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아렌 공왕은 난처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이렇게 싫어하는데, 안 가도 되지 않을까?”
그저 좋아하는 일만 하게 해 주고 싶기도 했지만, 아렌 공왕에게도 이제 황궁에서 남은 기억 중 썩 좋은 것이 없었다.
그것 보라는 듯 엘리엇이 공왕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클레어가 툭 말했다.
“아기 아니라더니?”
“우……!”
엘리엇이 투정 부리는 소리를 냈다. 훌륭하고 멋진 형이나 오빠가 되려고 했지만, 또 그러라고 하니까 서러웠다.
아렌 공왕은 여전히 엘리엇을 안아 주어야 할지 아닐지 결정하지 못한 채로 ‘이런’ 하고 탄식했다.
엘리엇이 황궁에 가기 싫다는 마음이 이해되었다.
아마 엄마 아빠가 둘 다 없었던 시기가 너무 길어서, 집에서 떠나는 게 무서운 것이리라.
공왕은 그런 마음을 읽어 주길 바라면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조부모가 오냐오냐해서 아이를 망친다더니.’
영원히 황궁에 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엘리엇은 황태손이다.
양육을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하더라도, 행사니 의전이니 하는 문제로 종종 황궁에 방문해야 한다.
그때마다 클레어가 붙어 있어 줄 수는 없다.
그리고 행사가 없어도, 제러드의 것을 상속받으려면 결국에는 황궁에 있어야 한다.
그래도 아이 방을 만든 것은 황제가 너무 서두른 것일지도 모른다.
“엘리엇 입장에서는, 갑자기 황궁에 자기 방이 생겼다고 하면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황궁을 좋아했으면 해서, 거기에 놀이방을 만들었으면 한다고 제가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클레어가 눈을 매섭게 뜨고 엘리엇을 꾸중했다.
“가기 싫으면 싫다고만 말하면 되지, 밥을 안 먹겠다고 하는 건 잘못이야.”
“흐윽…….”
“울지 마. 너 그냥 엄마 마음 아프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엘리엇이 울먹거리면서 아렌 공왕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는 아렌 공왕도 망설임 없이 클레어의 편을 들었다.
“그건 안 되지.”
“할아버지도 미워.”
“잘 먹어야 튼튼하고 건강한 아이가 되지.”
공왕이 다정하게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엇은 그 말에 갈등했다. 착한 아이는 그만하기로 했지만, 튼튼하고 건강한 건 착한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건강한 게 제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늘 들어 와서 헷갈렸다.
엘리엇은 어릴 때 엄마가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라고 혼잣말로 흥얼거리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때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엘리엇을 고민에서 구원했다. 엘리엇은 공왕의 팔을 잡은 채 그 뒤를 빼꼼 내다보았다가 얼굴을 환하게 했다.
“아빠!”
당연히 아빠가 제 편을 들어 주리라고 믿는 아이만 보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에리히는 무뚝뚝한 얼굴로 다가와, 조르르 제 다리에 매달리는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먼저 공왕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공왕 전하.”
“또 실례하고 있네. 매번 너무 많이 찾아와 민망하지만…….”
“별말씀을. 언제든 오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엘리엇, 너 또 뭔가 저지른 모양이구나.”
어떻게 봐도 엘리엇이 클레어에게 혼나다가 공왕에게 매달려 있던 형국이라, 에리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클레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미운 다섯 살 이야기를 했던 게 어젯밤의 일이다.
“아빠, 나 황궁 안 가면 안 돼?”
“황궁에? 가야지.”
“아빠아아아!”
엘리엇이 떼를 썼다. 에리히가 클레어 쪽을 바라보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황궁에 가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로 밥을 안 먹겠다고 협박했다고요.”
“그건 안 되지, 엘리엇. 잘 먹고 잘 자는 건 협상 거리가 아니다.”
“엄마는 고자질쟁이!”
“진짜로 저녁밥 안 먹을 거야? 아, 알았다. 너 또 쿠키 먹었지?”
