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황궁은 조용하여 어둠에 잠긴 듯했다.
그게 그리 놀라운 광경은 아니었다. 지난 5년 동안, 황후궁을 제외하면 황궁의 모든 곳이 늘 이런 상태였으니까.
클라우제너 공작저를 방문할 때는 웃음꽃을 피우는 황제도, 황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아직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에리히는 기다리고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시종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살짝 저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라 생각하며 에리히는 혀를 찼다.
황제에게 리누스를 용서하라고 말할 생각은 없었으나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차 한 대가 다급히 들어왔다.
“에리히.”
마차에서 내린 빅토리아 대공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안색을 보니 마음이 몹시 초조한 모양이었다.
“이모님도 오셨군요.”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리누스는?”
“저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시종을 바라보았다. 시종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창문의 빗장 쪽에 부딪치셨는데, 피부가 못에 걸려 크게 찢어졌습니다. 자해인지 사고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암살일 가능성은?”
“그랬다면 좀 더 확실하게 했겠지.”
빅토리아 대공이 말했다. 에리히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살이 목적이라면, 확실하게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떠났으리라.
세 번째 마차가 도착했다. 다급히 내린 것은 맨프레드 대공의 딸 베티나였다.
“고모님! 에리히 오빠!”
“너도 왔구나.”
빅토리아 대공도, 에리히도 다소 의외로운 기분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맨프레드 대공은 리누스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딱히 그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지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옛날부터 리누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가, 계엄령이 내려진 후에 맨프레드 대공의 가족은 크게 박해당하기도 했다.
황권의 경쟁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전에 아편의 유해성이 논란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마르고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대공비가 종종 처방받아 온 수면제에 아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티나.”
만일에 베티나가 원망의 말 같은 것을 하러 온 것이라면,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에리히는 그녀를 냉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생글생글 잘 웃고 남에게 붙임성 있게 굴어도, 근본이 사촌 오빠와 닮은 구석이 있는 베티나는 변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리누스가 크게 다쳤다면서.”
“그렇긴 하다만.”
“걱정되어서 왔어.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까운 친척이니까. 오빠도 그런 마음으로 온 거잖아?”
“그럼 됐다.”
가까운 친척이라는 말에 맨프레드 대공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베티나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걸로 되었다.
에리히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안내하라고 시종에게 고갯짓했다.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 세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황궁 안에서 싸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차라리 먼지가 내려앉아 있는 쪽이 더 인간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리누스가 누워 있는 병실은 문이 열려 있었다. 여덟 명의 근위대원이 방 안을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커다란 침대에 누운 리누스의 뺨은 붉었다. 열이 오르는 듯했다. 이마에 두른 붕대에 붉은 핏기가 번져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궁의가 공손히 말했다.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했습니다.”
“설마 자해는 아니겠지?”
“……유서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빅토리아 대공의 질문에 시종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에리히가 입가를 비틀었다.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겠지. 펜과 종이를 주지 않았을 텐데.”
“송구합니다.”
시종이 몇 번째인지 모를 사죄를 입에 담았다. 빅토리아 대공이 물었다.
“상태는 어떤가?”
“발견이 늦어진 편입니다. 일단 상처 자체가 사망에 이를 만큼 심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패혈증이라고 부르는 병인데, 내일까지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위험합니다.”
궁의가 설명했다.
“약이 아직 실험 중인 수준의 것이라, 듣는다고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이겨 내셔야 하는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가.”
에리히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 손으로 죽일 작정도 했었으나, 결단을 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 이렇게 정작 죽어 가는 모습을 마주하고 보니 마음속이 복잡했다.
리누스가 열 오른 숨을 색색, 가쁘게 내쉬었다.
평소에 원체 혈색이 없는 얼굴이라, 이렇게 보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 *
재판소 경비대장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민에게 총구를 겨누지 말라는 명령을 받기는 했으나 상황이 아무래도 너무 흉흉했다.
