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마르고트의 재판은 2심까지 이루어지는 동안 거의 아무런 의미도, 상황 변화도 없었다.
에른스트 공작의 재판 때 결론이 이미 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교수대가 재판소 앞에 설치되었을 때 났다.
판사와 법률가들은 두려움 때문에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고 자존심을 세웠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누구도 또 한 번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 피가 흐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건 의회도,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분노가 치솟을 때마다 그것을 표출할 다른 방법들을 찾아냈다.
재판소의 벽이 온통 페인트로 뒤덮이고, 의사당의 창문이 또다시 깨어졌으며, 새총이 불티나게 팔렸다.
어떤 신문이 『새총과 교수대의 형태적 유사성』이라는 장난 같은 사설을 실은 이후로, 재판소 앞에 세워진 교수대 옆에는 큼직한 새총 모형들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이나 의원의 집 문 앞에 장난감 새총을 심어 놓곤 했다.
그러니, 판사들은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재판을 연이어 했다.
그러나 쓰러진 황후는 다시 재판장에 출석하지 않았으므로, 그 법정은 거의 증거를 읊고 증인이 자백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다급하게 새로 구성된 의회는 의장을 뽑기도 전에 먼저 황후와 에른스트의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동결하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에 따라 장부에 실린 재산이 압류되었다.
이 중에는 황후에게 명의를 빌려준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기 것이라며 항의하는 자도 많았으나, 판사들은 망설이지 않고 모든 재산을 동결한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재판소에서 그런 일을 하는 동안, 디트마어는 카탸와 스테판의 장부를 의회에 공개했다.
이것은 재산만큼 자극적이지는 않았으나 귀족과 정치가, 그리고 고위직에 앉아 있는 중류 계급들에게 더 큰 파문을 가져다주었다.
청문회에 불려 온 검은 연꽃 소속의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태도로 말했다.
“명령대로 물건을 전달했을 따름입니다.”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연잎 궐련을 권했을 뿐이에요.”
“수면제를 찾으시기에 권해 드렸습니다.”
“맞습니다. 콘라트 의원의 은퇴를 요구한 것은 모던 자작입니다. 방법에 대해서는 지정을 받지 않았기에, 명예가 실추될 일을 조작하여 은퇴시켰습니다.”
상속 분쟁과 귀족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 정적 제거가 타인의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방팔방에서 품위를 내던진 고성이 오갔다.
클레어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숨만 내쉬었다.
“왜 안이하게 굴었는지 이해가 될 정도인데……. 이 정도까지 많은 사람의 약점을 쥐고 있다면, 적어도 귀족이나 의원 중에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겠어요. 단순히 돈만 먹였던 게 아니군요.”
“사실상 청부업자가 됨으로써 남의 약점을 만든 셈이기도 하고. 정말 실망스럽군.”
에리히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렇게 말했다.
“몇 건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당신은 황후가 귀족적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래. 그 몇 건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생각했었지.”
권력에 탐욕스러운 자가 다른 것에 탐욕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돈이 권력이 되는 세상이니, 신념이 있지 않고서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또 돈을 갈퀴로 쓸어 담고 있다면서.”
“새총을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설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새총을 다듬어진 목재로 만들어서, 가죽을 씌워서 팔아먹는 네가 더 이상하지.”
“유행이니까. 어차피 돈 많은 사람은 뭘 해도 사요.”
새총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투척 무기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인테리어용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생각 이상으로 수집할 만한 게 늘어나는 법이다.
이왕 재미 삼아 집에 장식할 거라면 예쁜 게 좋지 않겠는가.
게다가 수도 인근에서는 새총을 만들기에 적절한 나뭇가지가 모조리 꺾여서 산이 헐벗는다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제 전부 끝난 건가?”
에리히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할 일은 끝난 지 오래였어요. 나머지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죠.”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적인 행복이나 즐기도록 하지. 6개월이면 꽤 안전하다던데…….”
이제 누가 봐도 무럭무럭 자라 있는 클레어의 아랫배를 은근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에리히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 만해졌다고 그 생각부터 하는 거 봐.”