합, 하고 엘리엇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지난번에 초콜릿이 앞니에 묻어서 걸렸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클레어가 이마를 짚었다. 괜히 황제와 한 묶음으로 미안해진 아렌 공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간식을 함부로 주지 않도록 내가 잘 이야기하겠네.”
“네, 꼭 좀 부탁드릴게요.”
아이 입에 뭘 넣어 주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는 클레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어리광을 받아 주는 일은 도가 지나쳤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못 하게 한 게 한 맺힌 사람처럼, 그는 엘리엇이 좋아하거나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무작정 전부 들어주려고 했다.
그 마음도 이해는 했으나, 지지해 주는 건 쿠키 먹이는 거랑은 다른 문제 아닌가 싶었다.
에리히가 손을 내밀어 엘리엇을 달랑 안아 올렸다.
“황궁에 가자.”
“싫어.”
“그러면 기차 방에는 나 혼자 가야겠군.”
“기차?”
좋아하는 단어가 나와서 엘리엇이 깜짝 놀랐다.
엘리엇은 아직까지도 가끔 신혼여행을 따라다닐 때 에리히와 함께 기차 난간에서 바람을 맞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기차 방이요?”
클레어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되물었다.
“아이 방을 만들면서 황궁을 정리 중인데, 기차 모형이 꽤 여러 개 나왔다더군. 시종장이 어찌할까 묻기에, 그냥 장난감으로 쓰는 것보다는 아예 방 하나를 비워서 모형실로 만드는 게 어떠냐고 권해 보았지.”
“아.”
모형실 자체는 대단한 게 아니다. 클레어는 에리히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알아들었다.
아이 방을 만들면서 황궁을 정리했다는 게,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제러드의 방을 정리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지금 정리되고 있는 것은 황후궁이다. 그리고 황후궁에 있던 리누스의 방도.
리누스는 마르고트의 재판이 3심에 이를 무렵에 죽었다.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최신 개발된 항생제는 그를 낫게 하기는커녕 고통스러운 시간을 연장했을 뿐이다.
잠깐 열이 떨어졌나 싶다가도 다시 오르고, 또다시 오르고 하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다.
[죽는다고 죄에서 달아날 수는 없을 텐데,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지?]
빅토리아 대공도, 베티나 공녀도 떠난 다음에야 에리히는 그런 책망을 했었다.
그는 리누스가 늘 그랬듯이 조소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조롱조로 말하긴 했지만, 진짜로 전처럼 모든 것을 비웃고 있지는 않았다.
[공작께서는 죄인의 입장이라는 걸 잘 모르시는군. 나는 무시되고 있었어.]
[무시?]
[경비원도, 밥을 가져다주는 시종도 말을 전해 주지 않았으니까, 형을 불러내려면 이 수밖에 없었어.]
에리히는 어느 쪽에 먼저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렌 공왕이 고립시킨 것에 리누스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그가 형이라고 부른 것에 놀라야 할지.
열에 들뜬 리누스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그렇다 해도, 황후의 재판이 끝나면 다시 외부와 연락이 되었을 거야.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해야 했어. 재판이 끝나기 전에.]
리누스는 몇 번이나 기침을 하고, 열에 신음하다가 겨우 말했다.
[내가 증언할 수 있어. 어머니가 형을 죽였다는 걸.]
[…….]
[들었으니까. 당일에…….]
그는 몇 마디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리누스가 생각하는 것만큼 결정적인 증거 같은 건 아니었다. 사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며, 이번 재판에서 논점도 아니었다.
황후가 제러드를 죽였다는 심증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리누스가 증인이 됨으로써 싸움을 시작할 법도 하다.
하지만 황권 다툼을 이유로 황후를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에 에리히는 이미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니 리누스가 내놓은 증거가 설령 물증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것을 굳이 밖으로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리누스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는 고해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줄곧 도망만 치던 놈이 처음으로 제 입으로 저로 인해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노라 고백한 것이다.
리누스는 착란을 일으킨 채 여러 가지를 고해했다.
그 고해 대부분은 에리히가 들을 것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대답이 필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네겐 막을 능력이 없었던 거라고 잔인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엘리엇을 만나게 해 주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