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그게 마지막이었다.
제 손으로 죽일 각오까지 한 번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생으로 여겼던 이의 인생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에리히는 여전히 리누스가 어린아이인 채 죽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고백하고 싶은 말은 전부 고백했으리라. 들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을 테지만 말이다.
리누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마르고트의 죽음처럼 세상에 무슨 영향을 남기는 일도 없었다.
마르고트가 황후로 죽은 이상 그도 황자인 채였다.
그러나 사적으로 황제가 아들이 아니라고 선언해 버린 상황이다. 죄를 묻기도, 묻지 않기도 애매했다.
때문에 누구도 리누스의 죽음을 마음 쓰지 않았고, 마치 건드리면 골칫거리가 쏟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멀리서 감시만 했다.
생전과 마찬가지였다.
밀랍처럼 희게 변한 리누스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으나, 에리히는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친인의 죽음은 그에게 이상한 회한을 가져다주었다. 부친의 죽음 때와 마찬가지다.
물론 가신들은 자신이 죽는다면 슬퍼할 것이다. 아마 영지민의 다수가 조문소에도 방문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에리히 클라우제너라고 하는 인간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는 제러드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부친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 사람이 자신과 슈나이더 백작밖에 없었듯이 자신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일에 클레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리누스 역시도 누군가의 애도를 받아야 했다.
그가 슬퍼해 주기를 원하는 단 두 사람은 아마도 엘리엇과 클레어일 테지만, 그건 아이가 잠깐 알았을 뿐인 삼촌을 위해 짊어져야 할 부담은 아니었다.
클레어가 한동안 엘리엇을 황궁에 혼자 보내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그는 생각했다.
황궁에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아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내가 장례에 참석해야 할까요? 아는 사람 자체가 몇 명 없을 텐데.]
[오지 마.]
에리히는 그날 밤 침대에서 아내를 끌어안고 누운 채 고요히 있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어리석고 불쌍한 놈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치당할 뻔한 당신이 마음 쓸 일은 아니지.]
[하긴 그래요.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를 떠올리면 괘씸하기도 하고.]
클레어는 그의 어깨를 베고 누운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혼자 장례식에 서 있는 건 싫어서.]
[나도 가지 말까?]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클레어는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 손으로 죽일 각오도 되어 있었다고 했지만, 그건 책임감에서 나온 이야기일 테고, 사실은 동생으로 여겼던 거잖아요. 원래 슬픈 일에는 남이 함께해 줘야 하는 거예요.]
[글쎄. 빅토리아 이모님은 불쌍하게 여기시지만, 그건 리누스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걸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자기가 얻고 싶었던 것을 사실 이미 전부 갖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몰랐다니,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클레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에리히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 애도는 침실 안에서, 오로지 하룻밤만 짧게 이루어진 것이다.
황제는 여전히 리누스에게 관심이 없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은 엘리엇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니 황후궁은 금세 정리되었다. 황후궁에 있었던 리누스의 옛 거처도.
장난감이 꽤 여러 개 나왔는데 대부분 기차 모형이었다.
황자에게 진상된 물건답게 대부분 정교하고 좋은 물건이었기에 그대로 처리하는 것도 아까워서, 에리히는 황제에게 그것으로 모형 방을 만들어 주라고 권유했다.
안 그래도 엘리엇도 한창 기차에 빠져 있었다.
기차를 타는 걸 좋아하는 건지 기차 자체를 좋아하는 건지는 아직 좀 불분명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좋아할 만한 공간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제국 전체 지도와 철도 노선을 보여 주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엘리엇이 자라서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면, 그대로 떼어다가 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했다.
[이제 황제가 통치하는 세상이 지나갔다 하더라도, 위에 선 자라면 자신이 다스리는 땅이 어떤 형상인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에리히의 말에 클레어는 흐흥 웃었지만 말이다.
[통치와 다스린다는 건 같은 뜻이잖아요. 알아 두는 게 나쁠 건 없지만요.]
그래서 시작된 간단한 꾸밈이 마무리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아이 방 말씀만 하셔서 그런 줄 알았는데, 기차 방도 완성되었군요.”
