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가 분명해-260화 (261/263)

#260화

그의 손에는 쟁반이 하나 들려 있었다. 클레어는 그 모습을 보고 흉험한 생각을 했던 것을 잊었다.

“직접 가지고 왔어요?”

“사람이 많을수록 감염 우려가 높다고 하니까.”

어차피 유모와 마사가 아기를 안고 오가고 있는데, 그가 새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클레어는 끙끙대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냥 나를 돌봐 주고 싶다고 말하지 그래요? 이제 와서 날 상대로 체면이고 프라이드고 챙겨 봤자, 와!”

그녀는 감탄사를 흘렸다. 에리히가 들고 있는 쟁반 위에는 큼직한 그릇이 있었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해조류를 넣은 쇠고기 수프였다.

미역국이라는 뜻이다.

“와! 아니, 이걸 어떻게?!”

“해초 수프라니, 괴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찾아보니 있긴 하더군.”

에리히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비척비척 지팡이를 짚고 테이블 쪽으로 갔다.

세 걸음도 걷기 힘들다고 엘리엇에게 찡찡대던 때와 달리 활발한 걸음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안 돼요. 밥이 있어야 해. 아, 근데 솥 밥 하려면 또…….”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에리히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미역국 옆에 놓인 것은 빵과 토마토소스였다. 그건 진짜 아니었다.

클레어는 일단 따끈따끈한 국물을 한 숟가락 들이마셨다.

“크……, 이거지! 아, 미역만 있는 게 아니네.”

다른 해조류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골라내라고 주방에 지시만 내리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다.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는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어, 가져올 수 있는 걸 모두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모두 육수를 내는 용도라고 들었다.

재료를 먹어 치우는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입덧 때는 입덧이라서 그렇다 치지만 말이다.

에리히는 아직도 매운 양념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분한 것은, 화학 공격에 가까웠던 그 음식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국물만 몇 술 떠먹고도 한층 기운을 냈다.

“뜨거운 국물이 속을 아주 싹 내려 주는 게, 밥만 있으면 열 그릇도 먹겠어요.”

“식욕이 있는 건 좋은 일이지.”

“힘내서 주방에 가 봐야겠어요.”

에리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클레어는 미리 항복했다.

“알았어요. 뭐 어차피 여기가 무균실도 아닌데, 까다롭긴.”

“사람 많이 오가는 곳이랑 같나.”

“그래도요.”

“마사한테 시켜.”

“으음.”

어차피 자신이 솥 밥에 도전한다고 잘할 것도 아니라서,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가 아기를 안고 온 것은 그녀가 빵에 잼을 발라 ‘이건 그냥 간식이지!’라고 한탄하며 씹어 삼킨 다음이었다.

아기 싸개에 단단히 싸여 마사의 품에 안긴 아기는 이제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환하게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먼저 앉으세요. 아직 힘드시니까.”

“응.”

클레어는 에리히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앉았다. 마사가 그녀에게 아기를 안겨 주었다. 엘리엇이 조르르 클레어의 옆으로 기어 올라왔다.

아직 초점은 맞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선명한 푸른색이었고, 그 위에 금빛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괜스레 그것을 건드리며 클레어가 웃었다.

“아니, 그런데 봐도 봐도 신기해. 어쩜 이렇게 똑같지?”

그리고 이번에는 엘리엇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말했다.

“이 핏줄이 너무 강한 거 같아요.”

“우웅.”

“금발은 열성 인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틀로 찍어 낸 것처럼 생겼대?”

“엄마아!”

볼을 꾹꾹 눌린 엘리엇이 항의하는 목소리를 냈다.

“음…….”

에리히는 부정하지 못했다. 좀 적절히 섞여서 나왔으면 좋았으련만.

태어났을 때부터 저를 닮은 아기가 클레어에게 안겨 있으면 미묘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에리히는 역시나 그런 기분을 조금 느꼈다.

물론 뿌듯함과 기쁨도 함께였다.

“자라면서 변하기도 하니까요. 첫아들은 엄마를 닮는다는 말도 있고…….”

