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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분명해-253화 (254/263)

#253화

출세를 꿈꾸는 것도 배짱이 좀 있어야 하는 일이다.

황제와 아렌 공왕 옆에 가서 아부하고, 여태껏 만만하게 생각해 온 조카 손주를 잘 구슬려 명예를 좀 얻어 보겠다는 생각은 제임스가 잠자리에 누워서 이런저런 고민을 할 때나 떠오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자신과 찰스에게 이익이 될 거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임스로서는 진일보한 것이긴 했다.

근래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괴짜 조카딸 덕에 해괴한 일에 꽤 익숙해졌는데도 그랬다.

그건 사실 그가 클레어의 보호 아래 평화롭게 지내 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존이든 증오든, 어느 한쪽에라도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내가 젊을 때와 다르다고 한탄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말세야.”

제임스는 마구간 구석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은 채 신문을 들고, 최대한 품위를 유지한 채 말했다.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군령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회의 비준이 필요하다는 법이 제정되었다는 기사가 적혀 있었다.

“재판소장을 황제 폐하께서 임명하시기 위해서는 의회 추천이 필요하다고 할 때도 황당했는데, 이제는 아예 이걸 투표한다고 하질 않나. 선거 전에 후보가 반드시 사진을 길거리에 걸고 종잇장에 연설문을 적어 돌려야 한다는 법을 만들질 않나.”

“아버지.”

“그냥 이름을 써서 내면 될 걸, 글도 모르는 자들에게 선거권을 주겠다고 투표용지를 뭐 따로 인쇄하고 어쩌고. 게다가 뭐, 특별한 스탬프를 만들어? 이런 낭비를 보았나.”

제임스는 혀를 찼다.

법률가니 상단주니 하는 놈들이 정치에 관여한다고 해서 기가 막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신법은 한술 더 떴다.

귀족원 명부에서 지워진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제임스도 황후파였다가 찍혀 나간 사람까지 편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재정 문제 때문에 영지를 판 가문까지 쫓아내는 것은 너무했다. 보조를 해 주지는 못할망정 말이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해당 지역에서 또 투표로 선발된 자들이었다. 이 투표는 지주들이 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찰스가 우물대며 반박했다.

“우리랑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아버지는 귀족원 의원도 아니셨고.”

“이 녀석!”

제임스는 지팡이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찰스도 이제 쫄지 않았다. 그는 겁쟁이였으나, 전처럼 아버지가 두렵지는 않았다.

찰스만이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딱히 윗사람이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어휴.”

제임스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마구간에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제아무리 클라우제너의 마구간이 널찍하고 깨끗한 편이라고 해도, 귀족 셋이 담화를 즐길 만한 곳은 아니니 마부들이 쩔쩔매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번 손님은 아렌 공왕이었다.

“공왕 전하……!”

제임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찰스가 그 뒤를 따랐지만, 표정을 관리하지 못해 부루퉁한 얼굴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렌 공왕은 그런 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이런 곳에 있었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공왕 전하?”

혹시 엘리엇이 끌고 왔나 싶어 슬쩍 살폈지만, 공왕은 시중인 한 사람만 거느린 채였다. 그가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다.

“별것은 아니고, 엘리엇이 하도 망아지가 예쁘다고 야단이라 구경하러 왔다네. 방해가 되었다면, 나중에 다시 올까?”

“아닙니다.”

찰스가 공손하게 대답하고, 바로 뒤에 있는 마장으로 공왕을 안내해 주었다.

눈처럼 하얀 어린 망아지 한 마리가 어미 옆에서 바닥을 구르듯 하며 풀을 박차고 놀다가 찰스를 보고 탈래탈래 다가왔다.

아렌 공왕이 웃었다.

“순하구나.”

“아직 워낙 어려서요.”

“자네 망아지인가?”

“그렇진 않습니다. 제가 워낙 말을 좋아해서 마구간에 오다가다 하다 보니 낯을 익혀서 그렇습니다.”

“그렇구먼.”

공왕이 아쉬운 얼굴을 했기에 제임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아니, 엘리엇이 이 망아지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서.”