“너는 아닌가?”
“음. 잘 모르겠고, 마사지는 받고 싶네요.”
클레어가 그의 팔을 잡고 무릎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특히 이쪽.”
“아.”
에리히가 짤막하게 신음했다. 기쁜 소리를 내는 것은 겨우 숨겼으나 거절할 마음 따위는 없었으므로, 그는 가볍게 아내의 몸에 손을 올렸다.
* * *
아우구스타가 황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3심 직전의 일이다.
그녀는 그동안 철저히 무시되었다. 관리하던 재산은 거의 동결되어 압류당했고, 부동산에는 치안대가 빈틈없이 지키고 있다.
의사당에 들어가기는커녕 자신이 관리하던 사람들조차 만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 자신의 몫이었던 재산은 남았다.
만약 원한다면 모르는 척하고 혼자 수도에서 먼 곳으로 가거나 재산을 챙겨 나라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타는 그럴 수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그러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타 님께서 배신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달리 살길이 없었기에 아직까지 그녀 곁에 붙어 있는 심복 하녀들마저 소곤거리며 그런 의견을 나누었다.
“같이 잡혀갈 게 아니라면 제일 먼저 참고인으로 불려 가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증인으로 부르는 일조차 없잖아.”
“쉿, 조용히 해. 그러다 너 진짜 죽어.”
“아니면 그런 장부가 어떻게 다 재판소에 들어갔겠어?”
“오토 경이겠지. 행방불명됐잖아.”
아우구스타의 회계사 이름을 대며 다른 하녀가 속삭였다.
“너 몰랐니? 오토 경은 죽었어. 장부를 훔쳐서 고발한 게 오토 경이라면, 어째서 강에서 떠올랐겠어?”
흉흉한 시대다. 하루에도 몇 구씩 나오는 신원 불명 시체 중에 하나에 불과했으나,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온 사람들까지 못 알아채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행방불명되어 배신을 걱정하기 시작한 지 사흘 만의 일이기도 했고.
“지금은 그냥, 위선을 부리는 거겠지.”
“우리 마님이면 그러셔도 돼. 솔직히, 그렇게까지 헌신하는데도 헌신짝처럼 여긴 게 누군데.”
“헌신짝이라니.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조금씩 마님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멀리하거나 하고……. 앗.”
아우구스타의 모습을 본 하녀들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으나, 그녀는 그런 일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진짜로 믿을 수 없었다. 오토가 배신했다고 해도, 지금 재판소와 의회가 확보한 수준은 말이 안 된다.
카탸의 장부는 진즉 저쪽에 넘어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저쪽이 가진 게 너무 많았다.
‘역시 스테판이? 복수하려고?’
믿기지 않지만, 진짜로 복수심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왜 자신은 내버려 두고 있는 건가.
아니, 내버려 두고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다.
내분을 일으키려고 하는 일인가? 그러나 황후가 구속된 시점부터 이미 아우구스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 내분을 일으켜서 무얼 하겠는가.
법정이든 청문회든 어느 쪽이든 들어가야 했다. 가서, 재산을 모아들인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라고 자백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철저히 출입을 금지당했다.
치안대에 가서라도 이야기해 보려 했지만, 치안대장은 친절하게 웃는 낯으로 차를 대접하고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고 무시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직접 끊은 가족의 인연이라도 빌리려고 했다.
하지만 후작위는 이미 헤르만의 것이고, 남작령으로 옮겨 간 호르스트는 힘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고모님. 이미 루덴도르프와 고모님의 인연은 끊어졌습니다.
루덴도르프는 이미 수치를 입을 만큼 입었습니다. 이 이상 집안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왕 일이 이리되었으니, 한동안 외국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오시지요.
그리고 일이 잠잠해지면 저희 영지로 오십시오. 환영한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지만, 조용한 생활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기가 귀엽습니다. 분명히 고모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호르스트 드림.』
그녀는 이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아니, 호르스트가 자신을 모욕했다는 것이 아니다.
마르고트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 시녀였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모욕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더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은 황후가 금단 증상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제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아무리 해도 재판소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