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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분명해-245화 (246/263)

#245화

아이러니했다. 아렌과 로멜이 합병하고도 이미 백여 년, 생각해 보면 순혈 같은 것은 없을 터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완전하게 아렌 혈통의 이상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화가가 그를 본다면, 열정과 사랑에 미쳐 금실로 짠 옷과 관을 벗어 던지고 거지의 뒤를 따르는 왕자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계획을 바꾸고도 남을 것이다.

리누스는 제 생부가 저자를 닮았으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것 같았다.

어머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납득되었다. 결국 어머니도 저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러자 모든 게 우습게 느껴졌다.

리누스는 이제 단 하나 남은 의문을 풀기 위해 물었다.

“왜?”

왜 지금 여기에 나타났는가. 왜 지금 정체를 밝혔는가. 왜 탈출을 말하는가.

앞뒤를 다 자른 질문을 스테판은 알아들은 듯했다.

“그게 중요한가? 지금이 아니면 도주할 기회가 없으니 일단 나가서 생각해.”

딱히 형 노릇을 할 작정도 아니었으므로, 스테판은 말한 것을 후회했다.

실용주의자인 그로서는 지금 그런 걸 중요하게 여기는 리누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누스는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스테판은 한숨을 내쉬었다.

“혈육이니까.”

“지금까지 난 네 존재도 몰랐어.”

“하지만 난 알고 있었으니까. 딱히 목숨까지 걸려는 건 아니야. 그냥 좀 궁금했을 뿐이야.”

“뭐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이 어떤 자인지.

결국 그것도, 저것도, 모두 환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니 더더욱 스테판은 그냥 돌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황후를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타의 생각과 달리 황후는 유능하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해서 아끼는 사람도 아니다.

모든 어린아이는 무력하다. 그 시절을 직접 그 눈으로 목격하고도 황후가 리누스를 사랑했을 리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아버지는 만나 본 적도 없는 이 아들을 그토록 사랑했고, 황후는 제가 낳아 기른 이 아들에게 낮은 평가만 내렸다.

그걸 생각하면, 가엾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쯤은 연민이 들었다.

“나가지 않겠다면 그걸로 됐어. 하지만 네가 무죄를 받을 확률은 없어. 아마 운이 좋아 봐야 탑에 유폐되거나 멀리 유배되는 결과겠지.”

리누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달아난다고 뭐가 달라지나?”

“…….”

“어차피 나를 기다리는 운명은 하나뿐이야.”

달아나고 싶다면, 에리히가 제안했을 때 달아나야 했다.

어쩌면,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아직 연민을 품고 자신이 결단을 내리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제게는 자격이 없었다. 황제의 관을 움켜쥘 야망을 위해서도 아니라, 고작해야 달아나겠다는 결단조차 하지 못해 여기 있었으니까.

스테판이 누구의 힘을 빌렸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오래도록 숨길 능력은 없을 터였다.

“돌아가.”

리누스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운명적인 만남일 테지만, 그 어떤 운명도 그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자신을 제 형이라고 말하는 진짜 혈육과 부친의 존재를 알았음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스테판은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물었다.

“황후의 죄를 같이 받아들일 셈이냐?”

“아니. 내가 부정해 봤자 결론은 똑같을 텐데 싶기도 하고, 나는.”

그는 말을 멈췄다.

도망자로 살아갈 만한 능력도 없지만, 그만큼 살고 싶지도 않다는 말을 지금 막 알게 된 형이라는 사람에게 굳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이대로 됐어.”

“…….”

스테판이 입술을 움직거렸다. 아마도 제 이름을 부르려다가 친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둔 것이리라고 리누스는 생각했다.

“돌아가.”

“황자로서 죽는 게 낫다면, 그렇게 해.”

스테판이 딱딱하게 말했다. 경멸 어린 어조로 들리지 않게 하려고 애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아버지도 아마 할 수만 있었다면 황족으로 죽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남들과 똑같이 사는 걸 그토록 억울해하던 사람이니.

그는 벗었던 시종의 옷을 도로 걸쳤다.

