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재판장으로 끌어내려는 근위대가 아니라면.
유폐된 후로 한 달 이상의 시간 동안, 리누스를 방문한 사람은 에리히뿐이었다. 그것도 딱 한 번.
먼지와 화약 냄새를 뒤집어쓰고도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피로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럴 만큼 바빴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이제 가물거렸다. 사실 무슨 말을 했어도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들을 마음이 없는 자의 귀에 들어온 목소리는 파도와 같다. 한순간 의식을 집중시켰더라도 밀려 나가고 나면 곧바로 모양을 기억해 낼 수 없게 된다.
애당초 지금 만나고 싶은 것은 에리히가 아니라 황제였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말을 생각해 낸 것도 아니다.
황제가 자신의 출생을 알고 있을 줄은 리누스는 정말로 몰랐다. 그 자신도 열다섯 살에 에른스트로 보내진 뒤에야 알았다.
에른스트 공작이 허술하고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끝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에는 막연한 예감만 있었다. 물론 그는 어머니를 닮은 외모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부계 쪽으로 닮은 구석 하나가 없는 게 이상했다.
몇 대의 결혼에 걸쳐서 모아진 로멜 황실의 혈통이 어머니 마르고트의 혈관에도 흐르고 있을 테고, 그것을 물려받은 그의 혈관에도 분명히 있으련만.
그것이 리누스에게는 거울을 볼 때마다 운명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태생부터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제러드가 몰랐을 리가 있나. 황제 폐하께서 입 무겁게 버티실 성미도 아닐뿐더러, 제러드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계셨는지를 생각하면.]
그 뒤로 에리히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가물거린다. ‘그래서 그는 언제 알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떠올린 것도 그가 떠난 다음의 일이다.
생각해 보면, 황제는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리석었다.
아니, 그조차도 철없는 생각이다. 자신이 설령 진짜로 그의 아들이었더라도 그는 똑같이 자신을 증오했을 거다. 어쩌면 더욱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
기억이 났다.
리누스는 문고리를 쳐다본 채로 짤막하게 신음했다.
[알면서, 왜?]
자신은 에리히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됐었다는 생각은 이제야 한다.
왜냐하면, 황제가 그렇게 제 자식을 의지한 것은 부러워하거나 당연하게 여길 일이 아니라 제러드를 동정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리누스도 황제와 똑같이 제 생각만 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지? 중요한 건 네가 받아들여졌다는 것 아닌가? 태생이 어떻든 제러드는 널 동생으로 여겼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는 입을 다물고 널 황자라고 부르도록 했던 거야. 당신의 아들로 받아들일 작정이었는지 어땠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거기서 또 리누스의 기억이 끊어졌다. 정확히는 기억이 끊어진 게 아니라 발작을 일으키며 울부짖었다.
그 뒤의 기억도 가물거렸다. 미쳐 버릴 것 같았기에 잊어버렸다.
[키우다 보니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야.]
리누스는 무의미하게 클레어의 그 말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속이 칼질하듯 아팠다. 그는 반쯤 녹은 초콜릿을 생각했다.
그것을 먹었어야 했을까?
그는 노크 소리가 났던 것도 잊고 생각에 골몰했다.
결국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이 열렸다. 시종 복장을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리누스는 피로에 지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는 오늘 에른스트 공작의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실 그간의 사정을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황궁 내부에 자신의 정보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알려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반역죄는 마르고트 재판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황자에게 얽힌 출생의 비밀은 아주 흥미로운 가십이었으나, 아무리 신문사에서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수도 없이 찍어 내도, 유폐된 리누스에게는 관계없는 일이다.
시종은 말이 없었다. 리누스는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용건이 있으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종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마와 머리에 있던 분장을 벗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리누스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상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젊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마의 주름과 머리칼 뿌리 부분의 흰색이 사라지자 상대는 고작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뺨과 눈 밑에 화장품을 발라 일부러 못난 얼굴로 만들었지만, 그게 없는 상태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아주 매혹적인 외모일 것이다.
“아우구스타가 보냈나?”
그럴 만한 상대가 그녀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자를 보낸 것은, 아우구스타도 쓸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테판은 낯선 기분이 된 채로 리누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평생 그리워했던 아들이다. 자신 앞에서 ‘내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하지만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아버지를 닮았다면, 황후도 조금 더 귀여워했을지도 모르지.’
위험성을 생각해서 살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에 초상화를 볼 때마다 스테판은 상대는 빛 속에, 자신은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정작 이렇게 직접 보니 지나치게 하얗고 야윈 청년은 전혀 빛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스테판은 기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물론 그는 리누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피가 일부 통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그게 전부다.
사람이 애정을 갖고 정을 들이는 데 혈연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은 아버지 덕분에 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은 탓에 그런 것이리라.
그가 리누스를 외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아우구스타가 옳았다.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이상 진짜로 외면할 방법은 없으리라.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으니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리나는 자신이 준 장부를 디트마어 람스베르크에게 갖다주었을 것이다.
그녀가 증인으로 서든, 장부를 이용하든, 적어도 법정에서 터무니없는 결론이 나지는 않으리라.
클레어 델포드가 그러지 않도록 나서서 움직일 테고 말이다.
그거면 됐다. 아쉬움은 남았으나, 리나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쪽도 찜찜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황후를 원망하는 사람은 끝없이 많고, 그는 검은 연꽃을 통해서 그들을 이어 놓았다.
그가 직접 손쓰지 않아도 증오는 소용돌이치고 있다. 자신이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된다.
리나는.
오로지 리나 하나만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이 동생이라 하기 어려운 존재는 마음에 걸린다기보다 발가락에 박힌 모래알 같은 것이다.
“왜 그렇게 날 쳐다보지? 넌 누구냐? 아우구스타가 보낸 게 아닌가?”
리누스가 다시 물었다.
이름을 알리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판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벤자민의 아들, 스테판.”
그의 성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 것이다. 아버지의 성을 숨긴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가족으로 여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것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너의 형이다.”
리누스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생부의 존재를 상상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극명하게 반대의 의미로만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황제가 아니다.
‘아니다’라는 사실에 방점이 찍혀 있었고, 생부란 저 황궁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면서 고통을 가져오는 추상적인 무엇이었다.
그것이 눈앞에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아무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그가 충격을 받든 말든 스테판은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시간이 별로 없어. 탈출하려면 지금뿐이다.”
“탈출?”
“에른스트 공작의 재판 도중에 황후가 법정으로 불려 나갔다. 지금이 가장 혼란한 순간이니까, 나가려면 지금밖에 없어. 자, 그 옷을 벗고 이것으로 갈아입어라.”
스테판이 제가 입고 있던 시종의 복장을 벗어 건네며 말했다.
자신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말로 구슬리는 것도, 연기에도 자신 있었다.
“기다려. 형이라니, 무슨 소리야?”
스테판은 후회했다. 리누스가 스스로 황제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됐었는데.’
스테판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그저 리누스의 얼굴을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돌볼 생각도, 알릴 생각도 아니었기에 특별히 준비해 둔 말도 없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상관없겠지.’
그는 굳이 리누스를 돌보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담백하게 말했다.
“우리가 아버지가 같다는 뜻이지. 설명이 더 필요한가?”
리누스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