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애빙던 백작 대부인은 마르고트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그 전에 경호원과 근위대가 그녀를 잡아떼어 놓았다.
격렬한 움직임에 벽난로에서 재가 날렸다. 마르고트는 콜록거리며 물러서서 호호 웃었다.
“재밌네. 제 아들에게는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더니, 원망할 사람을 찾자마자 덤벼드는 게.”
“넌, 넌 인간쓰레기야……!”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 쉬어 터진 목소리를 뽑아내듯 소리 질렀다. 마르고트는 조소했다.
“누가 보면 애빙던 백작이 내가 권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궐련을 입에 물기라도 한 줄 알겠군. 애빙던 백작 대부인, 그렇게 당당하려면 적어도, 아들이 어리고 아름다운 숙녀에게 부도덕한 마음을 품은 채 살롱에 드나드는 것부터 막았어야지.”
애빙던 백작 대부인의 안색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러나 제 자식이 순수하게 음악을 애호하느라 문턱이 닳도록 오페라 극장에 다닌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내 아들이 설령 나쁜 놈이었다고 하더라도, 네가 무슨 권리로 내 아들을 그 꼴로 만들어?”
마르고트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게 만들었다는 백작 대부인의 말은 틀렸다.
애빙던 백작은 스스로 연잎 궐련에 손을 댔고, 더 강한 것을 찾은 것도 스스로 한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중독자들이 그랬다. 아니, 물론 마르고트는 자신이 그 일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유통 루트의 통제에 실패한 것이 그녀의 책임이었다.
허가도 받지 않은 불한당 놈들이 사기와 강압으로 아편을 퍼뜨려 노예를 만든 것도, 그렇게 보면 그녀의 책임이 맞긴 했다.
‘그러니 내가 거두어야 했는데.’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황제의 관을 이 머리 위에 올렸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애빙던 백작 대부인은 마르고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가 청문회에 나와 로멜 귀족들을 호명했을 때와 마찬가지다.
“누가 시킨 거지?”
“시켰다니?”
“누가 들여보내 주었느냐고. 이번에도 클레어 델포드인가?”
애빙던 백작 대부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마르고트의 시선이 자신의 증오 따위에는 기울어지지도 않고 그 뒤의 무언가를 찾는 데 골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모든 사람이 너 같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군.”
그녀는 짓씹듯이 말했다. 마르고트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솔직히 이렇게 반박하는 게 쓸데없는 일일뿐더러 무의미하게 감정적인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한 달 가까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갇혀 있다 보니, 이런 사소한 즐거움이라도 찾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증오도 사욕일진대, 그 때문에 법을 통하지 않고 날 죽이러 온 그대도 특별히 다를 건 없어 보이는군.”
그러면서도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이건 클레어 델포드의 방식 같지는 않다.
황제도 아니다. 황제가 자신을 이렇게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직접 목을 조르러 왔을 터이다.
아렌 공왕이나 에리히는 이런 성격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어 공작인가? 혹은, 아우구스타인가?’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바깥 사정을 전혀 모르니, 판단을 내릴 재료가 없었다.
만일에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그 전에 암살해 버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할 법하다.
그리고 무어 공작은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상대였다.
‘혹은…….’
아우구스타가 배신했는가. 그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간다면, 법정에 세워지기 전에 자신을 제거하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었다.
사실 그렇게 하고 나면, 증거를 일일이 지울 것도 없이 제게서 모든 일이 끝날 것이다.
아우구스타가 안다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터이나 마르고트의 의심은 이제 낫지 않는 병이다.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 혐오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네가 가련한 피해자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세상을 다스리려다 실패한 비극의 영웅이 되길 바라겠지만, 난 절대 그렇게 놔둘 생각 없어.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을 줄 알고?”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 운명을 선고하듯 말했다.
“내 아들이 그러했듯이, 너도 추악하게 바닥을 기는 꼴이 될 거다!”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고, 품에서 종이로 포장된 덩어리 하나를 꺼내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포장 종이가 순식간에 타들어 가고 곧바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솟구쳤다.
근위대원은 놀라지도 않고 준비해 온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다음 이제 돌아가자고 손짓했다.
애빙던 백작 대부인도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이 연기 속에 오래 있으면 자신도 중독된다. 그럴 작정은 없었다.
탁.
문이 닫혔다. 마르고트는 벽난로의 불을 끄려고 했지만, 양동이에는 그럴 만큼의 물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녀의 의식도 마찬가지였다.
‘근위대가…….’