그저, 마음에 남는 것이 생길까 봐 한번 보러 온 것뿐이다. 그나마도, 제정신이었다면 그저 얼굴만 보고 떠났을 테고.

[가엾은 분이라서.]

늘 그렇게 말하는 아우구스타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테판은 그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테판 자신을 연민하면서도, 그보다 리누스를 훨씬 가련히 여기던 아우구스타조차도 지금은 그를 완전히 잊고 있다.

그저 그게 전부다. 애초부터 리누스를 탈출시킬 예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실 탈출시킨다고 해도 끝까지 숨기려면 무리를 해야만 했다.

숨어 사는 것보다 황자라는 신분이 낫다면 그것으로 됐다. 원래 상관없는 사이였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다.

스테판이 분장을 다시 붙였다.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흰머리를 고정시킨 다음 다시 고개를 들었다.

리누스는 이미 돌아선 다음이었다.

인사는 필요 없으리라. 하긴, 리누스 입장에서는 증거도 뭣도 없이 나타난 모르는 사람이 형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그가 돌아서는데, 리누스가 문득 말했다.

“……고마워.”

스테판은 대답하지 못했다. 들을 거라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이었고, 무엇 때문에 고맙다고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탈출하면서 하는 말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를 통과시킨 근위대원은 이미 교대되었는지, 낯선 얼굴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테판은 어깨를 구부정하게 한 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종종걸음으로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입 안에서 쓴맛이 맴돌았다.

리누스는 잠시 창가에 서 있었다. 근위대원이 잠깐 문을 열고 들어와 안을 확인하고 물었다.

“시종을 부르셨습니까?”

“내 주제에 그게 되겠나.”

그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근위대원이 사죄하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물러났다.

찰칵. 문이 잠겼다.

리누스는 창가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스테판에게 고맙다는 건 진심이었다.

생각해 보면 늘 잊히는 게 두려웠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궁 안에서도 버려지는 게 두려웠고, 그다음에는 에른스트에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운명 따위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자신을 버린 사람들에게만 집착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네 가족을 만들어.]

클레어가 한 말이 아마 그것이었던가. 그 비슷한 말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 말이 옳았다. 생각해 보면 항상 옳은 말만 해서 짜증 났다. 아니, 그건 사실은 클레어가 아니라 에리히 쪽이었지만.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는 그럴 만한 삶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이제 도망치는 건 지긋지긋했다.

* * *

임시 중지되었던 에른스트 공작의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너덜거리도록 지친 공작은 거의 끌려 나와 피고석에 앉아졌고, 쓰러진 공작 부인은 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재판정 안은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공작 부인의 발언이 가져올 여파를 생각해서 밖으로 소식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문을 폐쇄했지만, 고작해야 문틈 정도라 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말은 없다.

방청객으로 들어오지 못했으나 재판 과정이 궁금해서 기웃거리던 사람들 사이에 순식간에 마르고트에 관한 이야기가 돌았다.

징병권이나 계엄령보다도, 초야를 치르지 않았으니 황후가 아니라는 말은 황자가 사생아라는 말만큼이나 본능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죄인을 처형하라는 외침이 이내 구호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방청석에 있던 노이만 의장이 축축해진 이마를 손수건으로 눌렀다.

판사의 요청으로 불려 온 디트마어가 바깥의 함성을 들으며 염려스럽게 말했다.

“이건 좋지 않습니다.”

“나도 아네.”

“아니, 의장님의 생각보다 훨씬 더 좋지 않습니다. 마르고트 에른스트는 아편을 퍼뜨리고 시민을 노예로 만들며, 계엄령으로 국권을 탈취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되어야 합니다. 감히 황후도 아닌 주제에 황후인 척했다는 게 아니라요.”

“으음……. 하지만 저걸 막을 수 있겠나?”

치안대는 재판소 앞에 모여든 시위대를 막으려 했지만, 그럴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누가 시작했는지, 목재를 실어 나르고 금세 수백 명이 달려들어 조립했다.

교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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