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기품 있는 거악은 존재하는가.
기품이 인격적 고상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악인이 기품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사람은 타인을 판단할 때, 대개 면밀한 이성적 평가보다는 오감의 느낌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다듬어진 자세와 움직임, 우아한 목소리, 말하는 방식, 손짓 같은 기술적인 방법으로 품위 있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법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마차에서 내릴 사람을 여전히 경외할 마음가짐을 갖추고 있었다.
마르고트 에른스트는 오래된 지배 가문의 적통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존재였고, 여자의 몸을 넘어선 힘과 권위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니 선악을 떠나 저 높다란 옥좌 위에 올라선, 그런 위대한 인물이리라고.
하지만 마차에서 내린 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사악한 품격을 갖춘 지배자도, 우아한 위엄을 두른 황후도 아니었다.
머리가 온통 잿더미 같은 회색으로 변한 자그마한 여자가 간수의 손에 이끌려 마차 밖으로 나왔다.
온몸을 벌벌 떨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부석거리는 피부에 얼룩덜룩 버짐이 피었고, 주름도 몇 배나 늘어난 듯했다.
등과 허리가 굽어지니 안 그래도 왜소한 체구가 더욱 작아 보였다.
한순간에 늙어 버린 듯, 중년이라기보다 노인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총기를 잃은 눈동자가 쉬지 않고 눈꺼풀 안에서 굴렀다.
“황후 폐하, 이쪽으로.”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우려하며 경비대장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내했다.
하지만 마르고트는 어깨를 떨며 눈을 굴리다가,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누구의 재판이냐?”
“에른스트 공작의 재판입니다. 참고인으로 오신 겁니다.”
“오라버니? 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마르고트가 에른스트 공작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마 아주 어릴 때나 그랬으리라.
그러는 동안에도 마르고트의 손발이 떨리고, 식은땀으로 축축한 이마가 번들거렸다.
초점 흐린 눈동자가 여기저기에 꽂혔으나, 현재 상황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섬망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의 많은 사람이 저 모습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금단 증상이다.
모습만 보아도 그녀가 상당히 중증의 중독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악한 것보다 초라한 것이 더 추했다. 위대한 증오가 가슴 떨리게 하는 일은 이제 없었다.
“하.”
누군가가 조롱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어찌 보면, 몰라서 팔아 치웠다는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겠네.”
“제정신으로 할 만한 짓이 아니다 했더니,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의회는 저런 자를 황후라고 받들어 모시면서 그 말을 따랐단 말인가?”
“친위대는 또 어떻고!”
비난과 조소가 사방에서 올랐다.
싸늘하게 식은 군중 속을 마르고트는 경비대장과 간수의 손에 이끌려 가로질렀다.
바깥바람을 쐬는 사이에 머리가 맑아져, 재판장 안으로 들어설 때는 다소나마 호흡도 규칙적이 되었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이 일어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형식적인 예의였으나, 그에 마르고트의 눈빛에 총기가 돌아왔다.
“황후 폐하.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손수건을 빌려주겠나?”
참고인석 앞에 서 있던 경비가 허둥지둥 안주머니를 뒤져 깨끗한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르고트는 그 손수건으로 식은땀이 미끄러지는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자신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심장도 쿵쾅거리고 불규칙하게 뛰었다. 배 속이 텅 비어, 그 안에서 마치 공이라도 튀듯 모든 장기가 제멋대로 꿈틀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르고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약 때문이야.’
결코 자신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 그 빌어먹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마르고트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누가 제게 이런 짓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그녀는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잡으려다가, 제 손이 먼지와 재로 얼룩덜룩한 것을 알아챘다.
이런 상태로 법정으로 불러내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니면, 이것도 술책인가? 자신에게 모욕을 가하기 위한?
마르고트가 분노와 수치로 몸을 떨었다. 재판소까지 끌려온 것부터가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인 일이다.
아우구스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제때 자신을 빼내지 않고. 보석이든, 협상이든, 무엇이든 가능했을 터인데.
아니, 역시 그녀가 배신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현상 파악이 최우선이었다. 마르고트는 혼란한 눈으로 판사를 바라보았다.
법률가가 말했다.
