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날 뭘로 생각하는 건가?”
“절대 말랑해지지 않으려고 자존심 지키는 남자.”
클레어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먹어요. 당뇨 걱정도 없고, 아기가 잘못될 우려도 없는데. 뱃살은 나중에 빼면 되잖아요.”
“…….”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클레어가 말하는 순간부터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종종 그녀가 배를 만지며 뿌듯해하거나 재미있어하며 건드리곤 했으니 더욱.
그러고 보니 입덧이 시작된 뒤로, 기력이 없어서 단련은커녕 제대로 운동조차 하지 못했다.
“좀 쪄도 괜찮아요. 본바탕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고 그의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어 당겼다.
“클레어.”
“근 손실 나는 게 더 싫으니까 얼른 먹어요. 절반은 우유잖아.”
에리히는 좀 더 투덜거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지만, 얌전히 그녀가 다시 떠 주는 빙수를 받아먹었다.
시원한 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건강한 체질이라 좀처럼 아픈 적이 없었기에 속이 풀리는 것도, 미열이 있는 입 안이 서늘하게 기분 좋아지는 것도 거의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맛있어요?”
“음…….”
그가 대답을 얼버무리자 클레어가 엘리엇을 칭찬할 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리히는 그 손을 쳐 내는 대신 얌전히 두 번째 숟가락을 받아먹었다.
“그것참. 내가 괜찮아졌으니까 마음 풀어져서 먹여 주는 거예요. 입덧 중일 때는 진짜로 머리 쥐어뜯고 싶었는데.”
“어차피 나중에 뜯을 작정 아닌가?”
“윤기 없이 푸석한 거 보니 그럴 마음 좀 없어졌어요. 반질반질할 때가 공격할 맛이 있지.”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그의 눈 밑을 쓰다듬었다.
오이라도 얹어 줘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것에도 구역질이 날 테니 그럴 수 없었다.
에리히는 그녀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으려고 했다. 클레어는 그 손을 방어하며 말했다.
“그러면 또 한두 술 뜨고 말 거잖아요.”
“괜찮다니까.”
“말만 그렇지. 더 엄살 부려도 돼요. 괜찮아요.”
클레어가 그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에리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프지 않을 때는 환자 취급이 기꺼웠으나, 입덧이라고 돌봐 주려고 하니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얌전히 빙수를 더 받아먹었다. 자존심이 문제였지, 싫은 건 아니었다.
“엘리엇은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던데.”
“매일 물어봐요. 언제 낳느냐고.”
“그렇군.”
“남동생이었으면 좋겠다네요. 같이 놀 만큼 크면, 제가 귀찮다고 할 나이일 것 같은데. 당신은 어때요?”
“뭐가?”
“역시 아들이 좋아요?”
“상관없지 않나? 하나만 낳을 것도 아닌데.”
에리히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클레어는 그의 오뚝한 코를 꼬집었다.
“자기가 안 낳는다고 쉽게 말하긴. 이 고생을 또 하라고요?”
에리히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셋은 낳아 준다며?’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걸 자신이 또 겪는 것부터 클레어가 다시 겪는 것까지,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클레어가 킬킬 웃었다.
“낳는 것까지 반 나눠 주진 못하겠지만, 완전히 혼자 고생하는 건 아니라서 위안이 되네요.”
에리히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클레어는 그의 손등을 탁탁 두드렸다.
“괜찮아요. 당신과 달리 나는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무엇을 각오하든 그 이상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에리히는 숟가락을 들고 있는 클레어의 손을 잡아 내렸다. 클레어는 웃었지만, 굳이 그의 입에 다시 빙수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가?”
“쉬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마님,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방문하셨습니다.”
“그래요?”
약속을 따로 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처지려는 에리히의 눈썹을 위로 쓱쓱 문질러 끌어 올려 주고, 자신의 거실로 향했다.
* * *
“휴…….”
“고민이 많은 얼굴이네요.”
거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클레어가 말했다. 리나는 얼른 일어섰다.
“클레어 님.”
“괜찮아요, 앉아 있어요. 와, 꽃 차군요. 리나 양이 가져왔어요?”
