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아직 예정일까지 열흘은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에리히는 황급히 클레어를 안아 들었다. 산실을 일찌감치 만들어 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의사를 불러와.”
그는 문을 걷어차 열면서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말했다.
잠깐 통증이 잠잠해졌나 싶었던 클레어가 ‘산파도’라고 말하려다가 또다시 신음 소리를 냈다.
에리히는 깜짝 놀라 빠른 걸음으로 산실 쪽으로 향했다.
“브란트 선생님, 브란트 선생님을 모셔 와! 공작 부인께서 산실에 들어가십니다!”
하인이 달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에리히는 그 무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공작저 전체가 거대한 소란에 휩쓸렸다. 하녀들이 뜨거운 물을 끓이고, 하인이 산파를 부르러 뛰어나갔다.
에리히는 클레어에게 충격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산실까지 옮겼다.
하녀들이 새로 삶은 시트를 침대에 깔았다.
“산파는? 적어도 한 사람은 있어야 해.”
“지금 불렀습니다!”
“왜 대기시켜 두지 않았나!”
어쩔 수 없었다. 산실 옆방에 산파가 들어오기로 한 것은 사흘 후 예정이었다.
대신 마사가 깨끗하게 삶은 흰옷을 입고 들어왔다.
“공작님, 나가 계세요!”
마사가 전에 없이 그에게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그건 남편이 산실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인 이유에서 한 말이었으나, 에리히는 비로소 자신도 소독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 으, 아!”
그러는 동안 클레어의 비명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조금만 기다려. 의사가 곧 올 거야.”
의사가 온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에리히는 클레어를 달래듯이 그렇게 말하며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에 입술을 한 번 눌렀다.
클레어는 그걸 거의 인지하지도 못했다. 엘리사는 가진통을 거의 이틀이나 겪었다.
그나마도 아팠다 안 아팠다 했기 때문에, 결국은 초주검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견디기 수월했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길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클레어는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아플 것은 알았지만,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라더니 진짜였다.
솔직히 그나마 견딜 만했던 짧은 시간이 끝나고 나자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손에 걸리는 것을 무작정 움켜쥐었는데, 에리히는 그것이 자신을 찾는 것인 줄 알고 다정하게 고개를 숙이며 달랬다.
“괜찮을 거야, 클레어.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적어도 소독을 하고 나서…….”
“악!”
클레어가 비명을 지르다 말고 손에 잡힌 것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건 제법 길어진 에리히의 머리칼이었다.
“헉!”
이건 자신이 엄포 놨던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다.
물론 클레어는 제 말을 지킬 작정이었지만, 그냥 아팠던 만큼 쥐어뜯어 주겠다 이거였지, 진짜로 산실에서 무아몽중인 채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움켜쥐듯 남편의 머리를 뽑아 놓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으윽!”
어지간해서는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 에리히도 비명을 지를 정도의 아귀힘이었다.
당황한 마사가 달려와 클레어의 손을 놓게 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전에 달려 들어온 브란트가 소리쳤다.
“산도가 열립니다! 그냥 계세요!”
별수 없이 에리히는 그 자리에서 몸을 구부리고 버텼다. 오염을 염려한 하녀가 황급히 소독된 천을 펼쳐 걸었다.
“아악! 웁!”
“으윽.”
마사가 클레어가 혀를 깨물 걸 우려하여 입에 천을 물려주었으나, 에리히는 정직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십여 분, 마침내 마사의 투쟁 끝에 클레어의 손은 에리히의 머리와 옷자락 대신 준비된 천을 잡았다.
에리히는 서둘러 산실 밖으로 나갔다. 소독한 옷으로 갈아입고 손을 씻고 도로 들어갈 작정이었는데, 그럴 틈도 없었다.
산파가 뛰어 들어가더니 의사와 마주 고함을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에리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문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어도, 감염의 위험을 생각하면 문조차 열 수가 없었다.
안에서 클레어의 비명이 단속적으로 들려왔다.
에리히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다고 생각했다. 문 앞에서 너무 오래 서성거려서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마침내 클레어의 비명 소리가 멈추고,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응애애애!”
