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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분명해-261화 (외전 1) (262/263)

#외전 - 운 좋은 남자 (1)

그는 운이 좋은 남자다.

전생에는 제국 3대 공작가라고 불린 가문의 주인이자 제국 제일의 대부호였다.

그리고 현생에는 석유왕의 맏손자로 태어났다. 2차 대전 시기에 미국으로 팔리듯이 건너온 증조부부터 그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조부는 미국에서 '가문'이라고 불릴 만한 것을 만들었다. 순수한 혈족 집단은 아니었으나, 조부를 중심으로 상속권을 가진 일가친척과 심복들을 모아 놓은 이 집단은 아마도 재벌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모태라 할 수 있는 석유 기업은 두 번이나 반독점법에 찢겼으나, 지금도 또 다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만하면, 그가 두 번의 생에 모두 비슷한 행운을 얻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귀족이 아니라는 것이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분 제도가 없어졌다고 해도, 에너지 자원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는 회사의 주인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권력은 그다지 차이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도 자기가 가진 것이 행운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귀하게 살아가며, 타인을 책임지도록 의무 지워졌다는 운명 말이다.

그리고 이번 생에도 역시 그것이 운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은 룰렛에서 잭 팟을 터뜨린 행운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태생부터 다른존재라고 여겼다.

일곱 살에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전생의 일을 기억해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운이 좋았지. '

그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거의 일평생 불만을 투덜거렸던 아내가 안다면, 분명히 또 화를 내리라. 이런 법이 대체 어디 있느냐며 말이다.

'혼자서만 운이 좋다고 화를 내겠지.'

그는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며 킥킥 웃었다. 아내가 자신보다 두어 살 어린것을 생각하면, 지금쯤 한참 귀여운 모습일 것이다.

그런 얼굴로 팔짱을 끼거나 허리에 손을 올리고 화를 내는 걸 생각하면, 화내는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는 세상 제일의 행운아였다.

비단 가문이나 부귀 권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지할 사람을 만나, 나이 들 때까지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 아내가 평화롭게 잠든 채 눈 감는 것을 보았고, 자신도 그랬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운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이번 생에도 그는 그녀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

『이유리』

결혼 계약서의 서명 끝에 붙어 있었던 그 세 개의 글자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그녀가 말하곤 했던 이상한 단어와 표현들, 그가 괴짜 같다고 생각했던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함께 깨달았다.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때때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제 세계에 파묻히는 버릇이 있었던 것도.

가 본 적도 없는 바다, 먹어 본 적도 없을 식재료, 남부 아렌 식일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마사조차도 희한하게 여기던 요리들. 다른 곳에서는 들어 본 적 없는 동화, 양육 방식, 새로운 아이디어.

그 모든 것이 그녀였으니, 결국 자신은 그녀를 몰랐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야 세상에서 오로지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되었다.

'클레어는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르겠지.'

그와 반대로, 그녀는 이쪽 세상의 그녀가 더 먼저였을 터이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도, 그때도, 만나기 전에는 그를 모른다.

그는 역시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이 홀로 떨어졌던 그녀와 달리 그는 이 세상에 그녀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름을 알고 있고, 생활 습관이나 그 밖의 생각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한 적은 없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단서를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환생해 왔다

고 말해 보았자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운명이 자연히 만나게 해 주리라고 믿어서는 아니다. 자신의 행운은 믿었지만, 방심하면 품에서 쏙 빠져나가는 게 그녀의 버릇이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 힘과 권력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진짜 제 것이 될 때까지.

가문을 정리하여 자신에게 반발할 수 있는 자를 없애고, 무슨 이유로든 여자를 들이밀던 자들을 모두 제거했다. 조부조차 염려스러워하며 결혼은 생각조차 없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회사를 샀다.

출근했을 때, 사무실 분위기가 어쩐지 흉흉했다. 유리는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을 느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옆 부서의 김 부장이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조르르 그녀의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물론 다람쥐처럼 귀엽다는 뜻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는 다람쥐보다는 여러모로 도토리를 닮은 남자였다. 그것도 반질반질하고 귀엽다는 뜻은 아니다.

제 일은 또 팽개쳐 두고 소문 이야기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이 과장은 알고 있었나?"

"뭘요?"

뭘 묻는지 알면서도 그녀는 굳이 되물었다. 실무진으로서 알고는 있었지만, 안 그래도 오늘부터 피곤한 일을 해야 하는데, 비공식적인 루트로 전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경영 지원 본부에 새 본부장님이 오신다면서, 대표 이사님 사촌이라던데.”

“회사 합병한 지 이제 한 달째잖아요. 당연히 자기 사람 꽂겠죠.”

"이제 겨우 서른이라더라고.”

“그래요? 대표 이사님도 이제 겨우 스물일곱이잖아요.”

"아니, 어차피 대표 이사님은 얼굴마담이잖아. 한국 쪽은 미국 본사랑 다르게 족벌 경영을 해 보겠다는 의지겠지."

이런 말 함부로 하다가 본부장이든 상무든 이사든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나지 싶었으므로 유리는 어깨만 으쓱했다.

'아니, 근데 족벌 경영 할 거면 더더욱 친척을 꽂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리가 동의한다고 생각했는지, 김 부장은 목소리를 낮추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은근하게 말했다.

"그렇잖아. 사실 미국 굴지의 석유 기업이 뭐가 아쉬워서 한국 회사를 사겠냐고.”

“우리도 나름 대기업이에요."

물론 석유 기업이 살 이유가 없는 회사라는 점은 유리도 동의했지만, 부장님보다 더 윗분이 무서우므로 입은 다물었다.

"근데, 그거 알아?"

김 부장이 목소리를 낮춰서 은근하게 말했다.

“새로 오는 그 본부장님, 미남이라던데.”

"그래요?"

이미 실무자들 사이에 소문 자자한 이야기였지만, 유리는 짐짓 무심하게 대답했다. 미남이면 눈이 즐겁겠지. 그렇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돈은 종종 사람 머리 뒤에 후광을 만들어, 마치 조명과 반사판을 대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모로 보이게 하는 법이다.

그래도 도토리보다는 낫긴 할 것이다. 김 부장은 그 속도 모르고 니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유리 씨야, 다른 여자들이랑은 다르지. 그 이야기 하니까 우리 사무실 여직원들은 다 꺅꺅거리고 난리던데.”

왜 함부로 이름 부르냐.

슬프지만 유리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저라고 미남 싫어하겠어요? 그런데 김 부장님, 회의 들어가실 시간 되지않았어요?"

이제 가서 일 좀 하라는 뜻으로 말했는데,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리는 자신이 인기척에 예민한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공기 전체가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확실히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공연히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미남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헉!"

사무실인 것도 잊고 유리는 입을 벌렸다.

저 얼굴은 스크린 너머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카메라를 갖다 대면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쪽에서도 별로 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실례했군. 놀라게 할 작정은 아니었는데.”

남자가 말했다. 유리는 놀란 가슴을 누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상대가 미남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훤칠한 몸에 딱 맞게 갖춰 입은 슈트가 반지르르하니 아주 비싸 보였다. 그것만 봐도 상대가 누구인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근무 시간에 본부장에 관한 소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현장에서 본인에게 들킨 셈이었다.

그나마 험담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3분만 더 일찍 들어왔으면 족벌 경영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것이다.

김 부장이 당황해서 어버버 입을 벌렸다. 그럴 줄 알았다고 비난하는 시선이 사방에서 꽂혔다.

“왜? 내 험담이라도 했나 보지, 이유리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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