습니다. 게다가 레이디 아우구스타가 아직 자유로운 몸이지요.”

“네. 그것도 걱정되는 일이에요.”

아우구스타의 손에는 아직 막대한 재산이 남아 있다.

황후의 비자금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편 거래의 규모로 생각하건대 아마 돈으로 살 수 있는 의석도 절대 적지 않을 것이다.

클레어는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러니, 아직 사람들의 관심이 남아 있을 때 재판을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지금의 재판소 고위직들에게 면벌부를 발급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재판소를 새로 구성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은데요? 지금 판사로 임직된 법률가라면 대부분 로멜인일 거예요. 제 말이 틀린가요?”

슐츠가 대답하지 못했다.

아렌인이 없지는 않았으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로멜 가문이 후원자로 붙어 있거나 자진해서 친로멜파로 행동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클레어가 문득 입술을 한번 어루만졌다. 그리고 무심코 하려던 말을 참은 후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 사람 개인을 별로 믿지 않아요. 그것보다는 눈치를 보게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민의 힘이 가장 강한 이 순간에. 물러나게 하는 건 그 뒤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행정관부터 법관까지, 모두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건 당장 몇 명의 죄를 묻는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전향자를 대접하는 게 오히려 나을 것이다.

슐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에른스트의 법률 고문단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인연이 있긴 합니다. 아마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던 사람도 여럿 있을 겁니다.”

“새로운 증거가 풀리면, 여론도 바뀌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슐츠가 고개를 숙였다. 이거면 확실하게 연루되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다.

“람스베르크 의원과도 이 일에 관해 의논해 보셨습니까?”

“하지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슐츠는 그렇게 대답하고, 클레어와 인사말과 아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슐츠를 배웅한 후에 거실로 돌아오자, 에리히가 무화과와 벌꿀이 올라간 빙수를 앞에 놓고 고뇌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달아.”

“당분이라도 섭취해야죠. 안 그러면 쓰러져요.”

“…….”

“토하지 않고 뭐라도 넘길 수 있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아니, 하지만…….”

“맛있잖아요?”

클레어는 그의 앞에 앉아 숟가락으로 빙수를 한술 떠서 내밀었다.

에리히가 미간을 찡그렸다. 구역질하지 않는 것을 보면 먹고 싶은 게 분명한 것 같은데 말이다.

“자존심이 뭐길래.”

“여기서 자존심 얘기가 왜 나와?”

“단게 맛있어서 자존심 상한 거 아니에요?”

그러자 에리히의 홀쭉해진 볼에 노기가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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