에리히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심코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클레어는 건강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강건한 체질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모녀나 자매간에는 체질도 닮는다는 생각이 억지로 덮어 두었던 의지를 헤치고 그의 머릿속에서 기어올라 왔다.
“클레어!”
그는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듯 문을 다시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안에서는 여전히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고, 에리히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소음이 계속되었다.
“제발 대답 좀 해!”
그는 간절하게 소리쳤다. 클레어가 직접 대답하지는 못해도 하녀 한 명 정도는 대답할 수도 있을 텐데.
초산은 오래 걸린다는데, 소리가 너무 빨리 끝난 것마저도 불안했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갔다. 에리히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깨끗하게 씻긴 아기를 흰 천에 싸서 안은 마사가 웃는 낯으로 나왔다.
“건강한 아드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클레어는?”
“지쳐서 아기님을 안아 보시고 바로 잠드셨어요. 산파가 무척 솜씨가 좋아서 빨리 끝났으니, 나중에 꼭 칭찬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별문제는 없는 거지?”
“안을 정리하고 나서, 공작님께서도 차림을 갖추신 후에 들어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마사가 땀에 범벅된 얼굴로 말하고, 에리히의 팔에 아기를 안겨 주었다.
에리히는 엉거주춤하게 아기를 안았다. 안았다기보다는 들었다는 말이 맞았다.
제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는 그렇게 큰 것 같더니, 나온 것을 보니 식탁 위의 빵 바구니만 했다.
“아.”
아이는 자신을 닮은 빛깔의 금발이었다. 기쁨보다도 묘한 감동 같은 것을 느끼며 에리히는 아기를 안고 돌아섰다.
그리고 산실 앞에 모여든 가신들이 웃음이든 경악이든 표정을 숨기려고 기를 쓰고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사실 그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도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쥐어뜯긴 봉두난발에 단추가 전부 날아간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
그는 저도 모르게 클레어에게 옮은 입버릇을 뱉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막시밀리안이 제일 먼저 웃음을 솔직하게 내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가신들은 지금이 웃어도 되는 타이밍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 아닌가.
“각하를 꼭 닮으셨습니다!”
“경하드립니다!”
“몸집만 봐도 아주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기님이십니다!”
축하 속에 휩싸여 에리히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결국 그도 품에 들어와 있는 따끈따끈하고 조그만 체온에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제 아이였다.
* * *
“엄마 나빠!”
엘리엇은 제일 먼저 그런 투정부터 부렸다.
클레어의 산통이 시작된 것이 밤 시간이었기에, 엘리엇이 잠든 사이에 시작해서 끝나 버렸던 것이다.
마사와 함께 엄마가 아파하거나 소리를 질러도 절대 놀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배웠는데, 배운 대로 할 기회조차 없었다.
“나도 제일 먼저 아기를 보고 싶었는데.”
“쿨쿨 잤잖니.”
침대에 혈색 없는 얼굴로 누워 있던 클레어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낳는 고통까지만 각오했지, 낳고 나서도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뿌듯했다.
“아기는 보고 왔니?”
“응! 너무 예뻐!”
“너도 꼭 그만큼 예뻤단다.”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팔을 벌렸다.
엘리엇이 발로 원을 그리며 몸을 꼬았다. 클레어는 의아하게 보았다.
“왜? 이제 형이 됐으니까 엄마한테 달려들진 않을 거야?”
“엄마는 아프니까.”
“아픈 데도 안아 주지 않으려고?”
함부로 뛰어들거나 안기면 안 된다는 주의를 거듭 들었으므로 엘리엇은 조심조심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클레어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동안 배가 너무 커서 꼭 안지 못한 게 서운했는데, 그 마음이 모두 풀어질 만큼 클레어는 엘리엇을 품에 끌어안았다.
“엄마 배가 없어졌어.”
“아기가 나왔으니까.”
그러면서 클레어는 엘리엇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리고 웃었다.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나랑, 아기랑?”
엘리엇이 반색하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