“이왕 닮게 나온 거 자랄 때까지 에리히를 닮아야지. 얼굴은.”

“얼굴은?”

“키도요. 아, 몸도.”

“…….”

“성격은 반만.”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면서 키들키들 웃었다. 그래도 이 아이는 괜찮을 것이다. 착한 엘리엇이 위에 형으로 버티고 있어 줄 테니까.

아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엘리엇이 너무 고생할까 봐 염려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사가 물었다.

“어떠세요, 오늘은?”

“이제야 젖이 좀 돌기 시작하더라고. 산파 말로는 보통 출산한 지 사흘쯤 되면 괜찮아진다던데.”

“낳는 고생이 덜하셨다 싶더니, 회복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셔서……. 좀 잘 드셔야 되는데.”

“그래도 나야, 마사도 있고 유모도 있고 편하지.”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면서 아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임신 중에는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만삭이 되고서도 실감이 별로 나지 않았는데, 정작 낳고 나니 이게 정말 내 안에서 나왔다니 신기했다.

아기가 조그만 입을 오물거렸다. 저도 살아 있다고, 입도 움직이고 눈동자도 움직인다.

울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입을 제 나름대로 크게 벌렸다 닫는 것이 하품인가 싶었다.

“젖을 물리는 게 좋을까?”

“조금 전에 잔뜩 드시고 와서 괜찮으실 거예요.”

“내가 먹여도 괜찮은데.”

“너무 힘드실 거예요. 조금 더 몸이 회복되신 후에 시작하셔도 돼요. 하지 않으셔도 괜찮고.”

“그래도…….”

“유모의 젖이 아주 넉넉해요. 남의 아이 것을 빼앗아 먹이는 게 아니니 염려 마세요.”

클레어는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밤에 푹 잘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래도 뭐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마, 엄마.”

엘리엇이 활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가야 이름은 뭐예요?”

“고민 중이야.”

“아직도요?”

“아빠한테 지으라고 했는데, 아직이래.”

엘리엇이 에리히를 돌아보았다. 에리히가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사실 클레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몇 달째 고민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클레어는 처음에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예요, 무조건 당신한테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낳고 나서는 이름 지을 권리를 기꺼이 그에게 양보했다.

이 아이가 클라우제너 공작가를 상속하게 될 것은 분명했고, 공작가의 가신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에리히는 고심이 컸다.

관례대로라면 선조의 이름 중 하나를 물려받아야 하지만, 엘리엇과 형제로 키우려면 이름도 같은 방식으로 맞춰 짓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앞으로 클라우제너와 델포드의 관계를 생각하면, 황실처럼 후계자의 이름에도 신경 쓰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괜한 생각 할 필요 없어요. 예민한 시기라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전통을 핑계 대는 것이 나을 수도 있죠.”

“음…….”

“로멜 식이든 아렌 식이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러면 하나씩 섞어서 지어요. 아이를 한 명만 가질 것도 아니니까.”

“그것도 아직 합의되지 않은 일이잖아.”

“합의고 뭐고……. 그러면, 효과 확실한 피임법이라도 쓰겠다고요?”

“아이 앞에서 무슨 소리야?”

에리히는 그 말에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아기를 보면 또 그런 마음이 녹아내렸다.

다음에 아이가 생긴다면, 클레어를 꼭 닮은 딸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좋지 않다. 20년 후의 일을 연상하고 그는 생각을 고쳤다.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결정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지을게요.”

“……그렇게 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붙이죠.”

에리히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클레어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잖아요. 윗대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게 전통이라면, 나는 그랬으면 좋겠어.”

“클레어…….”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게 불편하면 그러지 말고요.”

“아니.”

에리히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뻐하는 기색이라, 클레어는 미소만 지었다.

그가 짐을 나눠 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름을 붙인 아이가, 미래에 그의 짐을 나눠 지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물론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녀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여기에 있는 것이 그녀의 가족이며, 그녀가 살아가는 장소였다.

< 내 아이가 분명해 完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