“에른스트 공작은 황후 폐하와 공모하여 시민에게 아편을 퍼뜨리고, 불법 노예를 이용해 이득을 편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황후 폐하께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부당하게 국가 예산을 에른스트에게 밀어주었다는 것도.”
“사사로운 감정이라니.”
마르고트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끼어들어 법률가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위엄 있게 말했다고 생각한 것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손발이 떨리는데, 목과 성대라고 떨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불안정하고 새된 목소리가 공기를 긁었다.
“균형 있고 빠른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적절한 조치였다.”
“아편을 이용해 시민을 불법 노예로 삼는 것이 말입니까?”
법률가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에른스트의 변호사가 황급히 앞으로 나서서 법률가와 마르고트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 질문은 부당합니다. 참고인이 불려 온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숙녀에게 유도 신문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엄하다!”
마르고트가 호통을 쳤다. 착란을 일으키는 숙녀라는 말에 분노를 느낀 탓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굴렀다. 재판장이 일그러진 시야 너머로 비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상 위에 앉은 판사가 죽은 제러드로 보였다. 허튼 질문을 하는 법률가는 얄미운 클레어 델포드다.
피고석에 앉아 충격받은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오라비는 언제나와 똑같은 바로 그 오라비였다.
마르고트는 클레어 델포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예전에도 이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는 그녀를 포섭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나라를 이만큼 끌어올린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첫 번째 철도가 놓인 뒤로 20년 넘는 세월 동안 늘어난 노선은 고작해야 1천 킬로미터 수준에 불과했어.”
마르고트는 기억 속에서 자신의 업적을 퍼 올렸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철도를 깔고 도로를 정비할 수 있었을 것 같나?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남쪽이고 북쪽이고 땅이나 파먹고 살고 있었겠지. 그 잘났다는 클라우제너의 부도 공장이 세워지지 않으면 무의미해.”
“황후 폐하, 우리는 아편과 불법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다들 쓰고 있었어. 나는 유통 경로를 통제하려고 했을 뿐이야. 인건비를 제어하는 것도, 낮잠이나 자는 놈들을 공사장으로 끌어내는 것도, 빠른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어.”
황후가 빠르게 말했다.
그 말이 공감을 얻기 전에, 법률가가 말했다.
“그러니 통치 행위라고 주장하시는 거군요.”
“당연합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아까 에른스트에 국가 예산을 밀어주었다고 했지만, 그게 부당하다는 증거 또한 없습니다. 비교 우위가 있는 북방에 공업 도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계획적으로 도시를 세운다면 큰 강을 끼고 있는 평야가 있되 행정력이 우수한 곳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이 목록은 무엇입니까?”
변호사가 길고 긴 목록을 펼쳤다.
리스트를 일부러 두루마리로 준비한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일이었다. 그는 최상단부터 목록을 읽었다.
“가치 순서대로 나열하죠. 로텐부르크 남부대로에 있는 제퍼슨 콘도미니엄 건물 열네 동, 집의 개수로 따지면 백열여덟 채.”
방청객들이 숨을 들이켰다.
“상업용 건물 열한 개, 아카데미 인근의 타운하우스 일곱 채, 저택 열두 채. 물론 모두 로텐부르크 중심가에 있는 것 중, 에른스트와 관계없이 황후가 되신 후 소유하시게 된 것만 따진 겁니다. 필요하다면 주소도 전부 불러 드리죠.”
법률가가 말을 이었다.
“주요 철도역 인근의 땅과 건물, 사우스랜드 곡물상에 보관되어 있던 1억 골드 가치의 채권, 오스카르 상단의 차명 계좌로 갖고 계신 금괴 약 1억 골드, 그 외에도…….”
목록이 끝이 없었다. 변호사가 반박했다.
“문서로 제출하십시오. 시간 낭비일뿐더러 그것 전부가 다 황후 폐하의 소유라고 증명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증명은 지금부터 할 예정입니다.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은 통치 행위였다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많은 재산이 그에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인정합니다.”
판사가 대답했으나, 이미 늦었다. 이 리스트를 듣고 그녀가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리스트를 읊는 동안 재판소의 하급 서기관들이 움직이며 법정 안에 불을 밝혔다. 사람이 많은 탓에 공기가 매캐했다.
황후는 ‘벌써 해가 졌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 목소리를 아득히 멀리 듣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