공왕이 손을 내밀어 망아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찰스 경의 것이라면, 내가 사서 선물해 주려고 했지. 하지만 클라우제너의 것이라면 그러기도 애매하군. 클라우제너의 것을 사서 클라우제너에게 선물할 수는 없으니.”

말하다가 그는 제임스의 머뭇거리는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는가?”

“아니, 클라우제너는 클라우제너고, 황실은 황실 아니겠습니까?”

“글쎄. 우리 같은 늙은이 생각은 그렇지만.”

아렌 공왕이 미소하며 말했다.

“내가 델포드 남작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라도, 그 말을 하면 그녀가 화를 내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이 가는군.”

“요즘 애라서.”

“아버지.”

찰스가 그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제임스는 뭐 못 할 말 했느냐는 듯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아렌 공왕은 웃음만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엘리엇이 델포드에 있는 강아지와 자네의 말을 몹시 그리워하던데.”

“엘리엇이 동물을 좋아하긴 하지요. 쥐잡이 테리어와 시시한 시골말이라서 공왕 전하 눈에는 차지 않으실 겁니다.”

“데려오라는 이야기는 아니라네. 이제 정세도 좀 안정되고 평화로워졌으니, 엘리엇이 바빠지기 전에 한번 델포드를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영광입니다.”

바짝 긴장한 태도로 제임스가 대답했다. 찰스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요즘 움직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닌데…….”

“이 녀석! 그게 중요한 일이냐? 너와 내가 모시면 되는 일이지!”

“델포드 남작의 의향은 델포드 남작에게 물으면 될 일이지만, 어쨌든 해산 직후에 위의 아이까지 마음 쓰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니까 말일세.”

“이렇게 마음 써 주시니, 클레어도 영광으로 알 겁니다.”

글쎄, 클레어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마운 마음과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아렌 공왕은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드디어 그는 다른 의미에서 공왕인 자신에게서 벗어난 것 같았다.

* * *

아렌 공왕이 그다음으로 발길을 향한 곳은 아이 방 쪽이었다.

큼직한 주머니에는 작은 기차 모형이 들어 있었다. 사실 그걸 넣기 위해 주머니가 큰 옷을 입기도 했다.

이제 아렌 공왕의 방문에 익숙해진 이들은 크게 놀라거나 과례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인사만 올리고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딱 한 명, 유모라는 마사 부인만이 난처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헉, 전하!”

“무릎 꿇지 말게. 그보다, 안이 소란한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에서 고함 소리가 터졌다.

“엄마 미워!!”

콰당!

문이 열렸다. 뛰쳐나온 엘리엇이 앞도 보지 않고 달리다가 공왕의 무릎에 부딪혔다.

“아고고고!”

“이런, 조심해야지.”

아이가 뒤로 넘어지기 전에 아렌 공왕은 얼른 보듬어 붙들었다.

“공왕 할아버지!”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목소리를 내며 엘리엇이 그에게 응석 부리듯 안겨 들었다.

“엘리엇 델포드! 엄마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클레어가 화를 내며 뒤따라 나오다가 아렌 공왕과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얼굴에 잠깐 갈등이 스쳤다.

하지만 손님 앞이고 뭐고 훈육은 해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공왕 전하, 죄송하지만 응접실에서 30분 정도 기다려 주지 않으시겠어요?”

“싫어! 공왕 할아버지는 내 손님인데 엄마가 왜!”

“엘리엇, 착한 아이는 떼쓰는 거 아니라고 했지!”

“나쁜 아이 할 거야! 세상에서 젤루 나쁜 아이 할 거야!”

엘리엇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공왕은 아이를 안아 주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말했다.

“엘리엇,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그치만 싫어요! 나 혼자서는 궁전에 안 가!”

엘리엇이 소리쳤다가, 이번에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나 쫓아내지 마, 흑!”

아렌 공왕은 무심코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황제 폐하께서 황궁에 엘리엇의 방을 꾸며 준다고 하셔서, 가서 하루 자고 오라고 했더니 밥을 굶겠다는 거예요.”

클레어가 머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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