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클레어는 재판을 방청하러 가지는 않았으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응접실에 손님과 마주 앉은 채로도 전령이 가져온 쪽지를 받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디트마어와 같은 생각을 했다.
‘황후의 죄목은 그런 것이어서는 안 돼.’
황제가 죽은 전 황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또 그 때문에 마르고트를 거절한 것도, 마르고트가 황후냐 아니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건 그저 흥밋거리에 불과하다.
초야가 결혼을 성립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것 자체가 가문의 후계자를 낳는다거나, 두 가문의 피와 살을 섞는 것에 너무 집중한 시대의 이야기다.
어차피 증명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도 이게 황실의 일이 아니었다면 초야의 여부 따위를 따질 사람도 별로 없을 터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지금까지 만인 위에서 군림하던 여자를 성적인 문제로 끌어내리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겠는가.
자식이라도 없었으면 모를까, 리누스가 있으니 금세 성적 타락에 대한 비난까지 섞일 것이다.
이건 지금은 비난 여론을 크게 일으킬 테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역으로 황후를 재평가할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라를 좀먹을지 클레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적인 문제를 뒤집어씌우지 않더라도 황후는 충분히 죽을 만한 죄를 지었다.
‘논점을 전환해야 해.’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문간의 콘솔로 자리를 옮겨 짤막하게 몇 줄의 편지를 휘갈겨 썼다.
『지금부터 마르고트 에른스트의 숨겨진 재산 목록을 공개하시면 어떨까요? 돈 문제는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으니까요.』
돈만큼 부패의 결과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은 없는 법이다.
클레어는 편지를 봉투에 넣어 봉인하고는 전령에게 넘겼다.
“이걸 노이만 의장님께 전해 주세요.”
“예.”
전령이 봉투를 받아 들고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클레어는 일부러 동요를 내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손님 쪽으로 돌아섰다.
응접실 테이블 저쪽에 앉아 있는 것은 아우구스타였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에 피가 맺혀 있었다. 아마도 그녀와 같은 소식을 이미 들었으리라.
클레어는 좀 묘한 기분이 된 채 아우구스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는 아우구스타가 마르고트를 배신하리라고 생각했었다.
마르고트만 없으면, 그동안 비밀리에 축적된 모든 재산이 전부 아우구스타의 손에 남을 것이다.
수괴를 쓰러뜨리고 나면 추진력은 한풀 꺾일 것이다.
마르고트의 재판을 위해 증거를 모으는 사이에 아우구스타가 남은 재산을 제 것으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면, 뒤늦게 거기까지 재산을 환수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클레어는 오히려 그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공범인데, 그 손에 부를 남겨 주어서야 될 말인가. 클레어는 다른 것보다도 오히려 그걸 더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타는 재산의 명의를 제 것으로 돌리거나 숨기는 데 집중하지 않았다.
공범으로 재판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달아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장부와 기록을 제거하고 증인이 될 만한 자들을 숨기는 일에 골몰했다.
‘이미 배신자가 있는데.’
마르고트를 처벌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리나를 통해 이쪽에 넘어와 있다.
어쨌거나 아우구스타는 지금도 낯빛을 새파랗게 하고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인가요?”
클레어는 말을 걸어 아우구스타의 생각을 끊었다. 그녀는 표정을 다듬지 못한 채 클레어를 올려다보았다.
“오해하고 계실 것 같아 먼저 말씀드리는데, 오늘 일을 부추긴 것은 제가 아니에요. 저는 황후께서 끌려 나와 교수대에 걸리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아우구스타가 그게 진심이냐고 추궁할 때를 대비해 클레어는 마음속으로 말을 만들어 놓았지만, 아우구스타는 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아직도 황후라고 부르시는군요.”
“이유가 무엇이었건 결혼 서약서에 서명했어요.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초야보다 서약서가 더 중요한 게 당연하죠.”