리나의 앞에는 투명한 티 포트와 손가락 세 개만 한 크기의 꽃 차 덩어리, 뜨거운 물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리나는 방긋 웃었다.
“클레어 님은 요즘 커피도, 홍차도 드시지 않으니까요. 이게 그렇게 맛있진 않은데, 예쁘긴 하더라고요.”
리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찻잔 안에 꽃 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클레어는 꽃잎이 펼쳐지면서 맑은 노란색이 되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국화 향 같은 향기가 퍼졌다.
“향기도 좋아요.”
“맛없으면 이걸 같이 넣으라고 하더라고요.”
리나가 얇은 종이에 싸인 갈색 설탕 덩어리를 건넸다. 확실히, 단맛과 이 향기가 섞이면 입이 즐거울 것이다.
클레어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 찻잔에 넣었다. 리나가 상냥하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이제 괜찮아요. 아팠던 끝이라 체력이 좀 달리긴 하는데, 그래도 입덧할 때에 비하면 천국이죠, 뭐.”
예상대로 차에서는 단맛과 향기가 났다. 클레어는 즐겁게 그걸 한 모금 넘겼다.
사실 남편과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하면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리면, 아무것도 아닌 이런 대화마저도 몹시 즐거웠다.
슈나이더 백작가의 안부를 묻자, 리나는 백작이 영지를 처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귀족원에 대해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생각이 많아졌나 봐요. 사실 아버지도 귀족원에 거의 출석조차 하지 않는 분이었으니까요.”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하면 그런 것이고, 탐욕을 위해 나라를 훔치지 않았다고 하면 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죠.”
“네.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 방치했으니, 더 이상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하원에서 만일에 적당한 보상을 주고 영지를 회수하겠다고 하면 내놓고, 그러지 않는다면 상원 의석을 영구히 포기하는 조건으로 장원도 팔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뭔가를 하시려는 건가요?”
클레어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상원 의석을 포기하는 것은 슈나이더 백작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놀랄 만한 일이 아니지만, 장원은 문제가 다르다.
토지는 가문을 유지하는 가장 큰 재산이다. 다른 사업을 하려는 것도 아니면서 땅을 처분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위에 딸려 있는 장원과 재산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예 처분해서 둘째 오빠와 저에게 나눠 주실 거라고 해요. 작위는 큰오빠에게 미리 계승시키고요.”
“그렇군요.”
“놀라시네요?”
“보통은 그러지 않으니까요. 설령 둘째, 셋째에게 어느 정도 상속해 줄 의향이 있더라도, 유언장에 남기잖아요.”
“카탸 부인의 이름이 계속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상, 아버지가 가주로 계시는 것 자체가 가문에……, 아니, 저희에게 부담이 될 것 같다고요.”
그리고 슈나이더 백작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내 어리석은 실수로 말미암아, 리나를 잃었던 것만이 아니라 너희 모두에게 고통을 안겼구나. 사실 한 가문의 가주로서도, 슈나이더의 영주로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옳은 일은 아니고, 어찌 보면 무책임할 수도 있겠다만, 그래도 나는 내 자식인 너희들이 더 중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원만 해 주마. 하고 싶었던 일이 있으면 하고, 슈나이더를 버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려무나. 이 이상 의회에서 증언 같은 것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나는 시골로 내려가서 조용히 지낼 작정이다.]
그리고 리나에게는 또 다른 말을 했다.
[네가 바라는 일을 하려면 큰돈이 필요할 거다. 내게 달리 도울 방법이 없어서 미안하구나.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께서 잘 이끌어 주시겠지.]
[아버지.]
리나는 당황했다. 슈나이더 백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리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녀는 클레어와 별개로 시민 화합의 상징 같은 것이 되었다. 본래부터 유명세가 있었던 데다가, 백작의 딸이 시민의 편에 섰다는 것으로도 그러했다.
그것이 그녀는 민망했다. 그저 스테판의 손이 피에 젖는 것을 막고 싶었을 뿐이다.
그날 황자 앞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저 이제 더 이상 귀족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 덕분이었지,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의지가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주목을 모으는 것을 넘어서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해 버렸다.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클레어가 아닐까? 리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