곧이라도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재판장 안으로 군중이 뛰어들기라도 하면 어찌하겠는가.
노이만 의장으로부터 그냥 두라는 별도 지시가 있었으나, 재판장 문이 닫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용하던 사람들까지도 술렁거리며 불온한 분위기를 풍겼다.
안에서는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경비대원과 지원을 온 치안대원들이 두 겹으로 서서 몸으로 재판장의 입구와 창문 쪽을 막고 있었으나, 행여나 선동하는 사람이라도 하나 있으면 곧바로 뚫고 들어오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때도 위협용으로도 총을 들어서는 안 될까?
하지만 저쪽에도 총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을 계엄령 때 이미 서로 알게 되었다.
몸으로만 잘 막을 수 있을지 경비대원도, 치안대원들도 겁에 질려 있었다.
계엄군 중에도 시민과 대치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맞거나 깔려 죽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교수대가 나온 뒤로 일촉즉발 같은 긴장 탓에 오히려 구호가 흐트러졌는데, 누군가가 소리 지르기 시작하자 오히려 소리가 또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끼이익.
그때 문이 열렸다. 일부러 낸 듯, 오래된 건물의 경첩이 내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동시에 창문도 일제히 열렸다.
법복을 갖춰 입은 판사가 일어서 있었다. 그가 맑은 소리를 내며 나무망치를 몇 번이나 두드렸다.
“증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재판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든 재판을 무기한 중단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듯이 앞에서부터 파도치듯 소리가 뒤로 퍼져 나갔다.
“조용히 해 봐!”
“조용히!”
“조용히!”
그리고 약간의 술렁임은 남았으나, 혼란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판사가 말을 이었다.
“문과 창문을 모두 연 채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허가받은 방청객 이외에는 재판장 안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재판 따위는 필요 없이 찢어 죽이는 것을 바라는 자도 많이 있었으나 시민들 대부분은 판사의 말에 동의했다.
기자들이 앞으로 나서서 창문에 달라붙었다. 판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주요 참고인으로서, 황후 마르고트 에른스트 로멜을 소환합니다. 단, 이는 결혼 무효 재판이 아닙니다. 결혼 무효 재판은 배우자가 직접 신청해야 하는바, 황제 폐하께서 청구하시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으므로 황후의 지위는 유지됩니다.”
실망한 신음이 탄식처럼 흘렀다. 그러나 판사의 말에 굳이 반박하여 날뛰는 자는 없었다.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재판은 어디까지나 에른스트 공작의 재판인바, 이에 관련된 항목 중 아편과 노예상에 에른스트 공작이 관여하고 있었는가를 판결하기 위해 사실 관계를 규명합니다.”
이는 노이만 의장을 통해 들어온 제안을 판사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 역시도 자신이 다루게 될 역사적인 재판이 결혼 무효 재판이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이루어졌을 마르고트의 재판을 자신이 먼저 해 버리는 셈이라, 이쪽이 더 그에게는 이익이었다.
판사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고인과 관련된 에른스트 공작가의 죄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황후 마르고트와 공모하여 아편을 재배, 거래 하였는가. 시민을 노예로 만들어 영지 내의 사업에 부렸는가.”
“이를 통해 에른스트 공작가가 얻은 이익은 다음과 같다고 추정합니다.”
판사가 앉고, 젊은 법률가가 나서서 두꺼운 문서를 넘기며 외치듯 말했다.
“뢰어라흐의 공업 도시 기반 시설 공사 전반의 인건비, 하겐부터 보셰까지의 철도 공사 인건비, 에센 성의…….”
“전부 억측입니다! 증거도 없이!”
변호사가 소리쳤지만, 법률가는 개의치 않고 목록을 읊었다.
초반에는 침착하게 받아 적던 기자들이, 마르고트의 부동산 목록에 이르자 호외를 내기 위해 뛰어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검은 마차가 당도했다. 죄인 호송용 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