마르고트의 생각은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시야가 뭉그러졌다.
58. 재판 (2)
총선거는 전에 없는 열광 속에서 치러졌다.
유권자의 태반이 이번에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은 사람이었다.
부여 기준이 ‘세금 장부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었으므로, 투표장에 모인 사람은 전과 달리 각양각색이었다.
“허, 말세로군. 하녀들에게 선거를 하라고 해 봤자 얼굴 반반한 놈에게 표를 던지는 게 다일 텐데.”
“글자도 모르는 놈들이 나랏일에 끼어들다니, 말이 되나!”
불평불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활화산처럼 터졌다.
“지금까지 재산권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주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나라에 공헌하고 있으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 아니었나?”
“똑같이 세금 내는데 여자이든 어린애이든 왜 권리가 없어?!”
사람이 셋만 모이면 싸움이 날 정도였다.
노이만 의장의 얼굴은 시시각각 거무죽죽해졌다. 괜히 미안해진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권유가 너무 섣부른 생각이었을까요? 지금까지 재산권을 기준으로 선거권을 부여해 왔으니, 그게 제일 받아들이기 쉬우면서 넓은 범위의 사람을 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닙니다.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맹인 자까지도 투표할 수 있도록 방안도 고안해 주셨고요. 저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아마 아렌인 투표자가 늘어나는 것도, 대학을 나온 여자가 투표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자입니다.”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기분을 누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결국 지금까지 로멜 우월주의에 만족해하던 자들인 경우가 많겠지.”
하원 의원은 자신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며 공개적으로 선거에 불참을 선언한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 시간 싸움이었던 데다가 그런 것까지 하원에서 결정할 자격도 없었으니까.”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죠.”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의회는 아마도 구성되자마자 새로운 선거법을 만드는 데 골몰해야 할 것이다.
남은 귀족의 다수는 클라우제너 공작을 따라 선거에 불참했다.
사실 애초부터 평민들과 똑같이 섞여 투표 따위를 하는 것에 모멸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클라우제너 공작의 그 발언은 그들에게 따라 할 만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걸 알고 클레어는 어깨만 으쓱했다. 이게 전통이 되면, 훗날 주권에서 배제된다는 말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족에게 굳이 권리를 챙겨 줘서 뭐 하겠는가.
어차피 대부분은, 예전보다는 덜할지 몰라도, 상원이든 하원이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열기와 희망도 함박눈처럼 소복하게 함께 쌓였다.
총선거에 붙어 치러진 판사 선출의 열기도 그에 못지 않았다. 이쪽은 혼란한 하원 의원 선거보다 더 깔끔하게 치러졌다.
일단 돈을 뿌릴 만큼 부유한 자는 모두 몸을 사렸고, 마지막까지 신문의 공격을 받고 화제에 올라 있었기에 후보 검증도 상당 부분 이루어진 다음이었다.
클레어에게는 다소 낯설긴 했으나, 어차피 의회를 선거로 뽑는다면 판사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다수가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보장은 없지.”
에리히는 처음에 그런 말로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몸 사리는 자가 많았지만, 결국에는 돈이 뿌려질 거야. 후원자와 학맥을 배제하는 건 불가능해. 친분도. 인간이 독립적일 수 없다는 건 네가 제일.”
말하다 말고 그가 입을 막고 일어섰다. 구역질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조용히 그의 입술 앞에 매콤 새콤한 오징어 볶음을 내밀었다.
한국식 고추장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훌륭한 요리사는 그녀의 희망에 부응하여 스리라차 소스와 비슷한 느낌의 소스를 만들어 왔다.
아쉬우나마 먹을 만했다.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리고 클레어가 들고 있는 포크를 내려다보았다.
“클레어.”
“진짜, 딱 한 입만 먹어 봐요. 이틀 내내 굶었잖아요. 내가 입덧할 때 얼마나 이런 게 생각나던지.”
“…….”
에리히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먹었다. 혀끝에 불이 날 것 같은데, 잘 넘어가는 게 신기했다.
어차피 진짜로 정견을 이야기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정치고 뭐고 일단 몸이 힘든 게 제일 괴로웠다.
아기가 들어서고 이미 5개월째다. 차라리 임신한 게 자신이었다면 입덧이 끝났을 시기인데, 왜 이리 길게 끄는지 모를 일이었다.
매운맛 때문에 붉게 물든 그의 뺨과 코를 보고 클레어가 까르르 웃었다. 아무튼 그녀라도 즐거우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