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3심에서 논란이 된 것은 마르고트를 처벌하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그녀를 황후로 처벌할 것인가, 황후가 아닌 에른스트 공녀로 처벌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또다시 초야 문제로 되돌아온 셈이다.
재판소는 결국 이 문제를 황제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뜻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보일까 봐 우려되긴 했으나, 판결문에 적힐 신분은 중요한 문제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황제는 판사의 편지를 펼쳐 훑자마자 대뜸 말했다.
“마르고트가 내 아내일 리 있나.”
“그러지 마세요.”
마침 그때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던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은 황실의 미래나 국체를 생각해서 그러신 게 아니시니까요.”
그의 두 번째 결혼은 귀족원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고, 감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결혼 생활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사생활이다. 황제가 곧 국가였던 시대는 이미 지났으니, 황제의 사생활과 직위 또한 분리되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판결문에 넣고자 하는 황후라는 단어가 애초부터 황제의 아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마르고트가 황후라는 권위를 가지고 모든 죄를 저질렀으니, 그 이름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군. 알겠네.”
황제가 수월하게 대답했기에, 설득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던 클레어는 오히려 놀랐다.
최근 퍽 평화로워진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나는 범용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네. 나보다 나은 사람의 충고는 따르는 게 낫다는 거지.”
“…….”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것은 그것대로 군주로서는 위험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죽어도 제 고집대로 하는 사람보다는 나아 보이긴 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제는 진짜로, 뭔가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게 되었고.’
어렴풋이 먼 나라의 입헌 군주제를 구경만 할 때와 달리, 클레어는 앞으로도 의외로 왕의 이름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배웠다.
에리히가 의회에 들어가지 않아도 원하는 정책을 관철할 수 있듯이, 아마 황실의 힘도 그런 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전제 군주로서 황제는 진즉 끝났다. 황후를 법정에서 처벌했다는 기록도 남는다.
어차피 한 차례만으로 미래가 오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한 번은 피를 많이 흘리지 않고 시민들이 권리를 가져간 셈이다.
그리하여, 3심 법정이 내린 판결은 다음과 같았다.
“황후 마르고트 에른스트 로멜은 국권 탈취와 축재를 위해 마약을 퍼뜨리고 시민을 노예로 삼았으며, 계엄령을 꾸며 내전을 일으켰다.
또한, 하수인을 이용해 수십 건의 살인을 교사하였다.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인바, 제국법에 의거하여 교수형에 처한다.”
“감히 하급 판사 따위가 감히! 여기가 대체 어디냐? 아우구스타는 어디 갔느냐?”
일시적으로 의식이 돌아온 건지, 아니면 또다시 발작을 일으킨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로 황후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우구스타를 불러와라! 감히 내가 서 있는데, 저기 앉아 있는 저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나는, 나는……!”
간수가 양옆에서 그녀의 팔짱을 끼어 잡고 강제로 끌어내는 동안에도 소란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끌려 나가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흘 후, 하원 의원과 판사, 법률가와 신청자 중 임의로 선발한 시민 대표가 입회한 가운데 형이 집행되었다.
에른스트 공작을 위시하여 심복 여럿이 내란죄로 처형되었다.
시신은 효수되지 않았으되, 원하는 자라면 볼 수 있도록 의사당의 홀에서 공개적으로 합동 장례가 치러졌으며, 모두 공동묘지에 이름도 없이 죄인으로서 묻혔다.
기념물은 황후를 위해서가 아니라 계엄군에게 죽은 시위대를 위해 세워졌다.
아렌 지역에서는 델포드 남작이 제일 먼저 위령비를 세운 이후로 곳곳에서 부유한 자들이 기부금을 내어 위령비를 세웠는데, 사실상 위령비라기보다 아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실은 자신도 노예를 부리고 있거나 빚을 지워 착취하는 방식으로 인건비를 아끼던 자들이 제 발 저려서 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확실하게 경고는 되었다.
* * *
이런 모든 것은 어른의 일이다.
아직 자기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엘리엇은 요즘 너무 신이 났다.
“히히!”
황제 할아버지는 자주 초코 쿠키를 집어 주었고, 매번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던 무서운 대장님도 상냥해졌다.
밥 먹기 전에 간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 특히 초콜릿은 이가 썩는다고 자주 안 주는 엄마의 금지령이 풀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슬픈 일도 있었다.
“아가, 그렇게 과자를 많이 먹어서 저녁은 어쩌려고?”