“기차 방?”
전혀 모르고 있었던 엘리엇이 혹했다.
“어, 엄마.”
이제 와서 가겠다고 하자니 계속 우기던 것을 어기는 셈이라 엘리엇이 더듬더듬 말했다. 아렌 공왕이 미소 지으며 엘리엇을 도와주었다.
“그거 멋지구나. 나도 같이 가 볼까?”
“진짜요?!”
“왜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하겠니?”
“아빠도?”
“널 데리고 가야지.”
“그럼…….”
엘리엇이 손가락을 꼬았다.
“엄마도, 같이 가면 안 돼?”
“나도?”
클레어가 번거로운 마음을 숨기고 되물었다. 엘리엇의 불안감을 생각하면 자신도 가야 하지만, 몸이 무거워서 황궁까지 걸음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안 돼요?”
엘리엇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아이처럼 눈을 치뜨며 클레어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에리히와 다녀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옷 갈아입어야 되는데…….”
“그냥 가지, 새삼.”
“당신은 그게 예복이지만 나는 이렇게 펑퍼짐하게 입고 있다고요.”
황제가 자택을 방문했을 때 맞이하는 것과는 또 문제가 달랐다. 황제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거나 알현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예법을 파괴해서 논란을 만들 생각은 없었고, 황궁 같은 곳에 외출하려면 또 그 나름대로 옷매무새를 갖춰야 하는 법이다.
“그대로도 예뻐.”
“그거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설령 내가 미인이라도 얼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가족의 집에 가는 거야. 앞으로 엘리엇을 데리고 자주 다녀야 할 텐데, 일일이 궁정용 드레스를 갖춰 입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게 돼.”
“남자용은 궁정용이나 평상용이나 그렇게 차이도 없으니까 그렇죠.”
“편하게 해. 너 권위 무너뜨리는 거 좋아하잖아.”
“그거랑은 또 다르다니까요.”
클레어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편하게 가는 게 좋겠다는 에리히의 충고는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임신이라는 핑계가 있을 때 편하게 입고 드나드는 연습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황제에게 긴히 해야 할 이야기도 있었다.
“그럼 나 황궁 갈래! 엄마랑 아빠도 같이 자고 오는 거야?”
“그건 좀 생각해 보자.”
저녁 식사까지는 귀찮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 황제 폐하께서 엘리엇이 있는데 자리를 비켜 줄 리 없었다.
엘리엇이 신나서 팔짝 뛰었다.
* * *
황제는 기차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우리 아가.”
그가 벙글거리고 웃으며 엘리엇을 맞이했다. 오전에도 봤는데, 또 봐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손자란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다는 말이 있지만, 황제와 아렌 공왕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물론, 보모가 있으니 그런 것이기도 했다.
황제가 손수 방문을 열어 주었다. 큼직한 방에, 엘리엇이 30보는 걸어야 가로 길이를 전부 채울 수 있는 거대한 디오라마가 있었다.
“와, 멋지네요.”
실제 비율을 맞추어 산맥과 평야가 대부분 표현되어 있었다.
그 위에 철도를 얹고 기차를 얹어 놓은 모습은 진짜로 나라를 작게 축소시켜 놓은 것처럼 보였다.
“디오라마는 원래 있던 것을 가져온 거야. 전시용으로 만들었다는군.”
“이거 군사용으로 쓰이는 거 아니에요?”
“교육용이야.”
에리히는 그렇게만 말했다. 황후가 옛날에 리누스의 교육을 위해 만들게 했다가, 리누스가 에른스트로 보내지면서 방치되고 있던 것을 완성시킨 것이었다.
엘리엇이 신나서 철도 모형 쪽으로 달려갔다.
“이거 만져도 돼요?”
“기차만.”
아렌 공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엘리엇에게 줄 게 하나 있었는데, 가져오길 정말 잘했군. 오늘 주기 딱 맞아.”
“선물이에요?!”
엘리엇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아렌 공왕이 주머니에서 작은 증기 기관차 장난감을 하나 꺼내서 엘리엇의 손에 쥐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