“마르고트 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황후께서 그걸 원하지 않으신다는 게 중요한가요? 황후가 아니었으면 얻지 못할 권위와 힘을 가지고 죄를 지었으니, 오히려 황후인 채 벌을 받아야 옳지요. 물러나고 싶을 때 아무렇게나 물러날 수 있다면, 그게 어떻게 고귀한 자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아우구스타가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무덤덤하게 다시 말했다.
“찾아오신 목적을 말씀하세요.”
“구명을 청하러 왔습니다.”
“잘못 오셨군요. 재판장으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타가 가지고 있던 큰 봉투를 내밀었다. 클레어는 그것을 열어 보지 않았다.
“거기 들어 있는 것 전부를 부인께 드리겠습니다. 단지, 목숨을 잃지 않게만 힘써 주세요. 부인과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의 힘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을 줄로 압니다.”
“역시 잘못 오셨어요. 레이디 아우구스타, 제가 이 재판에 뭔가 손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손쓴 것은 재판까지 계속해서 혁명 분위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슐츠에게 이야기한 것이 전부다.
이미 내부 분위기가 바뀐 이상 아우구스타가 손쓸 방법이 없어졌겠지만, 그것은 클레어 쪽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재판소의 판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백이 넘쳤다. 아마 에리히의 영향력도 잘 듣지 않을 것이다.
그게 옳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타락과 싸워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재판소는 재판소다웠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 가진 것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이런 것을 욕심낼 만큼 제가 가난하지는 않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그러지 마시고.”
“원인을 만들었으면, 결과도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죠. 두 분은 고귀하게 살고자 하셨으니, 끝까지 고귀한 사람답게 책임을 지셨으면 좋겠네요.”
클레어가 ‘고귀함’을 종종 비난으로 쓴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우구스타는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해서 만나 봤지만, 역시 의미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저 좀 신기한 기분만은 아직도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클레어는 나가려다가 멈칫 발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
“리누스를 구명하시지는 않는군요.”
아우구스타가 당황한 듯 입을 벌렸다.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만일에 리누스에 대한 탄원이라면, 에리히에게 의견 정도는 물어볼까 싶었던 클레어는 한숨만 내쉬었다.
어차피 리누스의 죄는 자신을 납치했던 것과 황자인 척했다는 것이 가장 크다. 그리고 후자는 리누스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 두 가지 죄를 제외하고 재판하면 퍽 가벼워질 터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한순간은 그를 주군으로 섬길 것 같았던 친위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공작 부인!”
그제야 리누스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놀란 아우구스타가 따라 나오려 했으나, 클레어는 피곤해져서 일부러 그녀의 앞에서 응접실 문을 닫아 버렸다.
‘하긴, 사람마다 중요한 것은 전부 다른 법이니까.’
에리히가 죽은 줄 알았을 때, 자신도 다른 일을 돌볼 만한 정신은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주군을 상대로 그렇게 된다는 게 좀 신기한 기분도 들었으나, 어차피 남의 인생이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안나에게 물었다.
“리나 양은?”
“재판소로 갔습니다.”
“혹시, 리누스의 소식은 알고 있어?”
재판 과정에서 마르고트가 끌려 나왔다면 리누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묻자, 요안나가 어두운 얼굴을 했다.
“무슨 일 있어?”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뭐?”
큰일인 모양이다.
클레어는 빠른 걸음으로 에리히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로비로 나오고 있는 에리히와 마주쳤다.
“에리히, 무슨 일이에요? 요안나가 당신이 기다린다고…….”
“지금 입궁할 거야. 리누스가 다쳐서 사경을 헤맨다는군.”
“뭐라고요?”
자해를 시도하지 못하도록 창문을 잠그고, 방 안에서 날붙이가 될 만한 것이나 위험한 것은 모조리 치우게 했을 터이다.
에리히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너무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임신 중의 클레어에게는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녀올게.”
“나도 같이 가요.”
“그냥 있어. 어차피 리누스는 의식이 없고, 당신이 그놈을 신경 써 줄 이유도 없으니까. 내가 가는 건 그냥 의무감 때문이야.”
“…….”
“마지막으로 한 대 걷어차 주려고 가는 거라도 말릴 거고.”
“그런 거 아니에요.”
클레어가 복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히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