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아우구스타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온갖 곳에서 배신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인지.
“고맙구나. 지금은 믿을 만한 사람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때라…….”
“소문을 들었습니다. 총선거에서 재판소의 고위 간부도 뽑는다지요?”
스테판은 그렇게 물으면서 슬그머니 아우구스타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타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표정을 숨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도 그녀는 스테판을 안쓰러워했고, 잘 대해 주려고 노력했다.
스테판은 발레리노다.
어릴 때부터 배우들과 부대끼며 살았고, 아무리 귀족과 정치인의 가장이 배우들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라고 해도, 연기를 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우구스타는 스테판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감금된 마르고트와 연락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날, 기둥에 묶인 마르고트와 확실히 눈이 마주쳤었다.
그러니 무슨 수단으로든 연락을 하고 있다면, 자신이 배신했다는 것을 아우구스타가 모를 리 없었다.
‘좀 믿어 봐도 될까?’
그는 지금까지 황제나 클라우제너나 하원이나 공평하게 믿지 않았다.
무능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부정했으니까. 설령 이제 와 황제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해도, 하원이 유권자가 두려워 에른스트에게서 돌아섰어도, 진짜로 마르고트를 단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에른스트 공작이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정작 마르고트는 몇 달이 지난 후에 보석으로 풀려나든, 집행 유예로 풀려나든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반격이 시작되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스테판은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황후에게 굴욕을 주는 일에 집중하지 말고 빨리 쏴 죽여 버리는 것이 좋았으리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는 아우구스타의 힘을 빌려 감옥에 숨어들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감시가 철저하다면, 황제든 누구든 진심으로 마르고트를 쳐 낼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타만 막을 수 있다면, 그것도 가능할 것 같다.
‘재판도 굴욕이겠지.’
그리고 자신의 원한도 이미 그녀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쁘지 않다. 가볍게 공작할 만한 일이 떠올랐지만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스테판은 평정한 얼굴을 지킨 채 아우구스타를 바라보았다.
연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부분에서는 스테판이 한 수 위였다.
아우구스타는 그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소장부터 간부까지 일괄 사임했다. 버티다가 더 불명예를 쓰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물러나서 변호사로 돌아가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염치가 없군요. 장부를 까면 저희들도 수렁에 빠져 죽을 텐데.”
“그러기 전에 이쪽을 공격하려고 할 거다. 그리고 카탸 슈나이더의 장부가 람스베르크 의원에게 있기도 하고.”
스테판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지금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재판소 쪽과도 뭔가가 얽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보다도 총선거로 판사를 선발한다면, 재판에 대한 관심은 꺼지지 않을 거야. 오히려 총선거의 열기가 옮겨 가겠지.”
“젊은 법률가들이 그것을 노리겠군요. 제2의 울리히 하비흐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어느 쪽 편에 서든 이기기만 하면 슈퍼스타다.
아우구스타가 두통이 몰려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고 말했다.
“실상 재판소의 판사도 거의 다 갈릴 거라고 보면 되겠지. 지금 와서 수중에 넣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이고, 증거를 없애는 수밖에 없어.”
“제가 힘껏 돕겠습니다.”
스테판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타의 다음 말을 듣고는 혈색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리누스 님을 위해서라도……, 네가 애써 주리라는 것을 믿는다.”
* * *
탑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촛불 하나, 등잔 하나 주어지지 않았지만 장작은 보급되었기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마르고트는 낡은 모포를 둘러쓴 채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내 인생도 너절하군.’
백 년도 더 전에나 황족의 감옥으로 쓰이던 탑에 단열이 제대로 되어 있을 리 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로 만들어진 창문이 덜컹거리면서 소리를 내고, 돌로 쌓인 벽 어딘가에 빈틈이라도 있는 듯 찬 바람이 불어 들어 머리카락을 날렸다.
노이만 의장은 그녀가 재판 때까지 버텨 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대로 보급하고, 좋은 환경에서 지내게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간수는 그 지시를 지키지 않았다.
상대는 반역자였고, 악마와 계약한 마녀였으며, 지금까지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아 온 귀한 신분의 여자였다.
이런 상대를 괴롭힐 기회는 흔치 않았다.
예산을 빼돌리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복수심을 만족시키고, 우월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고기는커녕 감자 한 알까지 빼돌려, 식사 시간에 마르고트 앞으로 나오는 그릇에는 묽은 수프만 들어 있었다.
감옥 문 앞을 지키는 것은 근위대였으나, 그들마저도 양초와 성서를 가져가 버렸다.
그나마 장작이 제대로 들어오는 게 다행이었다. 벽난로도 효율이 낮았지만, 그래도 불 앞에 앉아 있으면 하루를 버틸 만은 했다.
제대로 빗지도, 감지도 못한 머리는 이제 회색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마르고트는 새삼스럽게 신경 쓰였다.
외모 따위에 신경 쓴 적은 결단코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평가하는 사람이지, 평가받는 사람이 아니고, ……늘 그렇게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신경 쓰였다.
입김이 하얗게 부서지는 추운 공기 속에서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도 있군.”
자신은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신경 썼을 뿐이다.
위엄 있어 보이도록, 강하게 보이도록, 함부로 내려다볼 수 없도록, 조금이라도 커 보이도록.
누구에게나 칭송받는 아름다운 숙녀를 부러워한 적은 없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그녀가 갖고 싶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향이 다르다고 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결국 다 자기 처지에 맞게 발버둥 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추위에 웅크린 채 비참함을 느꼈다.
남이 내려다보는 게 질색이었다. 그래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결국 아주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다.
제러드를 닮은 그 어린아이조차도 아마 저를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고트는 문득 클레어 델포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옷차림이든 사업이든, 퍽 특이한 일을 서슴없이 시도하던 것을. 그녀는 자기가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신경 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까?
마르고트는 수없이 많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제 와 복기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는데도 말이다. 반성은 이후의 일을 위해, 행동을 고칠 때나 유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할 일이 없으니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살면서 머릿속을 비우고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임시방편을 지나치게 오래 썼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장작이 타들어 재가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디에서 어떻게 했어야 승산이 있었을지 계속 생각해 보았으나, 상당히 과거로 거슬러 가도 좀처럼 그럴듯한 결과를 가져올 자신이 없었다.
스테판이 배신할 것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하하, 하하하.”
마르고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예쁜 아이가 능력까지 있으니 많이 아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인간 따윈 역시 믿을 게 못 된다. 믿을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를 제거하기 좋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십 년 전이 된다. 애당초 씨부터 잘못 골랐다.
좀 더 제대로 된 감시 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녀는 검은 연꽃을 너무 쉽게 남에게 맡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계획을 짜면서도, 역시 전부 다 배신자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마르고트는 두통을 느꼈다. 리누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또각. 또각.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렸으나 마르고트는 생각에 골몰하느라 구둣발 소리가 등 뒤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벽난로 불빛이 드리운 마르고트의 긴 그림자 위에 노인이 섰다.
그녀를 수행하는 남자의 키가 커서, 이번에는 그가 들고 있는 가스등 불빛에 비친 노인의 그림자가 연하게 마르고트의 위로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냐?”
마르고트는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여 버리겠어……!”
쾅!
노인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두 손으로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바람에, 마르고트를 후려갈기는 데 실패했다.
마르고트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비웃듯이 입가를 비죽 올렸다.
“이런. 아편에 중독되어 딸의 지참금까지 모조리 써 버리고 자살한 애빙던 백작의 어머니가 아니신가.”
“이……, 이, 악랄한 작자가!”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 또다시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