엘리엇의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어 주며 황제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게 꾸중이라거나 주의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엘리엇은 자신의 계획을 신나서 말했다.
“물놀이를 할 거예요! 그러면 금방 배고파져서 저녁밥도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보모가 그렇게 해도 된다더냐?”
“안 돼요?”
그제야 그 말이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엘리엇이 눈을 도르르 굴렸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안 되는지 아닌지 나는 모르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물놀이를 하기에는 저녁 시간이 너무 금방 올 것 같구나.”
“앗.”
엘리엇이 그제야 깜짝 놀라 벽을 보았다.
클라우제너 저택에는 곳곳에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으나, 엘리엇은 아직 시계를 보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숫자는 배웠지만, 시계 판에 쓰여 있는 것은 하필이면 엘리엇이 아는 숫자가 아니었다.
엘리엇은 손가락으로 열두 시 자리부터 바의 숫자를 꼽아 가며 중얼거렸다.
“일, 이, 삼, 사, 오……. 일은 오이고……. 히잉.”
“다섯 시 삼십오 분이란다.”
“앗, 큰일 나요!”
삼십을 넘으면 큰 숫자다. 엘리엇은 바동바동 높다란 의자에서 기어 내려갔다.
이 뒤에 일정이 있다면 어련히 알아서 사람이 부르러 왔겠지 싶으면서도, 그 모습이 귀여워 황제는 웃음만 머금었다.
“큰일이라니? 무슨 큰일?”
“찰스 삼촌이 늦으면 망아지는 혼자 보러 간다고 했어요!”
“망아지?”
황제는 결국 아이를 손수 안아 바닥에 내려 주며 물었다.
“네! 마구간의 말이 아기를 낳았대요!”
“귀엽겠구나.”
엘리엇은 그 말을 들을 정신도 없는 양 벌써 뛰어나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짤따란 다리로 우다다 문까지 뛰어갔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홱 멈췄다.
그러다가 넘어질 뻔해서 시종과 근위대원들을 모조리 식겁하게 했으나, 황제는 웃음만 머금었다.
엘리엇이 폴짝 돌아서더니 잠깐 우물우물하다가, 오른손을 들었다가 왼쪽 가슴에 대며 무릎과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면, 저는 먼저, 음,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리하려무나.”
입놀림에도, 몸놀림에도 어색한 곳이 있었으나 그래도 형태는 그럭저럭 갖추어진 예법이었다.
아이는 정말로 빨리 자란다. 처음 만나고 이제 7개월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벌써 팔다리도 제법 길어졌다.
오래지 않아 제 아비와 똑같이 우아한 청년으로 성장할 것이다.
황제는 본을 보이듯 똑같은 자세로 마주 인사해 주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신나서 두 팔을 흔들며 팔짝 뛰고, 후다닥 밖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은 여전히 어린애였다.
“이제 집에 가고 싶은데.”
마구간에 웅크리고 있는 찰스는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전 같으면, 일없이 마구간에서 시간을 보내다니 품위 없는 일이라고 꾸짖었을 제임스도 함께 있었다.
황제가 방문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했다. 영광으로 여기는 것도 한두 번 만날 때의 일이다.
황제는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며, 심지어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니는 엘리엇을 따라 어디에서 출몰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애를 차라리 황궁에서 키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이제 제임스는 감히 클레어에게 뭘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시도해 보긴 했다.
[황제 폐하를 여기까지 오시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네가 엘리엇을 데리고 황궁으로 가야지.]
[제가요?]
그의 훈계에 클레어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물었다. 사실 불평을 한 거지, 제임스도 그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량한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는 이제 7개월인데도 어머니의 배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진짜 쌍둥이 아니냐고 클레어가 의사를 붙잡고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아니라는 확답만 받았다. 어쨌든 힘들어 보이는 건 확실했다.
[숙부님이 데리고 가시면 되겠네요. 믿을 만한 친척이 돌봐 주는 게 제일이니.]
[아니, 보모도 있고, 교육관도…….]
[엘리엇 귀에 들어가면 안 될 이야기가 황궁에는 아주 많을 것 같은데요.]
제임스는 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흉흉한 시절인 것도 그렇지만, 클레어가 그와 찰스를 굳이 저택에 머물게 하는 이유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아직 죽음을 배우기에 너무 이르다.
하늘에 있는 엄마, 아빠라고 가르치긴 했어도, 그게 진짜로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