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그 쪽지를 발견했을 때 리나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스테판은 결국 복수를 포기하지도 않았고, 제 죄를 갚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니 설득할 기회도 없었다.
그녀는 한 달 넘게 아우구스타가 머무르고 있다는 타운하우스 주변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스테판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도저히 감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리나의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디트마어가 당황하여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어쩔 줄을 모르며 손수건을 찾았지만,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손수건은 오늘 내내 자신이 손을 씻고 나서 물기를 닦는 데 사용했다.
리나의 얼굴을 닦기에는 너무 더러웠다.
그래서 그는 그것 대신 앞주머니에 들어 있는 장식용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회색 포켓 스퀘어로 눈가를 누르고 리나가 방긋 웃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요.”
“리나 양…….”
“아무튼 클레어 님 말씀은 이래요. 아편을 유통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다면 모르되, 그랬을 리가 없다고요. 그러니 반대로 돈의 흐름을 추적하면 어디에서 유통이 시작됐는지 증명할 수 있다고요.”
카탸의 장부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하지만 스테판의 장부에는 돈의 경로가 표시돼 있었다.
클레어는 그 경로의 상단 일부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돈세탁에 이용된 상단 전체가 다 마르고트나 아우구스타의 소유는 아니었으므로, 인맥과 권력, 뇌물은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상단 장부를 입수한 다음, 거기에서 거래가 있었던 다른 계좌를 확인함으로써 이전에는 일부밖에 확인할 수 없었던 연잎 궐련의 거래 루트를 전부 완성시켰다.
그 결과가 지금 디트마어의 손에 들려 있다. 그중에는 카탸의 장부와 일치하는 것도 있을 터였다.
그것을 파 보면 아편 제제를 이용해 실행된 음모들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증명될 것이다.
그 외에도 장부가 몇 개 더 있었다. 리나로서는 전부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의 명단과 다른 장부들과 현재 남아 있는 부동산의 목록 같은 것들이다.
그것의 의미는 아마도 이제부터 조사해서 밝혀야 하리라. 리나는 그것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재판소의 유리가 깨졌을 때부터 경시청은 이미 전면 항복한 상태였으니까.
사실 그전에 계엄군에게 짓눌렸을 때부터 이미 경시청은 마르고트의 섭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리나는 잠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생각이야, 스테판…….’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내놓을 정도라면, 사법 거래로 형량을 줄일 수도 있을 텐데, 스테판은 굳이 그렇게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고 디트마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나 양은, 사실은 출처가 누구인지 아시는군요.”
“전……,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기꺼이 증언대에 서겠지만, 이걸 제게 가져다준 사람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해합니다. 그런 일로 죄책감을 갖지 마십시오, 리나 양.”
디트마어가 어색하게나마 한껏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옳은 일을 하겠다는 이유로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자신을 믿고 약점을 맡긴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조금 덜 괴롭네요.”
리나가 막혔던 숨을 겨우 내뱉으며 말했다.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둥글게 뜬 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사실, 저는 디트마어 씨를 돕는 일을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좀 있었어요.”
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모의 일 덕분에 귀족의 고결한 혈통에 대한 환상은 이미 깨졌다.
리나는 자기 같은 환경의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연 때문이든 운 때문이든, 그런 상황에 놓인 것도 어떤 운명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소명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사적인 마음에 휘둘리는 주제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죠? 지금처럼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디트마어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원래도 깊은 눈매가 더 깊어져, 눈 밑에 그늘이 졌다.
“저라고 해서 사적인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걸 극복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디트마어 씨…….”
“세상에 완전히 정당하고 올바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한때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썼고, 그러지 못한 사람이 남을 이끄는 자리에 오르겠다고 나서는 것을 경멸했습니다만, 그래서는 오히려 자신이 완벽하다고 믿는 오만한 사람만 남을 테지요.”
“아…….”
“자신의 마음이 사감에 흔들리는 것이 아닌지 살피는 것만으로도 리나 양은 훌륭합니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무대에 있을 때도, 이렇게 마주 보고 있을 때도 똑같이 아름다우시니, 의사당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디트마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라 오히려 리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말한 것이 단순히 얼굴이 예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 *
재판소장 이하 구설수에 오른 고위직 판사들이 모두 사퇴하고, 판사 선거에 입후보한 변호사들이 재판소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법정의 구성은 급물살을 탔다.
재판이 중지된 동안 감옥에 용의자가 넘쳐흘렀기에 신진 판사들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가장 먼저 재판정에 끌려 나온 것은 에른스트 공작이었다.
에른스트 공작가의 죄가 확정되지 않으면, 그를 따른 자들을 반역죄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고석에 끌려 나온 에른스트 공작은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장 반지를 넘겨주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진짜로 죄인으로서 감금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본디 성품이 과격한 편이 아니다 보니 젊은 시절에 특별히 죄를 지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형제들, 숙부들, 가까운 친척들, 그 누구도, 무슨 짓을 저지르고도 재판정에 선 자가 없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처벌은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성씨가 거두어지고 상속권을 박탈당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다. 가주에게 미움받는 것이 판결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었다.
대귀족만이 아니라 가신들, 고용인들, 영지민들, 그것을 넘어서서 어느 평민에게 물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그도 자신이 어딘가의 별장에 연금되는 정도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북방군은 단호하게 그를 탑에 집어넣었다.
한 번 면회를 왔던 에른스트 공작 부인에게 부당하다고 호소하자, 그녀는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 다른 것도 아니고 반역죄예요. 그게 가문 안에서 끝난 적은 없어요. 아주 어린 아이가 황실 모독죄 같은 것을 범하지 않은 이상에는.]
[반역하지 않았어!]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죠. 마르고트 님이 반역죄로 잡혀 있는 이상, 당연히 반역으로 연루되게 되어 있었어요. 게다가 당신은 황명 없이 군대를 모았다고요.]
[그건 마르고트가……!]
그가 아우성치는 소리는 모조리 감옥의 석벽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작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은 그제야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
[내가 지금 멀쩡해 보여요?]
초라한 갈색 드레스를 입은 채 머리도 그저 빗어 묶기만 한 공작 부인이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세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에른스트 공작 자신의 옷은 몇 달 동안 감옥 바닥의 진창과 오물에 더럽혀져 냄새나는 누더기가 된 것에 반해 말이다.
공작 부인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문을 열었으니까요.]
[당신 혼자 빠져나가려고……!]
[친정도 생각해야 하고, 우리 자식들도 생각해야죠! 아니면 다 같이 반역죄로 죽어 보자는 거예요?!]
공작 부인이 그렇게 언성을 높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난 처음부터 반대였어요! 리누스를 우리 집에 맡긴다고 할 때부터 너무 싫었다고요!]
[나도 그래!]
[당신, 마르고트 님에게 그렇게 말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요!]
에른스트 공작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은 소리 지르다 못해 할딱거리며 울먹였다.
[당신, 좋아했잖아요. 마르고트 님이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고 있다고. 그리고 마르고트 님이 황후가 되려고 할 때…….]
[그만! 그만해!]
에른스트 공작은 고함을 질렀고, 그 뒤로 둘은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피고석에, 아내는 증인석에 서 있었다.
“증인, 안나 레아 마이닝겐 에른스트. 성서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에른스트 공작 부인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